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평화를 위한 사회 문화적 비전1)



1. 상황 진단


 (1) 개념의 양면성


 ‘생명’과 ‘평화’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면서도 매우 구체적인 것을 지칭한다.

- 사사로운 영역과 공공의 영역을 동시에 아우른다.

-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뉘앙스를 띠지만 지극히 전투적이고 위험한 내용을 함축한다.

- 순진무구한 듯 하면서도 고도의 정치성과 급진적인 운동성을 띤다.

- 사소한 일상 세계와 관계되어 있으면서도 지구적인 연대와 행동을 요구한다.


 (2) 세상은 좋아지는가?


생명과 평화의 관점에서 긍정적인 징후들이 적지 않다.


- 냉전 시대가 끝나면서 대규모 전면전이 발발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었다.

- 이라크 전의 패착으로 미국의 패권주의는 한 풀 꺾인 듯하다.

- 한국에서 군부 독재의 망령은 사라졌고, 정치범과 고문 관행도 없어졌다.

-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많이 개선되었고, 전반적으로 인권이 신장되고 있다.

-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주먹질하며 싸우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다른 한편 여전히 암울한 상황들이 지속된다.


- 국지전과 테러는 끊이지 않고 있고 선진국들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

- 아프리카 등 저개발 지역의 기아와 빈곤과 위생은 악화되고 있다.

- 한국의 경우 자살률이 지난 십년 사이에 열 배 증가했다.

- 이혼 등 가정 해체로 인한 위기 청소년들이 급증한다.

- 사회의 여러 집단들 사이의 갈등과 분규가 심화되고 있다.


2. 시장 지배의 전면화화 과잉 상품화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주 먼 옛날, 빈곤과 나태와 불구를 자부심과 긍지로 채웠던 시절이 있었다. 시래기가 올라앉은 밥상, 할 일 없는 게으름, 버짐 가득한 얼굴, 종기 난 팔뚝, 절름발이의 지팡이, (...) 가난과 질병과 죽음이 밥상머리의 국그릇처럼 익숙하던 때였다. 전쟁이 끝난 뒤 죽음과 불구는 고통과 슬픔일지언정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거적때기를 둘러친 천막집은 불편함과 남루함이었을 뿐 열등감은 아니었다. (...)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은 요원했으나 어쩔 수 없는 궁핍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가치였다. 그런 때가 있었다.’ (김진송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중에서)

대다수 한국인에게 가난은 오랜 숙명이었고, 불과 반세기전만 하더라도 대다수 사람들이 절대 빈곤의 그늘에서 신음하였다. 그러나 비록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언젠가 ‘해 뜰 날이 있겠지’라는 희망으로 억척스럽게 하루하루를 기워갔다. 특히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해서 자식을 위해 부모들은 어떤 고생이든 감내했다. 그리고 빈민가에는 농촌적인 공동체의 정서가 남아 있어서 돈독한 이웃관계로 결핍을 서로 메워주었다. 그러기에 위 인용문에서 증언되듯이 가난한 가운데서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스스로 충전할 수 있었고, 그 나름의 당당함과 꿋꿋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기백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돈이 없으면 수치심과 모멸감에 잔뜩 주눅이 들어 살아간다. 사람의 기본적 존재 가치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전제로 허락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예전의 기준으로는 결코 가난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인데도 상대적 박탈감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정도면 살만한 단계가 되었는데도 돈에 대해 결핍감을 느낀다. 거기에는 구조적인 문제도 없지 않다. 서울의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의 땅값과 물가로 인해 기본적인 생활비가 대단히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훨씬 값싸게 누릴 수 있는 삶의 기본적인 혜택들을 우리는 매우 비싼 값을 치르고 얻는다. 그 돈을 벌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일해야 하고, 그 결과 수많은 직장인들과 몸과 마음이 혹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른바 ‘Job Burnout’이라는 것이 심각한 징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듯 지치고 마모된 심신을 달래는 기제가 날로 발달하고 있는데. 바로 소비세계이다. 날로 현란해지는 상품 스펙터클의 현란함 속에 새로운 물건을 구매하면서, 우리는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뿌듯함으로 일시적인 보상을 받게 된다. 각종 서비스가 다양하게 개발되면서 고객은 어디서든 환영받는다. 소비자로서 깍듯한 대접을 받으면서 노동자로서 겪는 굴욕감을 상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매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일을 해서 더 많이 벌어야 한다. 그런 악순환 속에 시장이 계속 확대되고 점점 더 많은 것이 상품의 형태로 제공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돈이 없으면 삶의 즐거움은 물론 기본적인 필요조차 충족시키기가 자꾸만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듯 삶이 고비용 구조에 종속되는 가운데 사람들은 오로지 더 많은 재화의 획득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관계와 협동의 틀을 해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고립되고 단절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시장에 의존하게 되고, 그것은 다시 사회적 연대를 희석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돈이 없으면 무력하고 또한 고독하다. 달동네에 살다가 재개발로 임대아파트로 이주하거나 그럴 형편도 되지 않아 연립이나 다세대 주택 지하 단칸방으로 옮겨간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급할 때 아이를 맡아주고 질병 등의 어려움을 겪을 때 서로 돌보아주던 상호 부조의 완충지대가 이제 없다. 그리고 이웃의 알음알이는 일자리나 일거리를 얻는데 결정적인 통로가 되었는데, 이제 그 네트워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무력화될수록 시장의 지배력은 확대된다. 과잉 상품화 속에 삶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화폐를 매개로 영위되고,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무능함’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노동의 종말’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폐기처분되고, 청년 실업의 경우처럼 아예 노동시장에 진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서글픈 일은 생산자로서도 소비자로서도 아무런 입지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입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빈털터리로 도시를 배회하거나 집안에 처박혀 지내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는 가족이나 친지도 지지 기반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가족과의 갈등 속에 괴로워하거나 친지들이 모이는 명절을 기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쓸모없는 인간으로 무시되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젊은이들에게 미래는 한없는 불안의 원천이다. 경제가 사회와 삶을 점점 포괄하는 흐름은 맹목적인 재력의 추구 속에 생명을 고갈시킨다.     


