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 (한국YMCA전국연맹 결성 100주년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교수님이 2012년 12월 5월, 대전 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연말 정기 이사회에서 YMCA운동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비전과 과제에 대한 강연록입니다.
남북통일과 평화운동, 사람을 키우는 복지운동, 국제운동, 에큐메니컬운동,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자기 정체성 등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만 열 / 한국YMCA전국연맹 결성 100주년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121205 Y이사회앞,100년맞는Y과거미래(이만열).pdf (강연 전문)
먼저 창립 100주년을 앞둔 한국 YMCA연맹에, 지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한국 YMCA연맹 100주년을 준비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이신 이사 여러분들께 하나님의 가호를 비는 동시에 그 동안의 노고와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여러분들께는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YMCA는 근현대 한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봉사기관의 하나다. 한국 YMCA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한국사에서 근대 민권운동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 노력했던 독립협회가 1898년 해산되었을 때 여기에 충격받은 약 150명의 한국의 상류층 애국청년들이 그 이듬해 1899년 선교사들에게 YMCA를 창설해줄 것을 진정한 데서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청원을 받은 YMCA 국제위원회는 1901년 P.L.질레트를 창설간사로 한국에 파견하여 국내에 있는 각국 외교관·실업가 등과 한국의 유지·고관들로 자문위원회를 조직하고 한국 Y창설에 적극 나섰던 것이다.
우선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은 한국인이 Y를 주체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점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에서 기독교를 자주적으로 수용한 점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천주교를 자주적으로 수용했던 한국인들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성경을 번역하고 그것을 전파하여 한국 개신교회를 자주적으로 성립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된다. 한국 교회사에서 이미 알려지고 있는 바와 같이, 지금부터 130년 전인 1882년 만주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스코틀란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인 존 로스는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한 바 있다. 이렇게 간행된 성경은 한국인들에 의하여 한만 국경지대에 유포되어 1885년 여름까지 100명의 한국인 수세자가 나왔고, 600여명의 세례 대기자가 있었다. 1883년 초에 이 성경을 서울로 가지고 와서 전도에 임한 서상륜에 의해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아펜젤러 언더우드 두 복음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서울에만도 70여명의 수세 희망자와 소래에서 18명 이상의 회심자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또한 Y를 창설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Y창설에 나섰던 한국인들의 전통에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Y 창설에 앞장 섰던 한국인 청년들의 의지는 그 뒤 한국 Y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3년 10월 28일 한국·미국·영국·중국·일본 5개 국인 28명에 의해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되었다. 초대 회장에 J.S.게일, 총무에 질레트, 간사에 崔在學·金奎植 등이 선임되었다. 그 이듬해 1월에는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상재 유성준 김정식 박승복 이원긍 홍재기 안국선 등이 석방되어 Y에 가담하게 되자 Y는 일반인들에 의해 독립협회 부활체로서까지 인식되었다. 1904년에는 金貞植이 한인 총무가 되었고, 1905년에는 尹致昊가 부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06년에는 李商在가 교육부 위원장이 되어 YMCA사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1904년 현재의 서울 YMCA회관 자리로 옮긴 YMCA는 1906년부터 사업체제를 완비, 교육부·운동부·종교부 등이 주축이 되어 활발한 운동을 벌였다. 이 때 총무 김정식은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 청년들을 중심으로 재일본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였다.
1910년 미국에서 돌아와 학생부 간사에 취임한 李承晩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각 기독교 학교에 학생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 무렵 국권침탈의 치욕을 통탄하던 각 지의 학생청년회는 1911년 개성에서 또 다시 학생하령회를 열었다. YMCA의 세력이 이처럼 강화되는데 당황한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이른바 '105인사건'을 조작, 윤치호·李昇薰 등의 기독교인과 학생들을 기소·투옥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윤치호가 투옥되고, 이승만과 김규식 등은 해외로 망명하였으며, 질레트 등의 외국인도 밀려난 데다가, 1906년부터 고종으로부터 지원을 받던 지원금도 끊기게 되자, YMCA는 와해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총무 이상재는 YMCA에 남아 공업부 사업에 주력하여 YMCA의 경제난을 극복하는 동시에 1914년 4월에는 개성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였다. 8개 학생 Y로 조직된 연합조직의 초대 회장에 H.G.언더우드, 총무에 F.M.브록맨이 취임하였는데, 1915년에 석방된 윤치호가 이듬해 총무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Y운동은, 내적으로 자주적인 사회개혁운동과 민권운동이 좌절되고 밖으로는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던, 내우외환의 시기에 한국인의 요청에 의해 성립되었다.
자주적인 사회개혁운동과 민권운동의 좌절이란, 동학혁명 이후의 광범위한 사회개혁운동이 좌절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직접적으로는 19세기 말의 시점에서 보면 독립협회 운동의 좌절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개혁운동과 민권신장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벌이려던 독립협회 운동의 이상이 좌절되자 이를 계승하려는 의미에서 Y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바로 Y의 한국 사회를 향한 이상을 엿볼 수 있다고 본다.
