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노정선 본회 평화통일위원장의 추모의 글이다. 고 강영섭 목사는 지난 11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의 만남(남측과 만난 마지막 인사가 되었음) 에서 북한의 식량난을 지원해달라는 간곡한 호소를 하였다고 한다.
내가 만난 강영섭
노정선, 연세대 명예교수, 예장통합목사, NCCK 평화캠페인 위원장, 통일 컨설턴트
1990년 일본 동경에서, 남한의 목사님 교인들 약 50 여명과 일본 기독교인들, 그리고, 국제대표들 약 150명이 동경 신주쿠에 한인 YMCA에서 모여 평화와 화해와 통일을 논하는 모임에 북측 대표 5명이 왔다. 그 때 처음 강영섭목사님을 아주 먼 발치에서 보았다. 그 후 필자는, 그의 아버지 강량욱목사를 1946년 1월 암살하려고 그의 침실에 폭탄을 터뜨리는 사건이 나고 그 큰 형은 그 침실에서 자다가 한명의 다른 목사님과 폭사했다. 3월에 다시 강량욱목사를 암살하려고 침실에 폭탄을 넣었으나 그는 살아남았고 강영섭목사도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강영섭목사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 선생이 김인실박사님이었고, 당시 성화신학교 학생이었다. 김인실박사는 1970년 필자가 하바드대학에 공부를 하러갔을 때, 교회반주자였다. 그 후 강영섭목사와는 수많은 국제회의,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짐바브웨), 세계개혁교회연맹총회(드부레첸) 등등에서 만났고, 또 평양에서 여러 차례 만났는데 봉수교회 온실문제, 사과밭농장 등등 다양한 문제로 만났다.
필자는 그의 가족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하고 있었고, 그이 사진을 필자가 저술한 1988년도 “이야기 신학”, 영문저서, 스토리 갓(Story God,한울,) 등등에 실었다. 처음에는 강영섭목사와 오경우서기장은 사진을 책에 내지 말아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1988년 당시 그는 아직도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남한과 국제회의 등에 참석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토지개혁을 반대한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이 그를 이미 여러 차례 폭탄공격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가장 가까운 친척 가운데 한사람이었으니, 가족처럼 지내면서, 북한의 교회를 인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일부에서는 그를 가짜 기독교인, 가짜 교회라고 하기도 한다. 그의 신학은 토지개혁을 성서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것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열정적으로 통일을 추구하였으나, 그가 사망하기 전에 통일을 보지는 못했다. 아마 그의 가장 큰 한이었을 것이다.
동경의 한 모임에서 필자는 그를 독대를 했었다. 1996년 북의 기근이 수백만을 죽일 때였다. 필자는 그날 밤 한잠도 안자고 어떻게 기아사망을 막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림들을 그려서 강영섭목사에게 설명을 했다. 이제 갑자기 식량들을 대량으로 보낼 수는 없는 상황이니 앞으로는 북한에 있는 모든 곤충들, 벌레들, 지렁이들 등을 먹어야 한다. 높은 영양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니 독성이 있는 것들은 실험실에서 검사를 하고서, 식욕을 일으키지 않는 것들을 모양을 바꾸어서, 빵이나 국수나 떡에 섞어서 먹으면 된다고 설명했었다. 세계 식량학회가 이미 주장해온 이론이었다. 그는 필자에게 벌컥 소리를 지렀다, “벌레를 어떻게 먹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자와 마음과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면들이 많이 있었다.
그의 부인이 4년 전 사망했을 때, 필자는 백승인장로님과 위로 방문을 평양으로 했었다. 노무현 10.4 성명 이후 한 20일 지난 후였다. 아마 마지막 그와 만났던 것은 남한교회대표들과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을 때였을 것이다.
그가 살아있다고 하면, 남과 북의 대화, 화해, 통일에는 크게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