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08년 생협실무자 대학때 윤형근 선임연구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사회적 협동의 호혜 경제와 생명민주주의의 주체 형성

 

 

윤형근 (모심과 살림 연구소 선임연구원)

 

 

1.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새만금 간척이나 핵 폐기장 설치, 경부고속전철 건설 등 대규모 국책사업이나 한국과 칠레, 한국과 미국에 이어 유럽, 중국, 일본과도 추진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서라도 경제 성장을 지속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받고 있다. 특히 IMF 경제 위기 이후 지속되어 온 저성장 기조는 카드 대란, 아파트 값 폭등 등 민생경제의 위기와 더불어 성장 이데올로기를 한층 더 부추기고 있다. 이런 기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과 맞물리면서 구조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지금까지 세금으로 운영되었던 철도, 수도, 가스, 통신 등 공공영역을 민영화하여 효율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대처와 레이건 행정부에서 시작된 민영화의 구조개혁은 우리 사회에도 별다른 장애 없이 추진되면서 성장 이데올로기의 한 축을 구성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민중운동, 시민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오히려 정부, 공공영역을 강화하여 고삐 풀린 무소불위의 시장을 제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민영화의 모델로 제시되곤 하는 대처의 정책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처럼 공공영역과 시장영역의 경계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전통적 사회운동이 날을 세우고 대립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가 몰락한 냉전 붕괴 이후 공공영역을 강화하여 사회적 서비스를 확충하는 복지국가 모델이 후퇴하면서 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한층 더 동력을 받고 있는 듯하다. 대신 사각지대가 되어가는 사회적 서비스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개량적인 논의가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진전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데 있다. 아무런 국민적 위임, 사회적 합의, 여론 수렴의 노력 없이 비밀주의로 일관한 한미FTA 추진 과정이 웅변하듯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성장을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과정과 절차조차 무시하고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대의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구성된 공공영역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중심의 시스템을 지원하는 모양새로 귀결되어 버렸다.

사실 군사정권에 의해 1960년대, 70년대 강압적으로 추진된 근대화 과정, 경제성장 과정은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의 이해를 대변하며 그 이해를 공공정책화 하는 과정이었다. 일본의 가나가와생활클럽생협에서는 자본주의의 경제 과정을 국가 중심으로 진행되는 산업 우선주의 관철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국가 시스템 자체가 산업자본가들의 연합이 만들어낸 ‘사회적 권력’으로 바로 일본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산업자본의 원칙이 공공정책으로 그대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아 군사정권에 의해 더 노골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민주화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 세계화 편입 과정은 더 공식적으로 기업의 사적 이익을 공공정책화 시키고 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으로 말하자면, 군사정권의 권위주의를 벗어나 민주주의의 기본적 질서를 갖추는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공식적으로 자본에 권력을 넘기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민주화와 동시에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추진과 함께 민에 의해 행사되어야 할 권력이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에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선거로 뽑힌 대의기구들조차 자본의 이해 앞에 무력화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관점을 바꿔 얘기하자면, 성장 중심의 경제 논리 속에서 사실상 민주주의는 허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민주주의는 경제를 보는 눈, 경제적 프레임의 전환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2. 사회적 협동의 호혜 경제

 

헤이즐 헨더슨(Hazel Henderson)은,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산업사회의 생산구조를 화폐경제 부분과 비화폐적 경제 부분으로 나누고, 화폐경제 부분은 전적으로 비화폐적 경제 부분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화폐경제 부분은 공인된 시장(market) 영역 및 세금으로 움직이는 공공 영역으로 구성되고, 비화폐적 경제 부분은 크게는 사회적 협동의 호혜경제(Social Cooperative Love Economy, 이하 호혜경제) 영역과 대자연(Mother Nature)으로 구성된다. 호혜경제 영역은 공유, 호혜적 교환, 나눔, 자급을 원리로 작동하는 DIY(Do It Yourself), 물물교환, 사회․가족․지역을 유지하는 기초인 가사(家事), 돌봄노동, 봉사활동, 상호부조, 노인이나 병자의 간호, 가정 내 생산과 가공, 자급농업 등을 포괄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과 호혜경제 영역 덕분이며, 화폐경제 부분이 성립할 수 있는 것도 이 비화폐적 경제 부분이 터전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인간의 경제에는 지금까지 세 가지 방식이 있었다고 말한다. 시장에 의한 교환과 국가나 공공영역을 통한 수평적 재분배, 그리고 호혜의 영역이다. 그는 이것은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라 한 사회 안에도 세 가지가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관계가 경제시스템 안에 매몰된 상태에서 다시 시장경제를 사회관계 안에 포섭하도록 하는” 전환을 이야기하는 폴라니는 실제로는 수평적 재분배를 통한 국가나 공공영역의 강화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호혜영역의 강화를 통한 국가와 시장과의 균형이었으며, 따라서 호혜 영역의 확충도 중요한 사회경제적 대안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폴라니의 생각을 받아들여 가라타니 고진은 과거 공동체사회의 폐쇄적인 호혜를 넘어 열린 호혜 시스템으로서의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화폐로 평가되는 생산부문