3. 관계와 소통의 위기


“오늘도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이것은 북유럽의 양로원에서 가끔 발견되는 유서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쪽 나라들은 노인들의 천국이다. 국가 예산 가운데 노인 복지로 할당되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누구든지 그러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노인 홈에는 쇠약해진 육신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데 따르는 불편이 없도록 모든 시설이 세심하게 배려되어 있다. 병이 들면 정성껏 치료하고 간호해준다. 따라서 돈 걱정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런 염려 없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거의 완벽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종종 자살하는 노인들이 있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기에? 단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죽음을 택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캐스트어웨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이 비행기 사고로 어느 무인도에 표류하여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데, 육체적인 고통만큼이나 외로움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함께 비행기에서 떨어져 섬에 도착한 ‘윌슨’이라고 쓰인 배구공과 사귀기 시작한다. 거기에 얼굴 모양을 그려놓고 마치 사람처럼 말을 걸고 정을 나눈다. 그러다가 실수로 그 공을 파도에 떠밀려 보내게 되는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별의 아픔으로 울부짖는 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인간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마음과 마음이 통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 없이 살지 못한다.

현대 문명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아니 풍요로울수록 사람들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전통적인 폐쇄 집단의 사슬에서 벗어난 개인들은 타인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신 저마다 고독한 섬처럼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맞았다. 사람들을 묶는 제도적인 틀은 점점 견고해져온 데 반해, 인격적인 관계는 점점 박약해져온 것이 근대 이후의 역사이다. 근대 이후에 남녀 사이에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이 중대한 관심사가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공동체가 해체된 상황에서 현대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하고, 자아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 개인은 끊임없이 사회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타인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매우 중요해진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타인에게 긍정적으로 수용되고 지지를 받는 것은 행복의 핵심 요소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잇따르고 있는 연예인들의 죽음을 통해 그 병리적 상황을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들의 주된 사인(死因)은 두 가지, 교통사고와 자살이다. 교통사고가 잦은 것은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전국을 과속으로 달리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자살은 왜 잦은가? 요즘 연예인들은 자신이 타고나거나 개발한 ‘끼’보다는 기획사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로 승부를 건다. 그래서 자신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는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면서 인기를 유지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소심한 성품을 감추고 발랄한 표정과 몸짓을 연출한다. 그 결과 화려한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음울한 감정 같은 것을 스스로 억누르게 된다. 인정받지 못한 감정이나 고민은 계속 내면을 짓누른다. 그것이 임계치를 넘어서면서 삶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부숴질듯 한 그들의 심경에 치명타를 날리는 것은 바로 네티즌들의 악플이다.