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15일 월요일   한국YWCA연합회&YMCA전국연맹


        평화를 창조하는 여성들

       (사 2:4; 사 11:6-9)


       배현주(부산장신대학교)

배현주교수님 설교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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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반갑습니다. 1904년부터 세계 YWCA와 YMCA가 함께 공동예배를 드려왔다는 말씀을 들었는데요,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경험한 20세기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두 단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공동예배를 지켜온 것도 그렇고 이 전통이 21세기에 계속되는 것도 감동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의미깊은 합동 예배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된 것 개인적으로 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I.  여성과 평화


 올해 합동 기도 주간의 주제가 “여성이 만드는 안전한 세상”인데요, 안전한 세상은 전쟁과 폭력과 억압이 극복된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와 동의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유일한 교훈은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20세기에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른 세계는 냉전체제의 해체를 계기로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기를 기대했지만, 새로운 천년의 벽두는 제국주의적 패권주의가 지속시키는 전쟁과 무차별 민간인 테러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보유하고 있는 핵 폭발문은 약 2만 메가톤인데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약 160만 배라고 합니다. 지구 위에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 남북관계는 2010년 3월 26일 고난주간 직전 금요일 천안함 46명이 실종된 비극적 사건 이후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전쟁의 망령이 지구촌을 떠나지 않고 있는 21세기에, 지구 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의 전면적 위기는 각종 환경 재앙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성장 일변도를 내세우면서 세계화된 시장을 통하여 인류의 번영을 약속하는 이 시대에, 경제적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매일 이만사천명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는 통계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빈부격차의 심화로 인해 세계 인구 1%의 연간 수입이 인류의 57%의 가난한 사람들의 전체 수입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특히 약소국의 여성들은 강대국의 정치, 군사, 환경, 경제 등 각 분야의 의사결정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 채, 사건이 진행된 후 희생자가 되고는 합니다. 예를 들자면, 태평양 섬에 거주하는 여성들은 서구 국가들의 핵실험으로 인해서 끔찍한 병에 걸리고 기형아를 낳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서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겪고 있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이라크의 가난한 어머니들은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확신에서 전쟁을 시작했던 부시 정부로 인해서 젖을 빠는 갓난 아이들과 함께 반공호에서 무참히 죽어가야 했습니다. 중동 팔레스틴의 어머니들은, 그리고 남미 콜롬비아의 어머니들은 지금도 자녀들이 총격에 쓰러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한국 여성들은 노골적인 전쟁의 폭력을 겪고 있지는 않다고 해도, 분단으로 인한 비극적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2008년 제6회 YWCA의 한국여성지도자상을 받은 이소연씨가 대한민국 최초로 우주여행에 참가했을 때 우리 모두 감격과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금강산 관광특구에서 50대 한국여성 박왕자씨가 피격을 당했을 때 큰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통과 통신에서 하나가 되어버린 지구촌을 살아가는 세계화 시대에, 한국 여성이 우주까지 날아갈 수 있는 자유의 시대에, 같은 한반도에 있는 비무장 지대 바로 건너편 땅에서 관광을 하다가 한국 여성이 총맞아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한반도의 평화통일 없이는 한국 여성의 안전이 궁극적으로 보장될 수 없음을 잘 들어내주고 있습니다.


한국 여성은 정치, 고용 시장, 교육, 종교 등 공적 영역에서 여전히 구조적 차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WEF)에서 발표하는 세계 ‘성 격차’ 지수에서 한국은 최근에도 고용, 교육, 보건, 정치 등 4개 핵심 부문 모두 저조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국 여성의 교육 수준과 능력은 개발되어 왔지만 그에 부합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 대표성과 권한은 확보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개발지수나 성별개발지수는 높은 순위인데 반하여 성별권한척도나 남녀격차지수는 하위권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저소득층에 속한 여성들의 경우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의장국이 되어서 치룬 G20 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언론이 축하하는 지난 주 12일, 포항의 한 요양원에서는 불이 났습니다. 이 불로 1층에 계시던 11명 할머니 중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숨졌다는 기사가 났는데요, 한 방에서 침대에 4명, 바닥에 3명이 잠을 자고 있었고, 말 못하는 할머니도 2명이 있었다는 당시 상황 설명을 보면, 노인 복지와 장애인 복지와도 관련이 있겠습니다만, 우리 사회 저소득 계층 여성들의 생활 안전망의 현주소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결혼과 고용 등으로 아시아 이주여성들이 증가하고 있는데요, 이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성폭행 등으로 인한 고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 사회가 여성들을 위한 안전과 평화의 버팀목이 부실하다는 점을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도 폭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II.  성서의 비전


