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은 생명운동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1)



김용복박사는 우리의 시민운동이 생명운동의 기치 하에 집결하여 생명학을 축으로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생명운동 생명학이 모든 사회운동의 기초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의 사회운동에서 생명운동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고있다면 이러한 제안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기본적으로 동감이다.

그러나 김용복박사의 논문에는 우리가 운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적 실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운동의 주체성에 관해서 거의 언급이 없다. 사회운동은 인식운동이 아니며, 구체적인 사회구조의 변동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생명학이라는 인식의 탐구로 저절로 운동이 되는 것이 아니다.


1. 변화된 사회와 인간


1.1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를 피크로 한국의 시민운동은 그 영향력을 급속하게 상실해 가고 있다. 시민운동에 회원들이 크게 증가하지 않고, 사람들은 시민단체의 밖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탄핵반대운동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이것은 운동단체가 조직, 동원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사회운동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1.2 생활의 사회화와 의식의 개인화

사람들은 시장과 권력이 제공하는 물적 체계---혹은 의사공공성--에 과도하게 의존함으로써 사회적 협력의 필요성이 점차 줄어들고, 개인의식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1.3 현대를 살아가는 유목민

도시의 사람들은 다양한 조직과 활동에 참여한다. 그래서 사회구조에 따른 귀속---계급, 민족, 종교, 직장, 출신학교--에 의해 사람들의 행위를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은 유동적이고, 현재에 살아가는 유목민적(Melucci)인 생활에 안주하고 있다. 그래서 유동적 근대성(liquid modernity.... Bauman)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유목민들은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이다.

 

1.4 “아아 대-한민국‘

유목민이라고 해서 모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월드컵 때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열기로 가득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에 ‘오 필승..’라는 슬로건에 모두 흥분한 것이다. 약간 내용은 다르지만, 2002년도 가을의 미선이 효선이 촛불시위도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모았다. 12월14일의 촛불시위와 반미데모는 국제적으로도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대통령선거에 있어서의 스포터즈l 들의 활동 등 조직운동이 전반적으로 쇠퇴하고있는 가운데 대중운동은 큰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2004년 3월의 탄핵반대운동도 신속하게 대중적인 촛불시위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조직되지 않는 ‘유목민’들이 현대의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대-한민국’ 연호는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월드컵의 붉은 악마와 촛불시위의 참가자, 그리고 2004년의 탄핵반대운동 참가자들은 동일한 인물이 아닐 수 있다. 2002년 4월 동계올림픽 때 미국의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숏트렉 남자 1500미터의 경주 때의 불공정심판은 월드컵 <붉은 악마>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효선이 미선이의 촛불시위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이 불공정심판은 최근의 반미운동의 정서적 기반이었다. 사실 불공정심판이 반미운동을 가져왔다기 보다는 <잠재성>(latency)로서 간직해 왔던 미국에 대한 생각이 이것을 계기로 분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반미운동이 대세를 이루어 가고 있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의 연호는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을 우리들의 자존심의 회복으로 칭찬하고, 굴욕과 변방성을 극복한 쾌거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외치던 다중은 왜 우리의 이라크 파병에 대해 대체로 침묵하고 있는가?

이 ‘대-한민국’ 연호 세력들의 철학적 역사적 한계가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의 내부에 자리잡고 우리의 의식을 성형해 온 ‘거꾸로된 민족주의’의 극복이 필요하다.

  

2. 생명운동은 사회운동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


새만금간척반대운동은 환경운동에 새로운 지평을 열였다. 환경보전을 넘어서서 생태계의 평화, 그리고 생명담론이 운동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종교인들의 참여로 새만금문제는 생면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것의 집약적 표현이 바로 삼보일배이었다. 새만금간척반대와 이라크전반대를 내건 2003년의 삼보일배는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에 큰 충격이었다. 2001년 정부가 새만금 간척사업의 재개를 결정한 다음, 그 사업의 부당성이 누가 보아도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돌연, 문규현신부님, 수경 스님, 김경일 교무님, 이희운 목사님은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305킬로미터의 삼보일배를 강행하였다. 마침 미국에 의한 이라크에 대한 명분없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우리 정부도 이에 가담하여 파병을 결정하였다. 삼보일배는 새만금문제와 이라크전쟁 해결을 위한 생명과 평화를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거기 머물러 있지 않았다.

 

2.1 자기 성찰성


삼보일배는  우리의 사회운동의 對他的경향을 성찰적 자세로 바꿀 것을 촉구하였다. 생명운동이 사회운동에 기여할수 있는 부분이라면 바로 이러한 성찰성이 아닌가? 

한국의 환경운동에 평화와 생명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이끌어 들인 것도 새만금반대운동에 대한 종교인들의 참가와 삼보일배이었다. 운동전략 면에 있어서도, 삼보일배는 보통사람들이 해내기에는 초강수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환경운동단체들은 그 보다 더 효과적이고 충격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동안 자주 채택된 단식투쟁, 삭발투쟁도 삼보일배 이후에는 크게 퇴색되었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현대의 유목민’을 상대로 무엇으로 이들을 감동시키고, 사회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1인시위’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일인시위는 집시법의 틈을 이용한 시위의 방법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다중의 동원이 어려워서 일인시위로 전술을 바꾼 측면이 없지 않다.


2.2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연민(同體大悲)


삼보일배의 운동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생명의 고통을 ‘보고, 듣는’ 감수성이다. 생명운동이 진정 통전성을 주장하려고 한다면, 뭇생명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감수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라크 민중의 고통이 진정 우리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체험은 어떻게 가능한가?


2.3 궁극의 시간과 사회적 시간


삼보일배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한 것 뿐만 아니라, ‘궁극의 시간’에서 ‘사회의 시간’을 비판하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성과 감성의 일차원성을 넘어서서 생명운동은 현재의 시간을 상대화하고 이를 비판하는 안목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김욕복박사가 주장하는 영성과 종교가 이러한 비판적 기능을 가질 때, 현대의 예언자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회운동은 어디로 가야하나?


한국의 시민운동은 삼보일배가 보여준 생명운동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생명활동’에 몰두하는 사이에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이 이러한 운동과 관계없이 우리들의 지배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치경제 구조를 바꾸는 조직운동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운동의 실천이 무엇이어야 하며, 사회운동은 어떤 좌표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금후의 토론과제가 될 것이다.


1) 이시재,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출처: 2004년 11월 12일-14일, 세계생명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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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 출판물 "생명평화운동 구상"에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