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의 입장에서 대중들이 쏘아붙이는 욕설과 비난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익명성이 보장된 사이버 공간에서 막말과 욕설을 일삼는 사람들은 포악하고 험상궂은 사람들이 아니라 의외로 얌전하고 내성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누군가를 공격하고 학대하는 것은 바로 자기에 대한 저주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치이고 상처받으면서 쌓인 증오심을 제3자에게 퍼붓는 셈이다. 그런데 그 투사(投射)의 대상이 되는 연예인은 자기를 탓하면서 모멸감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연예인들의 죽음은 이 시대 우리 삶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속도와 단기적인 성과의 노예가 되어 과로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는 것, 자기 아닌 모습으로 타인들에게 인정받지만 그로 인해 본성은 계속 억압되는 것, 그리고 잘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을 참혹한 폭언으로 드러내는 것... 매스미디어의 현란한 조명과 만인의 갈채를 받으면서 영예를 누리지만 언제나 지친 몸과 찢어진 마음으로 힘겹게 일상을 이어가야 하는 연예인들이 적지 않은 현실, 그러한 연예인들을 한없이 동경하며 가면무도회를 벌이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4. 생명과 평화를 위한 삶과 사회의 리모델링


(1) 치유와 자기 긍정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가 깊다. 저마다 서러운 사연들이 가득하고 맺힌 응어리가 크다. 자기의 존재와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한다. 한국영화 가운데 천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왕의 남자] [괴물])은 한결같이 비극으로 끝나고 주인공은 거대한 권력이나 시대의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한국인들은 그런 슬픈 운명의 소유자들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평화는 자기와의 화해에서 출발한다. 가정에서 직장 그리고 사회의 각 영역들에서 이어지는 숱한 갈등과 폭력적 상황의 뿌리를 자기 안에서 직시하고 치유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상실해온 그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적인 세계에서 타인들과의 관계를 재건하는 작업과 병행되어야 한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빚어내는 화법을 의식적으로 연마해야 한다. 최근에 관심을 끌고 있는 ‘비폭력 대화’, ‘감정 코칭’, ‘의사소통 기법 social skill’ 등은 그 역량을 키워주는 프로그램들이다.

 

(2) 관심의 그물망


지역사회와 가정의 급격한 해체를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벌한 글로벌 충격에 무기력하게 노출되고 있다. 실직자와 파산 신청자는 계속 늘어나고, 노숙인과 위기 청소년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익명의 도시에 방치된다. 탈북 새터민와 이주노동자및 그 가족들의 사회적 적응은 여전히 난감하다. 고령화 시대를 맞았지만,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적 위엄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인간의 실존적인 나약함을 긍정하면서 곤궁한 처지를 보살펴줄 수 있는 돌봄의 네트워크가 절실하다. 맹렬한 속도로 전개되는 변화와 치열하게 가속화되는 경쟁의 부정적 결과들로부터 개개인을 보호할 수 있는 완충 지대와 사회적 안전망은 지역사회에서부터 밀도 있게 구성되어야 한다. 그것은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유대감을 토대로 가능하다. 그것은 단순한 복지의 기능을 넘어서 자아 정체성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3) 비시장 경제


경제가 모든 것에 우선되면서 돈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만연한다. 그런데 경제는 무엇인가? 삶을 풍요롭게 가꾼다는 경제 본연의 목적을 생각해볼 때, 사회적 협동을 통한 일의 수행이 무엇보다도 핵심에 놓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시장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채 부가 가치를 생산하고 나눌 수 있는 경제의 영역을 요구하며 또한 가능하게 한다. 사회적 기업, 커뮤니티 비즈니스, 생활협동조합, 지역 화폐(LETS), 벼룩시장, 공정 무역 등 최근에 활성화되고 있는 경제적 실험들은 비시장 내지 반(半) 시장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규모의 맹목적인 확장과 무한정의 이윤 추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지속가능성을 견지하면서 지역 내부 순환 경제를 도모하는 가운데, 삶의 동력을 경제적인 부가가치의 원천이자 또한 생산의 과정 및 결과로 삼는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풀려나 존재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타인들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가는 보람이 거기에 있다. 덜 일하고 덜 벌고 덜 먹고 덜 쓰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결핍 또는 여백 (그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을 소통과 상부상조 그리고 문화의 창조로 메워가는 것이다.


