‘87년 민주주의’ 후퇴인가 ‘97년 신자유주의’ 심화인가
[한겨레신문] 2009년 06월 11일(목) 오후 02:29

[한겨레] 한국사회 체제논쟁 재점화

‘반신자유주의’-‘반이명박’ 정치논쟁으로 확대

손호철 “IMF뒤 양극화·비정규직 등 근본 변화”

‘87년 체제냐, 97년 체제냐.’
진보 사회과학계에 다시 한번 ‘체제논쟁’이 점화될 조짐이다. 논쟁의 중심에는 1990년대 후반 노사관계 연구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된 뒤, 2000년대 중반 계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특성을 총괄하는 용어로 공론화된 ‘87년 체제’가 자리잡고 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9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한국 민주주의와 87년 체제’라는 주제로 마련한 토론회에서 “87년 체제론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체제논쟁은 더이상 ‘주먹구구식’ 논쟁이 아닌, 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결합체인 ‘사회체제’와 헌정·노동·정당·젠더 체제 등 다양한 ‘부분 체제들’을 구분하는 체계적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며 논쟁의 방향 전환을 촉구했다.

지금의 한국을 규정하는 총체적 사회질서가 1987년 불완전한 민주화를 통해 형성됐다고 보는 ‘87년체제론’에 대해선 6월항쟁 20년을 전후한 2007년 무렵부터 다양한 논의들이 쏟아졌다. “87년체제는 없다”는 전면부정론이 나왔는가 하면, “87년체제는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종결됐다”는 시효소멸론도 주목을 받았다.

대선과 이명박 정부 출범을 거치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논쟁은 촛불시위와 미디어법 파동, 용산 참사 등을 계기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공고화 단계에 진입했다고 여겨지던 정치적 민주주의가 퇴행 양상을 보이면서 이른바 ‘민주화 체제’로서 87년체제가 갖는 과도기적 불안정성이 거듭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창비그룹이 최근 87년체제를 둘러싼 학계의 논의를 <87년체제론>이란 책으로 묶어낸 것이 발화점 구실을 했다. 책의 서문에서 김종엽 한신대 교수는 97년체제의 우위를 주장하는 손 교수 등의 주장을 “우파의 ‘선진화론’과 동일한 프레임에서 87년체제를 평면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는데, 이번에 손 교수가 작심한 듯 창비의 87년체제론을 반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손 교수의 비판은 창비그룹이 1987년의 질적 전환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 이후의 전환, 곧 1997년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면화가 갖는 의미를 부당하게 축소하고 있다는 데 맞춰져 있다. 비정규직의 주류화와 청년 실업, 사회 양극화 등 “97년 이후 나타난 근본적 변화를 목격하면서도 한국의 사회체제가 여전히 87년체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에 눈먼 ‘색맹 사회과학’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손 교수가 볼 때, 87년체제는 헌정체제 같은 부분 체제의 의미는 있지만, 사회를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사회체제의 의미는 소멸됐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변화에 주목하는 ‘08년체제론’에 대해서도 손 교수는 “권위주의 회귀와 경제의 우경화가 나타나고 있지만, 97년체제의 특징인 제한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벗어난 것이 아니란 점에서 08년체제를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일축한다.

이번 논쟁의 무게가 간단치 않은 것은 체제 성격을 둘러싼 이론적 경합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반신자유주의 연합’(97년체제론) 대 ‘반이명박 연합’(87년체제론) 같은 정치전략과 연동된다는 데 있다. 1980~90년대 엔엘·피디간 사회 성격 논쟁이 ‘민주대연합론 대 독자세력화론’이라는 정치 논쟁과 짝을 이뤄 진행된 것과 같은 이치다.

손 교수는 헌정·노동·민주주의·분단·젠더 체제 등 다양한 부분 체제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손 교수의 논의에서 이들 체제는 사회체제의 ‘하위체제’ 성격이 짙다는 점에서 그 안에 담긴 정치적 의미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97년체제가 요청하는 반신자유주의 연합을 기축으로 다양한 ‘하위연합’을 접합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반헤게모니 전략이다. 손 교수의 97년체제론을 ‘신자유주의 환원론’으로 비판해온 반대 진영의 반응이 기다려지는 대목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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