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YMCA운동의 선봉인
삼성(三醒) 김정식(金貞植)
삼성(三醒) 김정식(金貞植) 선생은 1862년 8월 6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정계에 투신했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독립협회가 한창 기세를 올릴 무렵에 김정식씨는 주요관직에 있었다. 즉 오늘날 내무부 치안국장에 해당하는 경무관 자리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독립협회운동에 깊은 공감을 느끼면서 가끔 그 집회에 참석했던 것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독립협회 회원들의 신변을 보호해주었다. 그러다가 그는 정부의 미움을 사서 1902년 다른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되었다. 이처럼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그는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1904년 석방된 뒤에는 연동장로교회에 입교하였고, 동시에 다른 동지들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 즉 오늘의 서울YMCA에 들어와 초대 한인총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던가? 이것을 알기 위하여 당시 연동교회의 담임목사이던 게일(J. S. Gale)의 말을 들어보면,
「나는 1899년 그 당시 경무관이었던 김정식씨에게 한문 성경을 주면서 전도를 했다. 그러나 며칠 뒤 김정식씨는 그 성경을 돌려보냈기 때문에 전도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그 뒤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나에게 편지하기를 “나는 당신이 몇해 전에 내게 성경책을 보내주면서 전도하던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참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서 석방되어 나오자 곧 게일 목사를 찾아가 “감옥 안에서 나는 성경을 네 번이나 독파했지만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느 날 밤 한문으로 번역된 무디(Moody)의 설교집을 읽다가 갑자기 내마음 속에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 가슴은 노래로 가득 찼고 내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내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유명한 YMCA 지도자 무디(Moody)의 감화로 예수를 믿게되었다. 그리고 연동교회의 교인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목사나 장로가 되기보다는 일평생 평신도로서 YMCA 실무자가 됐다. 이는 마치 무디 씨가 목사도 장로도 아니면서 일평생 평신도로서 YMCA 지도자가 된 것과 같이 그는 1904년부터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초대한인총무(외국인 총무는 P. L. Gillett)가 되었다가, 1906년에는 일본 도쿄에 파송되어 재일 한국인 YMCA를 창설했고, 학생YMCA 창설자의 한사람이 되었고, 그 뒤 귀국하여서는 1914년 YMCA 전국 연합회 조직에 큰 역할을 했고 193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현 서울YMCA)의 자원지도자로서 봉사했던 것이다.
그의 한국YMCA에 대한 공헌은 너무나 크다. 이것을 몇 가지로 나누어 열거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는 이미 말한바와 같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총무가 되었다.
둘째로, 그는 1906년 일본 도쿄에 파송되어 재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창설했다. 회원들은 거의 전부가 유학생들이었다. 본래부터 그는 유학생들의 지도를 위하여 파송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정부의 유학생 감독관 신해영씨 등의 협조를 얻어 곧 한국인YMCA를 창설하고 초대총무가 됐다. 이것이 즉 지금의 재일본 한국YMCA이다.
셋째로, 그는 재일본 한국인교회를 창설했다. 그는 구한국 정부의 공사관 건물과 일본YMCA를 번갈아 빌려쓰면서 주일날이면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목사가 아닌 만큼 1909년부터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 한석진씨를 소개하여 정신교회를 조직했다. 조만식씨도 그때 초대교인이었다.
넷째로, 그는 일본 무교회주의 신앙을 제일먼저 소개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찌무라 등 무교회주의자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 신앙에 공감하게 되었다. 한편 우찌무라 등 무교회지도자들은 김정식씨를 무척 존경하면서 신앙토론을 많이 했다. 보통 한국 무교회주의라 하면 김교신, 최태용 등을 먼저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은 김정식씨가 초대 무교회주의 지도자이다. 그 뒤 한석진, 이정로, 김우현 등 여러 목사들이 무교회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고, 그 다음에 김교신, 최태용 등으로 내려왔다.
다섯째로, 그는 학생YMCA 운동의 선봉에 섰다.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창설한 재일본 도쿄YMCA는 한국유학생들을 위한 YMCA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학생YMCA라고도 불렸다. 그보다 그는 1907년에 윤치호, 민준호 등 한국YMCA 대표들과 함께 세계대회에 참석했다. 이것이 한국학생 YMCA가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참석한 공식적인 실례이다.
여섯째로, 그는 시종일관 민족독립을 위하여 투쟁했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그는 독립협회운동을 지원하고, 또한 그 운동에 적극 참가하다가 감옥살이를 했었다. 1904년 풀려 나와서도 그의 독립을 위한 투쟁정신은 조금도 식을 줄 몰랐다.
1912년 105인 사건 때만 하더라도 그가 얼마나 결사적으로 항쟁을 했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즉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었지만, 그는 일본에 있으면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국내보다 조금은 자유로웠고 형사들이 너무 심하게 취조하지 않는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반일운동을 맹렬히 하였다. 강연, 좌담회, 토론회를 소집하여 반일운동을 맹렬히 했다. 그러다가 1912년 국내에서 105인 사건이 터지게 되었는데, 이때에 김정식 총무는 최상호 등 간사들과 함께 비밀문서를 인쇄하여 뿌리고 총독부의 탄압상을 마구 폭로했다. 이 때문에 그는 결국 총무직에서 쫓겨나 귀국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택부
-1977.10.1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