(4) 생활의 복원


출산률 저하로 사회의 재생산의 위기가 심각해진다. 한국에서 아빠들이 육아에 참여하는 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고, 아이를 돌봐주는 시설도 아직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직장과 사회에서 성취하고 승진하고 재화를 획득하는 일이 중요해지면서 사사로운 세계에서 일상을 창조하고 현재를 누리는 여유가 사라지고 있다. 식사를 함께 하고 설거지를 하고 여가를 향유하는 즐거움이 문화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 부모들을 위한 육아 휴직이 확대되어야 하고, 근로 시간 자체를 전체적으로 줄여야 한다.

아울러 몸의 새로운 발견이 이뤄져야 한다. 성적인 매력이나 젊음을 과시하기 위한 몸이 아니라 생명의 위대한 기운을 소통하는 회로로서 신체를 자각하는 것이다. 자동차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것도 걷기의 즐거움을 나누는 문화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 도시 곳곳에  산책과 달리기가 가능한 공간을 더욱 확충해야 한다. 인터넷 세계와 밀폐된 골방에서 벗어나 대기를 호흡하고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개방 공간들이 시민들에게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5. 토건 세력의 극복과 생명의 경제


요즘 같은 불황에도 잘 팔리는 책이 있다. 바로 지도책, 특히 도로 안내서가 그것이다. 몇 달 사이에 여기 저기 새로운 길이 뚫려 조금만 오래된 지도는 쓸모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국토의 방방곡곡이 공사판이다. 곱게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싹둑 잘라 도로를 만들고, 조용한 계곡에 굵다란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있다. 빈집만 늘어나는 농촌에 널따란 아스팔트를 깔고 원래 있던 길은 확장 공사를 하느라 난리를 피운다. 도로가 필요해서라기보다는 관련 거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사업이 수립되고 집행된다. 그렇듯 불합리한 예산 운용을 감시해야 할 국회의원들은 도리어 공사를 경쟁적으로 자기 지역구에 끌어다 댄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토건국가가 되었다. 역사의 기나긴 흔적을 간직한 공간을 한꺼번에 파괴하고 삭막한 길과 건축물들을 순식간에 깔아버리는 프로젝트가 너무 쉽게 이뤄질 수 있는 법과 제도를 갖고 있다. 아파트가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고 재건축 승인을 위해 주거 환경이 열악하거나 불안전하다고 판정을 받으면 온 주민들이 나서서 경사 났다며 축하하는 기이한 일이 한국에서는 버젓이 벌어진다. 유년의 추억과 이웃관계가 담겨 있는 삶의 유기적인 생태계를 20년 단위로 깡그리 갈아엎으면서 유령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듯 무모한 건설 사업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결탁하고 거기에 영합하는 세력은 이제 워낙 광범위해서 그에 대한 저항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정치권력과 자본 그리고 조직폭력배가 탄탄하게 연결되어 있고, 무지한 민심들이 거기에 동원되고 있다. 전라북도에서 시민단체가 새만금 간척공사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지역 주민들로부터 외면당할 뿐 아니라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 된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운동은 이렇듯 거대한 구조 악과 부조리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인 판단과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한 안티테제적인 운동은 생명의 경제를 확대하는 작업과 병행되어야 한다. 생명의 경제란 생산과 소비의 적절한 규모를 지속가능한 수준에서 유지시키면서 인간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영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로움에 익숙한 습관을 거리를 두면서 소박함과 느림 그리고 절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것도 그러한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그것은 소극적인 후퇴나 은둔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삶의 디자인이다. 광고를 통해 암시되는 상품 주술의 마법에서 벗어날 때 생에 대한 건강한 의욕이 솟아오른다. 내 인생은 나의 것! 정말로 꼭 필요한 물건의 적정 수준을 스스로 정하면, 한없는 돈 벌이 욕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울러 그 여백을 내면의 기쁨이나 관계 맺기의 즐거움으로 채워갈 수 있다.    