 여성들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에서 평화와 정의가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계를 창조해나갈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평화와 안전을 갈망하는 기독여성들에게 그리고 신앙인들에게 성서는 위대한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샬롬”이 단순히 전쟁이 없는 소극적인 평화만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총체적인 정의로운 관계 그리고 풍성한 공동체의 생명을 의미하는 적극적 평화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전쟁이 없다고 해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그러지고, 그 공동체와 사회에 불의와 억압이 팽배하다면 성서적 의미에서 평화롭다고 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샬롬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 곧 정의로운 평화를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변 강대국의 시달림 속에 살아가는 유다의 선지자 이사야는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인류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아름다운 비전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약육강식의 시대가 끝나고 모든 생명체가 평화롭고 안전한 삶을 누리는 비전을 그리고 있습니다. 인류는 수 천년전 이사야가 꿈꾼 이 비전을 잃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뉴욕의 유엔 본부 앞에서 “이사야의 벽”이라고 불리는 담장이 있는데요, 이 벽에는 이사야서 2장 4절의 말씀, 즉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는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이 새겨져 있습니다. 과학과 물질문명은 발전했지만 역설적으로 전지구적 평화가 뒷걸음치게 되는 현실 속에서 이 성서적 비전을 잃어버려서는 안되겠다는 깨어있는 사람들의 다짐을 보여주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꿈꾼 정의로운 평화의 비전은 신약시대에 계속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난 시기를 누가복음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였던 옥타비아누스는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전쟁을 종식하고 드디어 강력한 제국의 건설에 성공했습니다. 원로원은 승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아구스도,” 곧 지극히 존엄한 자라는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자신이 이룩한 위업에 도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자신이 보통 인간이 아니고, ”로마의 평화”를 가져온 신적인 존재라는 의식을 심는 데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로마의 평화”는 군사력과 물리력으로 이룩한 성과였습니다. 전쟁이 없는 안정된 시기였기에, 경제는 발전하였는지 몰라도,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인 혼란, 도덕적 타락은 가중되었습니다. 로마는 평화롭다고, 아무 문제 없다고, 황제들은 이러한 평화를 수호하는 신성한 존재라고 지배자들은 떠들었으나, 실제로는 불안과 혼란과 폭력이 팽배한 시대였던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인륜을 저버리는 음모와 모략이 끊이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상업의 번영이 었었으나 피라미드식의 사회구조 속에서 많은 평범한 백성들과 노예들의 삶은 고난과 눈물로 점철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8장 12절-13절은 그 당시에 유통되던 물건들을 금, 은, 보석, 올리브 기름, 쭉 나열하다가 제일 끝에 “노예와 사람의 목숨 따위”도 매매상품 중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도덕적 타락은 로마제국 시민들의 성적인 방종, 간음과 매음에서 극에 달하였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에서도 음행하는 자들이 있다고 바울이 탄식하였겠습니까?