- 위의 두 층은 화폐화되고 공적으로 계산되는 GNP로서 전부 경제통계에 산정된다

(15%는 지하경제로, 불법 또는 탈세분)

 

공인된 시장경제

GNP 사적 부분

의존

 

GNP 공적 부문

 

의존

 

사회적 협동의 호혜 경제

 

의존

자연계

 

 

 

공적(公的) 부문의 생산, 고용, 소비, 투자, 저축

국가와 방위, 지방행정

공적 부문의 생산기반구조

(도로, 교량, 학교, 시 행정 등)

화폐에 의한 지하경제

비화폐적 생산부문

- 이타적 경제부분으로 화폐경제 부문을 무상의 노동, 자연에 흡수하든지 또는 계산될 수 없는 환경비용으로 보강

(손실분은 다음 세대로 이전된다)

사회적 협동의 호혜 경제

(물물교환, 가사, 돌봄, 봉사활동, 상호부조, 자급농업 등)

어머니이신 자연

(생태환경 파괴, 오염방지 비용을 흡수)

표1. 산업사회의 생산구조(헤이즐 헨더슨)

 

헨더슨이나 폴라니가 말하는 호혜 경제의 관점에 선다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현재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는 시장과 공공영역 사이의 마찰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기반인 대자연과 사회적 협동의 호혜경제를 화폐경제 영역으로 끌어들여 상품화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에 따라 화폐경제, 상품경제가 이 영역을 잠식하여 공공재의 성격을 지닌 땅이나 물이 상품화되면서 자연이 황폐해지고, 공유, 호혜적 교환, 나눔, 자급 등의 지역사회 구성 원리가 화폐경제의 침투로 왜곡되면서 그나마 공동체적 유산을 지니고 있던 지역사회가 급속히 쇠퇴하고 있는 것이다.

생태문제나 지역공동체 사회의 재생을 염두에 둘 때, 정부나 공공영역의 강화는 정책 주체의 ‘생태’나 ‘지역’에 대한 의식적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해법일 수 없다. 오히려 사회적 협동의 호혜경제나 대안의 관점 속에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신자유주의의 확장, 혹은 시장경제의 진전과 함께 더욱더 교환영역에 포섭되어 가는 이 영역을 어떻게 확충할 것이며, 그 주체는 누구일까란 물음에 대한 일종의 시론이다.

 

3. 재생산의 사회적 가치 평가와 대안경제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은 생산과 재생산의 구분을 통해 성립되고, 그 영역을 성별로 분담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즉, 대개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은 이윤과 효율을 중심으로 인간의 생명활동을 이원화시킨다. 생산과 직접 관련된 영역은 화폐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사회화시키고, 이런 생산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재생산 영역은 가정을 단위로 사적 영역으로 구조화시킨다. 이 이원화는 인류 역사상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보다 훨씬 오랜 세월 인류를 지배해 온 가부장제의 성별 분업을 업고 그 구조를 더욱 심화시킨다.

 

구분

내용

담당주체

영역

평가기준

생산

노동

남성

사회화

화폐

재생산

육아, 소비, 휴식

여성

사적 영역

-

 

 

 

표2. 현대사회의 경제 주체

 

칼 맑스(Karl Marx)에 의해 처음 규정된 재생산 영역은 상품의 생산이 아니라 인간의 생산, 즉 노동력의 생산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소비를 통한 영양의 섭취와 휴식 그리고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과 관련된다. 다른 표현으로 바꾸자면, 재생산은 생명을 낳고 가르치고 보살피고 치유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생명활동과 직접 연관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영역은 사적 영역으로 귀속되면서 자본주의의 주류 시스템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다. 즉, 주변화 되어왔던 것이다. (재생산노동은 가정과 대자연, 지역사회의 기반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물론 상품을 생산하고 교환가치를 창출하는 생산도 사실 생명을 유지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생명활동이라는 점에서 재생산 영역과 다를 바 없지만, 이 영역은 상품의 생산, 즉 화폐로 가치가 평가되는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에 귀속되면서 자연과 지역을 떠나버렸다.)

