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복박사 강연 속기록
마음이 좋다. 벅찬 느낌이다. 생명평화운동이 핵심적인 가치로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위치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 안병무박사의 갈릴리 예수의 경우, 로마압제 하에서의 희망을 주는 예수였다. 한국의 기독교청년운동은 이런 예수운동을 이어왔고, 새롭게 전개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YMCA 사업이 아니라 YMCA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읽은 영국 저자가 쓴 [녹색역사관]이란 책을 읽었다. 아쉬운 부분은 우주의 생성에서 현재까지의 흐름을 기록했는데, 결론은 적자생존론이었다. 이것은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있는 철학이다. 주일학교에서 하나님의 창조론을 가르칠 때 진화론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제가 볼 때 하나님은 기계학적, 물리학적인 창조자가 아니라 적자 생존론을 거부하는 창조자이다.
우리나라 헌법의 자유민주주의는 3.1운동의 정신이 깔려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는 미국에서 도입됐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철학은 적자생존론이다. 토마스 홉스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시장경제에서는 적당히 경쟁할 수 없다. 무한 경쟁이다. 적자 또는 강자가 생존한다는 논리가 시장경제를 지배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힘 있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 당연시된다. 결국 서양의 역사는 적자 생존론이라는 철학이 바탕이고 기본적인 틀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다.
생태계 문제를 볼 때도 적자생존론으로 보니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생명평화운동은, 분명히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평화는 독립된 것이 아닌 생명의 질서이다. 모든 생명체가 공생하고 상생하는 질서가 평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적자생존의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극복하는 것이 평화이다.
세계적으로 적자생존론적 가치가 급속히 확산되는 이유는 사회주의 붕괴, 미국의 일인체계 속에서 공동체성의 약화에 있다. 8가지 정도의 적자생존론이 진행되는데, 핵심적인 것은 과학기술체계이다. 우리는 과학기술을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과학기술을 상생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좋은 결과가 되지만, 불행히도 과학기술은 과학기술체제화 되어 있다. 이는 시장경제 체제, 군사기술체제 등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적자생존의 논리를 강화시키고, 평화질서를 파괴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예수운동을 평화와 생명의 운동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는 메시아의 생명정치다. 성서적으로 이야기 하면 창조의 질서는 생명의 정원, 하나님의 역사는 생명의 정원이다. 생명의 정원은 상생의 질서다. 서로 서로 보살피고 가꾼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생명의 질서를 통해서 모든 생명체가 함께 살 수 있는 신천신지, 모든 생명체가 함께 생명을 풍만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의 왕국이고, 메시아의 생명질서이다.
아시아 신학자들에게 제안하는 것이 있다. 첫째는 예수는 아시아인이다. 중동은 미국이 붙여준 이름이다.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터키인은 서아시아인이라고 한다. 성경의 언어는 아시아 언어이다. 듀셀이라는 남미의 철학자의 경우 ‘히랍어도 아시아의 언어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생명의 지혜를 담는 그릇이다. 기독교가 로마종교로 전환됐을 때, 서양종교가 되면서 하나는 제국에 종속하는 종교가 됐다. 또 하나는 근대로 오면서 아시아적인 문화나 언어를 무시하고 서양의 과학적 언어로 해석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수는 아시아의 언어로 아시아의 지혜의 그릇으로 담아서 선포했다. 이는 성경을 읽을 때 지혜의 책으로 봐야 한다. 모든 생명을 함께 살리는 지혜의 책으로 해석하고 읽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책의 정체성은 아시아의 책으로, 생명의 책으로 생명의 정체성을 살리는 책으로 이해야고 읽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한 서양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서양의 교리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 예수는 어떻고, 성령은 어떻다 등등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살리는 운동으로 성경을 읽었다. 예로 예수는 민족주의자, 출애굽에 대한 해석 등이 있었다. 민족을 살리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었다. 주기철박사의 경우, 로마서 8장을 독립운동으로 해석했다. 이제는 성경을 읽을 때 생명의 책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정원을 창조하는 분, 예수는 죽어있는 생명을 살리고, 새로운 생명, 신천신지를 새롭게 이룬 분, 성령은 생명의 기운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새롭게 생명신학의 교리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의 지혜의 책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시아의 신학자, 한국의 젊은 신학도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요즘 한국교회 안에서 타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배타적으로 이야기한다. 선교사들이 나가면 배타적인 관계를 설정한다. 그런 교리를 받았기 때문이겠지만, 심각하다. 하지만 교회는 그렇게 가르쳤지만, 우리의 체험은 다르다. 가정이나 이웃이나 주변에 불교적, 유교적, 도교적 문화가 잠겨져있다. ‘내적인 대화’다. 절에 가면 지적으로는 거부하는데, 내적으로는 편안하다. 이것이 내적인 대화다. 성경책을 보면 불교, 유교, 도교 등에서 빌려온 단어가 많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경 안에 스며들어서 성경 안에서 대화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3.1운동, 70년대 운동시절 때 모든 종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했다. 같은 공감대로 주장했다. 이 근본을 보니, 약간씩 교리가 다르지만 만나는 부분이 있다. 평화, 생명 이런 논제에서 만났다. 나는 이것을 수렴통합과정이라는 이론적인 틀로 정리를 하고 있다. 성경도, 교회사의 신학 발전도, 기독교 선교운동도 세계적 차원에서 이런 평화, 생명을 수렴하지 않는 기독교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수렴통합을 통해서 오히려 발전한다.