이러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는 참다운 평화의 길을 보여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예수 탄생 소식을 전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찬양합니다. 에베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고 말하는데요, 예수의 평화는 세상에서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는 데서 오는 평화였습니다. 로마제국의 방법과는 180도 다른 방법론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서로 섬김을 받으려고 경쟁합니다. 세상에는 힘을 가진 자마다, 권력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 그러나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막 10:42-45). 이 말씀 속에는 억압과 폭정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로마 제국에 대한 비판, 더 나아가 세계 일반의 속성에 대한 비판과 참다운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대안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으로 자기를 죽이는 세상 권세 앞에서도 변함없이 섬김과 사랑의 혁명적인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36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평화가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십니다. 곧 예수의 섬김과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예수의 평화가 함께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평화는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면서 또한 우주적인 평화였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이 땅에 시작된 평화는 만물을 새롭게 하고, 더 많은 “평화의 자녀들”을 불러모으면서 “평화를 향한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전쟁 억지에 기초한 로마의 패권적 평화(Pax Romana), 즉 안보 개념에 기초한 평화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사도 바울은 각 교회 공동체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이 특별히 만든 인사 표현을 사용하는데 반드시 평화를 언급합니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 1:2-3 등). 교회는 예수의 평화의 비전과 그 힘을 지녀야 하는 공동체라는 점을 편지 서두에 항상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III.  초기 기독교 여성들의 공헌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와 샬롬의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초기 기독교 운동에 있어서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세례고백문(baptismal confession)이었습니다. 헬레니즘 사회에서 남성은 자신이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야만인이 아니라 헬라인으로,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늘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헬레니즘 사회의 이 신념을 채택해서 회당예배용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즉 성년이 된 유대인 남성은 날마다 세 번씩 자신이 이방인으로, 여성으로,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당시의 가치관을 염두에 둘 때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의미가 더욱 확연하게 들어납니다. 인종, 계급, 성 등의 차이에 기초해서 강자가 약자를 멸시하고 지배하도록 되어 있는 당시의 폭력적인 문화를 극복하고, 초기 기독교는 대안적인 비전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민이 평등한 비전, 곧 정의롭고 평화로운 혁명적 비전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유대인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배타적 선민사상을 버려야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인은 노예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남성은 여성에게 행사하는 권력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 평등주의적 에토스는 이방인과 노예뿐만 아니라 여성도 기독교 운동 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교회공동체 내에서 여성은 주변적 보조적 인물들이 아니라 사도로서, 예언자로서, 선교사로서 또한 가정교회의 지도자로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보면 마리아, 루디아, 뵈뵈, 브리스가, 유니아, 유오디아와 순두게 등 수많은 초대교회 여성지도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폭넓은 활약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종, 계급, 성에 의한 차별을 철폐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대선언의 실효성을우리는 “버시”같은 여성을 통해서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낯선 이 “버시”는 로마서 16장 12절에서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여성으로서 본래는 “페르시스” 곧 “페르시아 여자”라는 이름의 여성 노예 혹은 해방 노예 여성입니다. 즉 버시는 첫째 이방인이요 둘째 노예였으며 셋째 여성으로서, 삼중고의 소외를 경험하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여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같은 기상천외의(!) 선언을 듣게 되었을 때 맛보았을 형언할 수 없는 은혜와 가슴뛰는 감격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버시의 경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적어도 교회에서 만큼은 더 이상 신분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건처럼 취급받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의 주인과 함께(만일 그가 개종한 자라면) 형제 자매가 된다는 것,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녀는 이 은혜로운 가능성 속에서 진심으로 헌신하여 교회를 위해 “주안에서 많이 수고했으며” 나아가 바울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앙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가 실로 성령이 충만한, 새로운 질서의 대안적 공동체였음을 들어내주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대선언이 결코 피상적인 구호만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종교적 비전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실천적으로 실현시켰던 위대한 원동력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버시는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인권과 존업성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지도력을 개발하고 발휘하는 기회도 얻게 되었습니다. 버시의 관점에서 볼 때 복음은 정의로운 평화 곧 샬롬이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평화”라고 불렀습니다(엡 2:14).


IV.  평화의 영성


 오늘날 우리는 폭력과 불의가 팽배한 세계 속에서 평화를 창조하는 성서적 전통을 계승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평화의 일꾼하면 성 프란씨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비추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저는 이 기도를 기억할 때마다 평화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해야 할 종목이 많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미움, 상처, 의혹, 절망, 어둠이 있는 곳에 사랑, 용서, 믿음, 희망, 빛을 선물하려면 우선 내 영혼과 마음에서부터 사랑, 용서, 믿음, 희망, 빛이 충만해야 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에 이러한 거룩한 힘이 없이는 외부의 타인들에게 이러한 선물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게 없는 것을 세상에 줄 수 없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만났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고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행 3:6). 