 

“19세기 중엽 노동자들은 일이 끝난 이후에도 발걸음은 집이 아니라 선술집을 향했다. 당연히 선술집은 소란의 중심지였다. 이 소란은 ‘가족주의’가 확산되면서 해소되어갔다. 가족주의의 확산 속에서 노동자는 집안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 되고 그들의 부인은 가족의 공간을 관리하는 ‘주부’가 된다.... 당시 박애주의자들은 남편들을 선술집이나 카페에서 ‘가정’이라는 공간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 주부의 능력과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재생산노동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반 일리히(Ivan Illich))는 ‘그림자노동’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실 자본주의에 의해 구조화된 재생산, 가사노동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그것은 시장으로부터 화폐로 가치가 평가되지는 않지만 19세기 들어 생산적 노동에 대한 기술적 요구로 생겨난 ‘임노동’의 쌍생아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생산노동이 시장을 향할 때 그것은 임노동과 다를 바 없다.

 

“일리히에 의하면 19세기에 들어 생산적 노동에 대한 기술적인 요구로 ‘임노동’이 생겨났는데, 이러한 임노동의 조직화와 함께 두 번째 타입의 역사적으로 새로운 활동(activity)인 ‘그림자 노동(shadow work)’도 출현하게 됩니다. 같은 시대에 생겨난 그림자 노동은 임노동과 달리 시장으로부터 지불되지 않는 노동이지만, 그 방향은 임노동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시장을 향해 있는 노동입니다.

산업적 활동(industrial activity)은 ‘남자’가 지불된 ‘생산적 노동’(임노동)에 종사하고, ‘여자’가 지불되지 않는 ‘불생산적 노동’(그림자 노동=가사)에 종사하는 ‘노동남(vir laborans)’과 ‘가사녀(femina domestica)’를 갈라놓았습니다. 하지만 임노동과 그림자 노동은 ‘산업적 노동(industrial work)’의 샴쌍둥이이고, 같은 ‘중성적 활동(neutral activity)’ 혹은 ‘성이 없는 활동(genderless activity)’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을 행하는 ‘노동남’과 ‘가사녀’는 ‘경제인(homo economicus)’이라는 산업사회가 낳은 같은 인간 유형의 다른 표상입니다.

이러한 산업적 노동에 대치하는 개념으로 일리히는 ‘버내큘러(vernacular)’를 이야기합니다. 버내큘러는 라틴어로 ‘집에서 키운, 집에서 짠, 집에서 자란, 집에서 만든 것’으로써, 공식적(formal) 교환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버내큘러는, (시장에 의한) 교환과 (국가에 의한) 수평적 분배로부터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 생활의 모든 면에 숨겨져 있는 호혜적 관계망을 통해 생존해가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버내큘러는 비시장경제적, 비공통언어적, ‘교환의 사상’에 의해 동기부여 받은 것이 아닌, 자율적이고 사용가치적이며 매일 매일의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입니다.”

 

자연과 지역사회 속에 존재하는 이 생명활동과 관련된 재생산노동은 핸더슨이나 폴라니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협동의 호혜경제와 중첩된다. 하지만, 앞의 인용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 재생산노동이 시장경제를 향하느냐, 아니면 호혜, 공유, 자급, 나눔의 원리에 근거한 호혜 경제를 향하느냐는 운동 전략과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사노동에 임금을”이라는 구호를 앞세운 여성운동은 재생산노동을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주류 시스템 속에 귀속시켜 버린다(물론 이런 방향을 가진 운동의 현실적 필요는 백 번 천 번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이것은 현재 사회가 화폐라는 사회적 평가기준을 통해 생산노동을 ‘사회화’시키는 방식을, 그대로 재생산노동에도 적용함으로써 일리히가 이야기하는 ‘그림자노동’을 ‘임노동’화하는 전략이며, 좀더 가혹하게 평가하자면 현재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의 방향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오히려 문제는 사적 영역으로 귀속된 재생산노동을 전혀 새롭게 ‘사회화, 공공화’시키는 데 있다. 즉, 재생산노동을 교환가치를 집약하고 있는 ‘화폐’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 경제의 작동원리로서 호혜, 공유, 자급, 나눔을 통한 보이지 않는 가치인 신뢰로 평가하는 운동의 방향을 통해 사회적 협동의 호혜 경제 시스템을 정립하는 것은 불가능할까라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현실화할 때 재생산노동의 주체인 여성들이 대안적 경제 시스템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4. 호혜경제와 생명민주주의의 주체 형성

