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사랑·넉넉한 표정…‘영원한 YMCA맨’
오리 전택부 서울YMCA명예총무 별세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영원한 YMCA맨’ 오리 전택부 서울YMCA명예총무가 21일 새벽 노환으로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별세했다. 93세.

1915년 함남 문천 출생으로 함흥 영생중과 일본 도쿄 일본신학교를 나온 고인은 일제강점기부터 YMCA를 기반으로 종교·사회운동을 펼쳤고, 이후 ‘한글사랑’운동에 혼신을 바쳤으며, 신문과 TV 등 언론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낙천적인 삶의 지혜를 들려주던 우리 사회의 ‘어른’이었다.

고인이 평생을 바친 YMCA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 YMCA전신)로 출발해 월남 이상재 등 독립협회 멤버들과 개화파 지도자들이 합세하면서 일제강점기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국제적 종교단체인 YMCA에 손을 대지 못하다 결국 1938년 강제해산시켰다.

광복 후 고인은 20여년간 공백상태에 있던 한국 YMCA를 재건시켰다. 그는 한국 YMCA를 대표적인 시민운동단체로 자리매김시키면서 청소년 교육, 시민의식 개발 등에 힘썼으며 군사 독재시절 사회운동의 근거지로 역할을 하게 했다.

그는 1964년 서울YMCA 총무를 맡았고 1975년부터 명예총무로 있으면서 한 번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1978년에는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1903~1945)’를 써서 YMCA 역사를 처음 정리했다.

1975년부터 고인은 한글사랑 운동에 매진했다. 고인은 1991년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되자 이후 ‘복원운동’을 펼쳐 2006년 한글날이 국경일로 재제정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92년 청와대를 찾아가 한글날의 국경일 제정을 호소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이후 지팡이에 의지하며 생활했다. 한글학회(회장 김승곤)는 지난 8월31일 창립 100돌을 맞아 전 서울YMCA명예총무에게 공로상을 수여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성경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고인은 신앙인으로서도 “믿는 듯 믿지 않는 듯 하라”고 후진들에게 당부하는 등 드러나지 않는 봉사활동과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1980년대에는 인기 TV프로그램 ‘사랑방중계’에 고정출연해 넉넉한 표정과 구수한 목소리로 국민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국재(서울여대 교수), 관재(애버트로직스 사장) 등 2남3녀. 빈소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 발인 23일 오전 8시. 장지 우성공원. 02-3010-2230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08-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