한편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던 내우외환의 시기에 그 시대의 절박함을 감안한 젊은이들이 Y를 시작했다는 것은 바로 Y의 자주 자강의 의미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7년 고종을 내치고 한국군대를 해산했으며 행정권을 박탈하고 뒤이어 사법권과 경찰권마저 앗아갔다. 이러한 때에 시대적 위기의식을 느끼고 Y운동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은 곧 Y 참여자들의 국권수호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1914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한 Y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조선총독부의 노골적인 탄압 속에서도 일요강좌·복음전도회·환등회·외국인 초청강연 등의 사업을 통하여 회원들의 실력배양과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일본에 재일본 동경YMCA회관을 건립하기까지 했다. 재일본 동경 YMCA가 재일본동경유학생의 역량을 집결하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에 1919년 '2·8독립선언'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국내의 3.1운동은 ‘2.8독립선언’이 한 계기가 되고 국내의 원로급 YMCA 이상재 등이 朴熙道 등과 함께 연락망을 형성함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Y는 일제 강점 초기의 Y계의 대량체포라고 할 105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3.1운동에도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허울좋은 문화정치가 나타났다. 이를 하나의 기회로 활용한 전국Y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1919∼1925년에 선천·평양·대구·광주·원산·전주·신의주 YMCA를 조직했고, 학생Y도 1925년 말까지 18개가 되었으며, 해마다 하령회를 열고 활발한 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1921년부터 전국적인 소식을 서로 알리고 Y의 지향을 더욱 선명하게 공유하기 위해 기관지 《청년》을 발간하게 되었다. 당시 Y는 국내 민족운동의 한 흐름인 실력양성운동 내지는 무실역행운동의 한 부분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무렵 Y가 역점을 두고 시작한 것은 농촌 사업이었다. 1925년부터 농촌사업을 조직화하여 서울을 비롯한 19개 도시 등에 농민학교를 세우는 동시에 농민회·협동조합·야학 등을 세워 각종 농촌개발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는 1927년에 조직된 新幹會 회장에 이상재가 취임하면서 범국민적인 민족운동을 주도하기도 한 점과도 상통하는 것이지만, 또한 당시 사회주의권의 공격에 대한 기독교계의 응답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즉 1920년대에 수용된 사회주의는 당시 유행하던 한국 교회의 타계주의 신앙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 비판에 대응하여 기독교계에서 총회 대회 산하에 사회부를 신설하고 농촌부를 신설하고 사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Y는 이 때 가장 선도적으로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Y는 국제위원회의 농업전문가가 파송되어 한국측의 홍병선 계병호 최영균 이순기 이기태 등과 함께 이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 때 농촌사업은 전도사업을 포함하여 체육 성교육 식생활개선 가정치료법 등 보건교육과 종자개량 비료사용법 원예 양잠 과수재배 임업 농기구사용관리 등의 농사개량지도 및 농촌계몽과 협동조합운동 등을 벌였던 것이다. 또 농민고등학교를 설치, 농촌지도자 양성교육도 실시했다.
한편 이 때는 Y가 반봉건문화운동을 벌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종교운동을 비롯하여 반봉건사회개혁운동으로 신분타파운동을 전개했다. 1914년 봄 Y의 노동야학의 학생 376명 중 94명이 노비계급에서 온 소년들이었다. 이 때 Y는 또 청년 혹은 민중이라는 용어를 보급하는 것과 토론회 등을 통하여 직업귀천의 관념을 극복토록 하는 데에도 힘을 썼다. Y는 또 교육운동에도 관여하여 노동야학을 전개했고 법률강습소를 개설했으며 무산아동을 위한 야학과 유치원을 개설했고 함흥에서는 도서관을 개설하고 晝夜學도 개설했으며 선천에서는 무산아동을 위한 晝夜學을 경영했다. 또 Y는 경신학부 대학부를 Y안에 설치하여 뒷날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케 했으며 1922년에는 Y 지도자 중에서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도 참여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그 다음해 상해사변, 1937년에 중일전쟁, 1941년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Y운동에 대해 노골적으로 방해를 감행했다. 조선총독부가 농촌에 대해 자력갱생운동을 벌여 Y의 농촌사업을 방해하는 한편 일부 회원을 매수하여 내분을 일으키게 하고,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YMCA의 간부에게 이탈하도록 강요하였다. 그 결과 1938년에는 세계연맹에서 탈퇴토록 강요, 일본Y 산하에 예속시켰고 서울Y외의 지방YMCA 조직은 와해시켰다.