 

1980년대 중반에 싹터 2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어 온 한살림이나 생협운동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사회화, 공공화 된 재생산 영역’이 사회적 협동의 호혜 경제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시장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농산물을 개인적으로 소비하던 주부들이 한살림이나 생협의 공동구입을 통해 구매력을 결집하여 유기농업 생산자들과 연대할 수 있었던 경험은 이웃들과 함께 사적 영역의 소비를 공공화 시키는 훈련의 장이 되었다. (한살림이나 생협 운동의 경험, 특히 한살림운동은 재생산의 사회화, 공공화뿐만 아니라 유기농업운동과 생산자, 소비자의 신뢰 형성이라는 사회연대운동의 측면이 부각되어야 한다. 이들 모두 호혜경제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전체 논지를 위해 그 중 재생산의 사회화, 공공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훈련의 과정 속에서 사회적 주부로 성장한 여성들이 협동과 연대, 호혜의 지역사회를 창조하는 데 나선 것이다.

가정이란 사적 영역에 귀속되었던 재생산의 소비를 위한 구매활동을 한살림이나 생협 운동을 통해 사회화, 공공화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재생산 영역의 공공화’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사적(私的, private) 영역

↓ ↓ ↓ ↓

사회적 협동의 호혜경제

표3. 사회적 협동 경제의 구성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은, 호혜경제 영역의 확충(사실 한살림이나 생협 운동 자체가 화폐경제 영역에서 작동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사회적 협동의 호혜 경제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운동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관계가 사회적 협동의 호혜 경제의 영역이라 여겨지고, 또 그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호혜경제 영역으로 단정하고 있다.)이 자율과 자치라는 민주주의의 훈련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즉, 한살림이나 생협 운동은 먹을거리를 매개로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던 일상적 삶을 공공화하여 사회적, 정치적으로 의제화함으로써 시민사회에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넘어서 참여를 통한 풀뿌리 중심의 생명민주주의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전망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근대적 주체 형성 실패의 역사를 딛고 참여를 통한 근대 시민사회의 가능성을 열고, 또 한편 서구 근대에 의해 비주류로 전락한 주부와 농민을 역사의 주체로 부각시킴으로써 탈근대적 대안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기나긴 근대 100년의 식민지 경험과 군사독재의 중앙 집중화 과정의 폐해는 우리의 뼈 속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우리 사회에는 불편 감내와 타성의 문화가 보편화되어, 일상생활의 불편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극단적 수동성이 만연해 있었다. 이 수동성의 문화가 자율적 공공영역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돈에만 의존하는 사적 공간(밀실)의 확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백 년 이상 겹겹이 쌓여온 이 견고한 타율의 문화는 쉽게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십수 년 시민운동의 성장이 괄목할 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시민 없는 시민운동’, 주로 각성한 지식인들, 전문가 그룹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타율과 수동성의 문화가 얼마나 견고한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타율과 타치의 궁극적인 극복은 밀실로 숨어버린 개인의 삶과 사회(정치)의 연관을 찾고 개인의 소소한 일상적 삶을 광장으로 나오게 하는 데 있다. 한살림이나 생협의 등장과 그 성장이 시대적으로,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 돌파구를 열고 있다는 점이었다.

농약과 화학비료, 각종 첨가물 등의 식품오염, 즉 자신이 생활하는 가장 기본적인 식생활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같은 생각을 가진 이웃들과 함께 구매력을 결집하고 유기농업 생산자와 연대함으로써 개인의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즉, 식생활이란 개인 삶의 영역이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타율적 근대화 과정을 통해 외부적으로 주어진 정치와 시장이란 중앙화되고 화폐화된 제도(농산물의 생산-유통-소비-폐기의 경제과정)에 의해 조정되며, 그로 인해 왜곡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여 한살림이나 생협(새로운 시장의 형성)을 통해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식생활이란 개인 생활의 영역을 이웃들과의 ‘생활공동체’라는 광장을 통해 공공화하고, (공정한 규칙이 적용되는) 새로운 공동체 시장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살림이나 생협 운동의 과정 자체가 타율과 타치(他治), 불편의 감내와 타성의 문화, 극단적 수동성의 개인을 깨치고 극복하는 자율과 자치의 훈련 과정이며, 가장 기초적인 민주주의 교육의 장인 것이다. 사회의식이 강한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인들이 생활 그 자체를, 민주주의의 기초원리인 자율과 자치를 통해 재구성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살림이나 생협이 일상을 공공화하여 민주주의의 터전을 닦는 방향으로 공공 부문이나 시장이란 화폐 영역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협동경제, 호혜경제의 영역을 확충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사회적 협동의 호혜경제 구축이 민주주의 주체 형성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특히 그것은 외부적 강제에 의해 주어진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시장이나 국가 시스템이 중앙 중심적이고 남성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면, 호혜경제 영역은 지역을 기반으로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2류 시민 주부들을 주체로 등장시킨다.