예수의 평화는 무사안일주의가 아니라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평화이기 때문에,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용기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아이러니는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우리 마음에 사랑의 샘이 말라 버리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장 큰 성령의 열매가 사랑이라고 말씀하면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고전 13:6). 정의가 없는 사랑은 감상주의에 불과합니다. 사랑과 정의는 동전의 양면같이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정의는 또다른 폭력이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상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생기는 수많은 실망과 좌절과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사랑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이 불가능한 가능성을 우리의 삶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7-9). 기독교 전통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지식은 개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샘에서 치유받고 회복된 사람은 평화의 사도로 일할 힘을 지니게 됩니다. 권력의 힘에 저항하다가 자신이 힘을 갖게 되면 똑같은 악습을 반복하는 단순한 반항아가 아니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진리로 인도하는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혁명적 인간으로서 정의를 위한 싸움에 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의 기도 후반부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 평화가 깨질 때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점차 로마 제국의 권력과 친밀해가던 시기에 영적으로 깨어있던 많은 신앙인들이 사막으로 나아가 고독 속에서 치열하게 하나님의 현존을 추구하며 수도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 수도사는 악마가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수도자들 사이에 분란을 던져 줄 때, 그 중의 한 수도자가 겸손하게 엎드리면 우리의 모든 힘이 그만 박살나고 만단 말야.” 공동체의 참 평화는 겸손한 한 사람의 존재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막의 수도 전통에 있어서 “겸손은 하나님께 이르는 문”입니다. 교만은 폭력의 문이요 평화의 파괴자인 반면에, 겸손은 하나님께 이르는 문이요, 평화의 열쇄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있는 공동체에는 평화가 깃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겸손한 인물은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평화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V.  맺는 말


 예수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면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눅 19:42). “평화에 관한 일”(ta pros eirenen)은 “평화로 향한 것들,” 또는 “평화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것들”로 풀어 쓸 수도 있습니다.  예수야말로 평화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동력인데 예루살렘은 이 평화의 왕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한민국은 평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올해가 2010년인데요, 다 잘 알고 계시듯이 한반도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된 100년이 되는 해이고, 동족상잔의 남북전쟁이 일어난지 60년이 되는 해이며, 광주항쟁이 일어난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아직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서의 모순을 그대로 경험하고 있고, 부실한 민주화, 양극화, 무한 경쟁의 세계화 등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갈등으로 인해서 정신적 스트레스도 가중되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정신과가 급증하고 있는데요, 많은 여성들이 우울증과 공황 장애로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유가 자녀 교육이든, 부부관계든, 시댁과의 관계든, 경제적인 문제든, 건강문제든 간에 많은 여성들의 마음과 영혼이 병들고 상처나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성들뿐입니까. 벼랑에 선 남성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40대 남성 사망률이 제일 높은 나라입니다. 어른뿐입니까. 작년에 아동과 청소년의 자살 통계가 급증했다는 가슴 아픈 통계도 있습니다.


이렇게 평화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기억할 때 평화를 꿈꾸며 일하는
YWCA와 YMCA가 우리 사회에 중요한 기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YWCA와 YMCA에 대해서 점점 알아갈수록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우선 YWCA와 YMCA는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습니다. 세계 YWCA/YMCA도 그렇지만 한국의 YWCA/YMCA 역시 파란 많은 역사 속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며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해온 예언자적 실천의 기억들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현재의 도전에 응답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데 YWCA/YMCA의 역사에는 새 시대에 필요한 창조적 영감을 주는 자랑스러운 발자취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YWCA/YMCA는 교파를 초월한 에큐메니칼 신앙 운동체입니다. 21세기는 세계 교회의 리더쉽이 남반구로 이양되는 시기라고들 합니다. 남반구라고 간주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한국 교회는 무시할 수 없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 한국/부산 개최를 결정한 것도 한국 교회에 대한 세계 기독교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사적으로 한국의 교회들은 에큐메니칼 파라다임의 목회와 선교의 지평으로 초청받는 역사적 시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성서의 우주적 교회론을 도외시하고 교단주의과 개교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차제에 에큐메니칼한 열린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유지하는 YWCA/YMCA는, 중요한 성서적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으로 일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독교 운동단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YWCA/YMCA는 지역과 세계를 아우르는 21세기형 운동단체로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방화(glocalization)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세계화 시대의 지역 공동체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시점에서 지역운동체, 국가운동체, 국제운동체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YWCA/YMCA는 복합적인 21세기형 운동에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계신 YWCA/YMCA 실무자들과 YWCA/YMCA 식구들은 참 복이 있는 분들입니다. 이렇게 다차원적으로 의미있는 일터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분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모퉁이 돌은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의 평화로 훈련된 사람들이 가정과 교회와 지역 사회와 민족 사회와 국제 사회 곳곳에 등대처럼 서서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할 때에, 이 땅 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YWCA와 YMCA야말로 이 시대가 갈망하는 평화의 산실이 되실 수 있기를, YWCA와 YMCA에서 일하시는 모든 분들이 지역과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창조하는 평화의 사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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