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끊어진 철교 아래, 숨 죽인 절규
최 선 욱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전주Y 100인회
북녘땅을 바라보며 거슬러 온 길, 백두대간의 총길이(1625km)보다 더 긴 여정, 대련에서 장춘까지 1800km! 압록에서 두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강폭이 좁은 곳이나 모래톱이 있는 곳에선 웬만한 수영 실력으로도 금방 가닿을 거리에 우리의 형제자매가 살고 있건만, 멍하니 바라만 보며 속울음을 참아야했던 7일간의 힘겨운 역사 기행.
이번 여행은 단순히 콧바람 쐬러 나다니던 여느 여행과 달리 주제가 있는 여행이었다. 우리 고대사의 유적지나 근현대사의 아픔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을 밟아보는 그야말로 교실 밖 역사 공부 기간이었다. ‘한, 중 접경지역 백두산 평화기행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부터 내겐 예사롭지 않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 뤼순감옥과 관동법원 >
우리가 내린 다롄 (大連) 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뤼순 감옥이 있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원혼이 잠겨있는 곳, 감방 입구엔 얼룩진 수의(囚衣)들이 매달려 있고 전시관에는 각종 고문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의사가 재판받았던 법정과 투옥된 방,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둔 곳까지 보고 나오려니 이런 애국지사들의 피흘림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나와 우리, 그리고 대한민국이 제대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절로 숙연해졌다.
이토 통감의 총살 목적은 오직 한국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의거였다고 일본인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던 약관 30세의 식민지 국가 청년! 안 의사에게 사형 언도가 내려진 후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안 의사의 굳센 심지의 뿌리를 짐작하고도 남겠다.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안 의사의 공판일에는 여러 나라의 신문기자를 비롯하여 방청객이 법원 마당까지 꽉 들어찼다고 한다. 법정 뒷면 벽에 붙은 영자신문 기사 (영국의 기자, 찰스 모리머의 The Graphic에 실린 글)가 그 때의 재판정 분위기가 어떠했으며 안 의사가 얼마나 보무당당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세계적인 재판에서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법정을 떠났다. 그의 진술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중국 청년들의 가슴팍에 항일운동의 불을 지폈으며 1911년 신해혁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안중근의사 기념실 벽면에는 중국의 수상이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사진이 있고 그 옆에 수상이 했던 말이 한문, 한글, 영어로 씌어 있었다.
“중조(中朝)인민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동북공정의 민낯, 그 앞에서 >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환인(졸본성)과 두 번째 수도인 집안(국내성)을 거치면서 광개토대왕 왕릉과 비석, 장수왕릉으로 알려진 장군총, 5호분 5호묘 등을 둘러보며 중국이 우리의 유물. 유적을 비교적 잘 보존, 관리해 주고 있구나 싶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유적지 안내판에 써 있는 AAAA가 중국 유적지 중요도 표시라는 것을 알고 나선 싹 가셔버렸다. 나의 무지와 순진함이라니...... 심지어 고구려 유적들을 중국의 유적으로서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함, 비애감이 밀려왔다. 이것이 바로 동북공정(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잭트)의 일환이란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났다. 심지어 윤동주 생가를 둘러보러 갔는데 입구 표지석에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 라고 새겨 놓은 걸 보니 어이가 없었다. 이 또한 동북공정의 연장선상에서 빚어진 역사 왜곡의 한 단면이 아니겠는가.
이른 새벽에 숙소 근처를 산책하다보니 어느덧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강물에 손을 담근 채 강 건너 온통 벌거벗은 북한 산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땔감은 물론 식량마저 부족해 산을 일구어 살아야 하는 북한 주민들의 누추한 집들이 보이는가 하면,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중국 땅에는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도로 확장 공사를 하느라 곳곳이 파헤쳐 있고 새벽부터 공사판에서 들리는 기계 소리들과 일꾼들의 바쁜 손길, 중국이 동북쪽 변경지역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표징이다.
< 끊어진 철교 아래, 숨 죽인 절규 >
압록(鴨綠)은 물빛이 오리머리 빛과 같이 푸른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중국과 북한을 잇기 위해 만들어진 첫 번째 다리, 압록강 위로 단동과 신의주가 연결된 압록대교. 애초에 일본과 중국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수탈할 목적으로 합자해서 만들었다는 다리. 6.25전쟁 때 미국의 폭격으로 파괴된 철교 모습을 그대로 두어 지금은 중국의 관광 상품이 되어버렸다. 입장료를 내고 올라서자마자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출정한 날짜를 새긴 기념물과 출정 군인상 조각물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앞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포탄과 뒤틀리고 휘어진 철교 끝자락 고철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우리 민족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물 앞이라서 왠지 사진을 찍더라도 이빨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끊어진 철교 아래, 강물은 여전히 푸르른데, 우리 민족의 애환을 알면서도 물소리는 요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날의 포성에 놀라 강물이 숨을 죽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헤어진 가족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분단의 아픔을 속히 치유해 달라고 물방울 방울들마다 숨죽인 채 절규하고 있건만 우리 귀가 무뎌서 세미한 소리를 못 듣고 있는지, 아니면 애써 안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 우리 서로 손만 흔들었지만 >
북녘 들판엔 아직도 논밭에서 소를 이용해서 농사짓는 모습이 보였다. 기계농이 아닌 걸 보며, 1960년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앞서 있었다는데 어쩌다 최빈국이 되어 여기까지 이르렀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국경 접경지역에서 북한 주민을 상대로 말을 걸거나 사진을 찍지 말라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철조망 너머 지척의 논밭에서 공동으로 일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길가에 놓인 스피커에선 군가 비슷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우리쪽에서 먼저 손을 흔들어 주는데도 처음엔 반응을 안 보이더니 계속해서 손흔들기로 반가움을 표시하자 저쪽에서도 몇몇이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우리는 서로 손만 흔들었지만 한마음이었으리라. 평화 통일을 고대하는 그 간절함을 손끝으로 전하고 또 전달받았다.
< 6월의 칼바람 눈보라 >
하늘 땅, 온 천지가 새하얗게 변해 백두산 천지(天池)의 웅대함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여름철에 칼바람 눈보라 맞기는 난생 처음 일이라 경이로웠다. 우리의 영산(靈山) 백두산 정상까지 1442개의 계단을 밟아야 하는 서파 코스 등정은 다리가 아플 법도 한데 세찬 눈보라와 맞장 뜨기가 버거워 다리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가지고 간 옷이란 옷을 있는 대로 다 껴입고 비옷까지 입었지만 칼바람을 당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아니, 이 무슨 조화속인가! 차를 타고 하산하는데 하늘을 보니 햇볕이 쨍쨍하였다. 백두산 천지의 신비로움을 지켜 주고자 하는 조물주의 배려일까?
다롄에서 장춘까지 긴 여정을 마치며, 몸은 고단하지만 정신이 각성되고 영혼이 풍요로워진 여행이었다는 뿌듯함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요즘은 수학여행도 해외로 가는 추세인데,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갈 청소년, 청년들이 앞장서서 우리땅의 소중함을 알게 하는 이런 역사 기행을 해 보면 어떨까? 바라건대 우리의 젊은이들이 조상의 얼이 서린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밟아보고 견문을 넓혀서 올바른 역사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