 

5. 지역 관계의 그물로서의 사회적 협동의 호혜 경제

 

앞에서 우리는 여성들이 주된 담당자였던 재생산노동의 사회적 공공화를 통한 호혜 경제의 가능성을 한살림과 생협의 사례를 통해 확인했다.

물론 우리 사회의 경제 구조가 전적으로 호혜의 영역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다. 당연히 시장과 공공영역, 그리고 호혜 영역 사이의 적절한 조화와 균형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 영역의 기형적인 확대를 초래하고 그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온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기존의 사회운동이 주장하는 공공영역의 강화를 통한 시장의 제어도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의제일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의 득세로 위기를 맞고 있는 민주주의가 굳건한 토대를 갖추기 위해서는 호혜, 나눔, 공유, 자급을 기초로 한 호혜경제가 확충되어야 한다. 민의 기반 없는 공공영역은 시장의 이해를 대변하기 십상이고, 또한 자율적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공공영역에 의한 지역 사업들이 얼마나 부실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우리는 정부의 수많은 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공정책의 수립이나 공공영역의 민간에 대한 지원도 시민사회의 자율적 기초, 즉 호혜영역의 튼튼한 토대가 있어야 비로소 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호혜영역의 기반이 튼튼할 때 비로소 공공영역도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통해 우리는 재생산노동의 사회적 공공화를 통해 주부들을 민주주의의 주체로 부상시키고 호혜경제 영역을 새롭게 구성해 가고 있는 한살림이나 생협 운동의 사회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재생산노동이 이들 운동을 통해 사회적으로 공공화 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상품화되거나 공공영역으로 귀속되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 과정에서의 철저한 배제가 여성들의 자기실현 욕구를 자극하여 주류의 경제과정으로 급속한 편입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전업주부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우리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출산율이 낮아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호혜경제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대안경제의 전망이 부재하다면 이 경향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물론 가능성도 보인다. 자율적 삶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 사례들은 이미 먹을거리나 생활물자의 구매나 소비 행위를 넘어서 의료, 문화, 교육 등 생활 전 영역의 자율적, 자구적 조직화로 나타나고 있다. 육아조합에서 출발하여 생협, 문화조합, 차병원이나 동네부엌과 같은 협동적 일자리, 방송국까지 일구어낸 마포의 성미산 사례나 생협, 신협, 생산조합, 문화조합, 최근 노인협동조합까지 협동조합의 협의체를 통해 지역을 재구성해 가고 있는 원주 그리고 풀무학교를 출발점으로 하여 교육, 농촌여성복지, 지역 언론, 유기농업운동, 생협 등 지역공동체 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홍성이나 한살림을 거점으로 지역의 복합적인 생산, 가공 시스템을 엮어가면서 지역운동으로도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아산의 사례들은 지역사회를 호혜적 관계의 그물로 짜나가는 대안적 사회, 경제 시스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이들 운동은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지역 순환적 생산, 가공 시스템을 추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워커즈 콜렉티브처럼 재생산의 사회적 일자리로도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전개로 인해 사회적 서비스가 급속히 축소되고, 고령화 사회로 초고속으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 속에서 사회적 의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돌봄 노동의 실행 주체로 한살림이나 생협을 통해 민주주의의 주체로 등장한 주부들이 대두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호혜적 관계의 그물로서의 대안사회 구성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짚고 넘어가야 할 점도 있다. 호혜 관계가 근거하고 있는 신뢰라는 관계재, 공공재는 그것이 현실적 토대를 갖지 않으면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도 과제가 대두된다. 우선은 새로운 사회적 가치평가의 기준이나 시스템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일부 지역에서 실험되고 있는 대안화폐, 지역화폐는 호혜경제의 중요한 매개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호혜의 관계망을 토대로 한 지역사회의 자치 역량 실험과 그 자치 역량의 전국적인 실천적 네트워크로서의 정치적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정치적 전망을 가질 때 비로소 대안운동의 자족적 성향을 넘어 호혜경제와 연동하는 자율과 연대, 창조를 기치로 한 생명민주주의가 생동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