일제 하에서 Y 운동이 자주독립적 성격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보았지만 그래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점도 없지 않다. 1927년 경에 Y의 운동이 미온적이며 비혁명적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다. 또 Y의 문화운동이 당시 한국의 전통성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도 검토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8·15광복으로 서울·광주·대구 등에서 지방 Y가 연이어 문을 열었지만, 6·25전쟁으로 서울 YMCA회관은 전소되고 말았다. 부산피난 시기인 1951년에 개최된 3년 정기대회 때 3년대회를 2년대회로 변경하고, 1955년의 2년 대회에서 대한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대한기독청년회연맹(대한YMCA연맹)으로 개칭하였다. 1958년부터 회관재건운동이 구체화되어 국내 모금운동이 추진되면서 부산·대구·광주·서울 등 4개 YMCA가 신축 또는 재건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학적·기구적 각성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74년부터 농촌사업을 전개하였다.
1970년대 이래 YMCA의 가장 두드러진 부문은 민주시민운동이다. 1970년대 유신치하에서 Y의 시민교육과 시민운동은 당시 부당하게 피해당한 시민의 권익옹호와 전국 규모의 시민운동을 통해 청년 학생들의 의식을 깨워 한국 민주화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본격화된 민주화투쟁으로 각종 운동기구가 조직되고 확산됨에 따라 Y 운동은 종래의 선도적인 시민운동 역할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시민운동을 주도했다면 1980년대 이후는 시민운동의 한 축으로서만 기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Y가 갖고 있던 기독교적 이념 때문이기도 하지만 운동의 방략이나 조직화에는 문제가 없었는지 검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시민운동이 군사정권 시절의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1980년대 이르러 점차 통일운동으로 그 시야를 넓게 확대해 갔다. 인권 민주화운동이, 군사정권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국가안보에 대립하는 세력인 양 비판받게 되자, 그들의 정권안보 관념을 극복하는 대안적 이념이 필요하게 되었다. 거기서 군사정권식의 안보는 분단을 빌미로 한 위장되고 과장된 안보론임을 들춰내야만 했다. 당시 군사정권의 안보론의 토대는 분단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군사정권이 분단을 그들의 안보논리의 토대로 이용한다는 것을 인식한 기독교회계와 시민들은 분단을 해소하는 것이 곧 인권 민주화를 가로막는 거짓된 안보론을 뛰어넘는 길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거짓된 안보론의 근거가 되는 분단을 극복하려는 것이 곧 통일이라는 데에 착안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 기독교계가 선두가 되어 통일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이어서 그것이 1990년대에는 북한돕기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그 동안 민주시민운동 때까지는 그래도 선봉적인 역할을 감당해 오던 Y가 통일운동과 북한돕기운동에서는 그 특이한 조직력과 순발력을 보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것이 필자만의 관찰이기를 기대한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남북관계는 물론 남측의 대북관에서도 혼선과 갈등을 빚고 있다. 이 때 진정 필요한 것은 화해와 평화의 시민운동이라고 생각된다. Y가 한국의 미래를 향해 새로운 당면 과제를 수행하려면 먼저 화해와 평화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1970년대까지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한 흐름은 최근에 와서 복지운동으로 그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다. 이것은 Y가 과거 일제하에 이미 선도적인 역할을 한 바 있는 농촌계몽운동과 도시빈민구호운동과도 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복지의 문제도 최근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책을 세우는 만큼 시민운동으로서의 Y가 관여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주인이 되는 사회가 복지의 가장 중요한 핵심아이콘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만큼, Y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람중심의, 사람키우는 복지운동을 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할 것은 Y가 갖고 있는 국제적 성격과 에큐메니칼한 성격을 어떻게 살려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Y가 국제적 조직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은 다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또 국내의 여러 지회를 연합함으로 에큐메니컬한 성격을 찾아내어 활성화시켜야 한 단계에 와 있다. 아마도 Y는 한국 교회의 여러 교단이나 단체의 문화에서 다른 나라에 비교할 수 없는 이념적 연대성을 갖고 있다. 때문에 이를 살리는 국제적 성격과 에큐메니칼 운동은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Y는 한국 Y가 출발할 때에 가장 중시했던 아이덴티티를 재확인하고 그 아이덴티티 위에서 지금까지의 우리 스스로를 점검, 필요하다면 궤도수정을 해야 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Y의 출발 때에 Y가 가졌던 가장 중요한 아이덴티티는 무엇보다 기독교정신이었고 그것을 전하는 것이 Y의 사명이라고 헐버트 등 Y 창립자들은 강조했다. 그들의 기독교 신앙의 강조는 적어도 Y의 출발 때에 이 기구가 갖는 생명력이었다.
최근 각종 시민단체가 출현되는 상항에서 Y가 첫 출발 때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이념의 토대 위에서 그 사명을 재확인한다면 Y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그 전통 만큼이나 중요하고 값있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상황에서 사회운동만으로 존재가치가 발견되려 한다면 거기에서는 다른 NGO들과의 차별화를 기하기가 힘들 것이며, 1980년대 이후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상실한 기독교시민운동이 걸었던 그 길을 되풀이할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다. 기독교적 바탕 위에서 지금까지 Y가 시대마다 전개해 온 그 역할을 검토하면서 취사선택하고 선택과 집중을 기하게 된다면 Y는 21세기를 향해서도 그 존재의의를 떳떳 활발하게 밝히면서 제 사명을 능히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