가난은 극복되어야 한다. 한국이 이룩한 근대화와 산업화의 성취는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지긋지긋한 배고픔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친 성과는 30여년의 고도성장의 기적을 일궈냈다. 그것은 지금도 빈곤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저개발 국가에게 희망의 징표가 된다. 그런데 그 위대함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경제의 성격 자체의 질적인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절대 빈곤의 늪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돈에 대한 강력한 집착은 이제 오히려 성장의 내실을 기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삶 자체를 풍요롭게 가꿔가는 것을 목표로 경제의 구조를 조정하지 않으면 경제도 삶도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아직도 고도성장의 신화를 재현하겠다는 정치인들의 야망과 공약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의 성장 동력을 놓고 볼 때 매우 요원한 꿈으로 보인다. 지구 생태계의  차원에서도 고도성장은 오히려 자제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들은 저성장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당분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청년 실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시장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면 인생의 패배자인가? 경제교육은 역설적으로 경제에 과도하게 의지하지 않고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화폐를 통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마련하면서 삶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대안적 경제 양식을  실험하는 것이다.

시장 그 자체가 악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문제는 시장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모든 영역에서 점점 과잉 상품화되는 현실, 그리고 시장에 참여하는 경제 주체들이 돈을 궁극적인 목표로 인식하는데 있다. 각박한 노동 시장과 현란한 소비 세계 사이에서 사람들은 마모되고 쇠약해진다. 생존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 타자의 욕망에 종속된 꿈이 삶을 옥죈다. 경제가 삶을 북돋는 살림이 되기 위해서 노동과 소비는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생명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힘을 자각하면서 인간의 창조성을 구현하는 행위를 촉매하는 장치로서 시장을 이룩해야 한다.


6. 존재의 신비와 영성


“우리 모두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무심히 살아가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인생의 끝은 온다. 단 한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이 진리를 직시하는 순간 또 누구나 묻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지금 그들을 보러 가라.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 - 퀴블러 로스[인생수업] 중에서


“메멘토 모리” - ‘죽음을 기억하라’ 이 말은 중세 유럽의 수도사들이 아침 인사로 나누던 말이라고 한다.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게도 마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욕심을 부리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또한 다른 동물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삶과 죽음은 항상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생명체는 그 자체로 늘 죽음을 내포하고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죽음을 향해 계속 달려가고 있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들 주변에는 늘 죽은 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품이나 묘소가 그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죽음을 멀리해왔다. 화장터나 납골당이 극도의 혐오 시설로 여겨지는데서 알 수 있듯이 죽음은 매우 불길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족 이외의 죽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기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가족의 죽음도 가까이에서 접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임종이 집이 아닌 집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일상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집안의 노인이 인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통해 어린 아이들은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게 되는데, 그러한 체험이 사라진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삶, 늙음을 망각한 젊음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그것은 얼핏 발랄하고 생기가 넘치는 듯하지만, 사실은 더욱 깊은 허무를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고 병들고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할진대, 그 여정을 묵묵하게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쳐 본 들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그 젊음이 자연스럽게 쇠퇴할 때 존재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고갈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미모를 뽐내던 여성일수록 갱년기에 접어들어 더욱 심리적 곤경에 빠진다는 점은 그러한 사정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죽음을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생명을 쇄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나’라는 개체가 지닌 생명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할 때 그것을 넘어서 생명의 드넓은 그물망, 우주의 연기(緣起)로 나아갈 수 있다. 종교와 예술은 그러한 인류에게 지혜를 가르쳐주어 왔다. 틱낫한 스님은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지구의 울음소리를 우리의 내면에서 듣는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는 궁극적으로 존재의 신비함을 깨달으면서 그 거대한 순환과 관계의 얼개를 통해 삶을 충만하게 채우면서 (life in fullness) 실현된다. 죽음과 정직하게 대면하면서 영성을 심화하기. 죽음에게 말 걸면서 삶을 일깨우기. 그 화법을 통해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다시 돌아보면서 인생을 가꿔갈 힘을 키우기.



1) 김찬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정책협의회 주제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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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도 한국YMCA 생명평화운동 제1차 정책협의회(2007년  5월 11일(금) 오후 3시 - 5월 12일(토) 12시, 유성 유스호스텔)  “삶과 지역에서 말하는 생명평화운동-나로부터 시작하는 운동, 공명하는 변화, 또 다른 삶의 고백보고서 중에서.


센터 출판물 "생명평화구상"에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