고은선생과 만나서 세미나를 했다. 불교에서는 민중불교란 말이 없다고 한다. 중생이다. 한반도 안에서 평화나 생명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종교적, 정치적 차원에서 수렴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 민족은 미국이 생각하는 생명평화와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안에서의 생명질서는 일본인들이 꿈꾸는 평화가 될 수 없다. 중국 동북공정을 볼 때 중국 중심의 평화관이 있다. 태평이다. 러시아의 팍스 러시아 등이 있지만 우리의 평화와 같을 수 없다. 역사적 수난을 겪어왔던 우리 민족이 꿈꾸는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와 아주 가깝게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에서 평화운동, 국가적인 차원에서 평화운동을 할 때 한반도에서 평화운동은 질적으로 특이하고, 차원이 깊고, 높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한반도의 평화이지만, 이것은 한국사회 세계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북한이 남한과 함께 평화를 이야기한다면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가 말하는 평화가 아닐 것이다.
첫째는 철저하게 민주화해야 한다. 정부가 어떻든지 간에 민주화가 되면 주체적으로 우리의 평화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자주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남북이 더 협동하게 되면 평화의 주장이나 내용이 훨씬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운동은 남북문제와 분리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
최근에 중동의 상황을 깊게 보고 있다. 현재 폭력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왜 우리에게 중동이 중요할까? 상징적으로 에큐메니칼운동 차원이다. 지정학적인 차원에서의 관심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평화가 무엇인지, 기독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고 싶다. 둘째는 이란에 대해 서구가 이야기 하는 패권은 언제든지 한반도에서 전개될 수 있다고 본다. 모형이 똑같다. 요즘 6자회담이 긍정적으로 되고 있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고 있지만, 언제든지 어그러질 수 있다. 예로 미국이 중국을 적대국가로 규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본 기독교 지식인, 중국, 러시아 기독인과 공동연대도 필요하다. 한국YMCA가 생명평화운동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위치에 있고, 특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글에 세 가지를 제안했다. 지난해에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있었다. 총회로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는 미국의 정체성에 대해 별로 논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미국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으면 생명, 평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 미국 장로교도도 아시아 신학자들이 미국 기독교의 정체성에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실태를 알기 위해 아시아 신학자들을 초빙한다.
강원도 화천군 평화의 종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화천에서 작년에 세계 생명평화를 위한 시민헌장 초안을 작성하고 있다. 올 10월에 완성될 예정이다. 세계 NGO들에게 배포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UN헌장, 인권헌장은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성 때문에 불안전하다. 시민과 시민간이어야 한다.
신학적인 나쁜 버릇이 있다. 내면의 평화와 외적인 평화를 분리하는 태도이다. 마음의 평화와 가정의 평화, 세계평화는 분리되지 않는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아주 유용하다. 신앙적으로 내면적인 평화를 심화하면서, 지역사회의 평화, 세계평화를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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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도 한국YMCA 생명평화운동 제1차 정책협의회(2007년 5월 11일(금) 오후 3시 - 5월 12일(토) 12시, 유성 유스호스텔) “삶과 지역에서 말하는 생명평화운동-나로부터 시작하는 운동, 공명하는 변화, 또 다른 삶의 고백” 보고서 중에서.
센터 출판물 "생명평화구상"에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