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8. 8. 17 그린코프연합 회의실에서 그린코프연합 상근임직원을 대상으로 그린코프연합 유키오카 전무이사가 강연한 것입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1) 생협이란 무엇인가 (2) 언어의 구조에 대해서 (3) 「대지로서의 조합원」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4) 「워커즈형」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1) 생협이란 무엇인가 - 생협은 언어다.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생협을 매일 오가면서도 대체 생협이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예를 들면, 생협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롯치데일 이후 생협의 성장과정을 설명한다. 혹은 생협이란 조합원이 있고, 출자를 하고, 총대회를 열고, 임원이 선출되어 이사회를 만드는 구조를 설명한다. 웬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일본을 말할 때도 일본 민족의 역사는 이러하다고 설명하거나, 중의원과 참의원이 있고 선거는 이런 정도의 빈도로 한다고 설명하면, 웬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적인 의미의 일본의 성립 경위나 제도를 설명할 뿐이지 일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생협에 대해서 롯치데일이나 총대회 등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생활협동조합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본질적으로 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생협을 만들면, 지금도 그렇지만, 조합원이 늘고 공급이 늘었다는 사실에 의거해서 생협은 성장하고 있다, 또는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조합원이 늘어나고 공급액이 늘어나면 생협이 성장했다라든가, 생협이 발전했다라든가, 전진했다라든가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조합원이 늘고, 공급액이 증가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생협이 성장․발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협이 성장․발전하는 것과 조합원이 늘어나는 것은 꼭 같은 것이 아니다. 특별 기획상품이나 잡화가 커다란 비중으로 공급액을 점하다가, ‘잠깐, 그런 것은 취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는 반성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한 반성을 토대로 물품 취급을 중단하고 공급이 줄었을 경우, 그것은 생협의 성장이 멈췄다 혹은 후퇴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조합원이 늘고, 공급액이 증가하는 것과는 별도의 의미에서 생협의 성장․발전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면 생협의 성장 ․발전은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조합원이 늘었다 공급액이 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정확성은 있지만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판단하는게 좋은가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어쩌면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생협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동전의 앞뒤와 같다. 조합원이 늘고 있는 경우나 혹은 급속히 늘고 있을 때 그와 비례해서 생협도 급속히 성장․발전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따라서 생협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생협이 성장한다, 발전한다, 전진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측정할까라는 문제는 같은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설정한 다음, 조금 이야기를 바꿔서 하겠다. 사람들에게 다람쥐․코끼리․원숭이라는 단어를 말한 후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그리거나 못그리거나의 차이는 있지만 대강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생협, 노동조합, 일본이라는 그림을 그려보라하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려내기가 힘들다. 예를 들면 그린코프 그림을 그려보라 하면 겨우 생각해내는 것이 생협의 사무실이거나, 다람쥐 캐릭터이거나, 트럭이거나 하는 것이다. 노동조합 그림의 경우에도 생각나는 것이 붉은 깃발 밖에 없다. 일본을 그려보라 하면 일본열도를 그린다. 그러나 일본열도가 일본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트럭이 그린코프가 아니라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린코프를 그리라 하면 그 정도 밖에 그릴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다람쥐․코끼리․원숭이는 눈으로 본 적이 있는데 그린코프는 누구도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냄새를 맡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말에는 누구도 눈으로 보거나 만지거나 한 적이 없는 것이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만지거나 본 적이 없는 그러한 말(이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우리들 관념 세계에 있어서는 그것이 전제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린코프라고 하는 말(이 가르키는 실물)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 생활 속에 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이 가리키는 실물)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우리의 관념 세계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이 관념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현실 생활에 관계가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실제로 그린코프는 모두를 고용하고 있다. 그린코프가 파산하면 모두 직장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것(그린코프)은 우리들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다. 예를 들면 과거에 일본인은 모두 국민이라 하여(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비국민으로 규정하고) 국민에게는 무기를 주면서 이웃 나라 사람을 죽이게 한 ‘일본’이라는 ‘代物’도 그러하다. 그 것(일본)은 우리의 관념세계에 살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관념의 세계에 살아있는 이상 당연히 언어로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들 관념세계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일본, 또는 그린코프라는 말)은 사람에게 공유되고 있는 한 실제로 존재하는 원숭이나 코끼리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에게 더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한 차원으로 생협도 그린코프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생협의 본질은 언어다’는 것이다. 원숭이나 코끼리처럼 만지거나 볼 수는 없지만 우리들 관념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생협이며 그린코프이다. 같은 의미에서 노동조합도 그렇다. 회사라고 불리우는 것도 그렇다. 그것들은 우리들 관념의 세계에 살면서 우리들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언어)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생활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한 代物이 지금 우리 사회를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먼저 설정했던 문제에 나름대로 답을 한다면, 생협이 성장했다 혹은 그린코프가 성장했다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린코프라고 하는 언어의 세계에 있어서 그 곳에서 주고 받는 말들이 빈약하면 설령 조합원이 얼마 만큼 늘었거나 공급액이 늘었거나 간에 그것은 그린코프의 성장도 발전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생협이 그러한 짓(상품을 속여파는 것)을 했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모생협이 그러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상상했던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도 그러한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생협은 그러한 일이 허용되는 언어세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히 한 사람 -그러한 일을 저지른 직원- 이 있었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밖에 없는 언어세계가 모생협 속에 쭈욱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조금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언어세계 속에 모생협이 성장해왔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모생협의 성장은 생협운동의 성장도 발전도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합원이 늘었다든가 공급액이 늘었다든가 하는 것은 반드시 생협운동의 전진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생협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퍼가 탄생한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린코프이다. 그린코프에서 오고가는 말들이 정말로 탄력적이고 부드러워졌는가, 인간의 몸과 생활을 파괴하는 말을 없애나가는만큼 그린코프는 성장했다든지 전진했다라든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린코프 상품이 확실한가 아닌가는 그 상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직원 간에, 혹은 직원과 조합원 사무국 간에, 사무국과 조합원 간에 어떠한 말이 오고 갔는가의 문제다. 만드는 과정에서 ‘몰라도 괜찮아요’와 같은 폭력적인 말이 오고간다면 그 만큼 상품은 이상한 것이 된다. 일상적으로 그린코프라고 하는 언어세계에서 어떤 말들이 교환되고 있는지가 그린코프의 내실인 것이다. 그러한 속에서 조합원이 증가하는 것은 그린코프가 성장․발전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척도로서 오차는 있지만 확실한 척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척도를 논한다면 언어 또는 언어세계라고 하는 의미로서의 그린코프가 얼마만큼 부드러워졌는가, 인간의 생명과 생활에 얼마만큼 부드럽게 그리고 탄력적으로 관계를 맺는가, 어떠한 말들로 서로를 짜고 있는가가 본질적인 척도다. 그러한 의미로 나는 ‘생협의 본질은 언어다’라고 생각한다.
(2) 언어구조에 대해서
인간의 언어는 어떠한 구조로 되어 있는가, 인간의 언어에 대해 말하기 전에 <파블로프의 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파블로프가 어떤 실험을 했다. 개에게 고기를 줄 때마다 동시에 부자를 울린다. 그것을 한참 동안 계속한 후 고기를 주지 않고 부자만 울렸다. 그러자 고기를 줄 때와 마찬가지로 부자가 울리자 침을 흘렸다. 이것이 <파블로프의 개> 이야기이다. 상당히 잔혹한 실험이지만, 틀림없이 고기를 주었을 때의 신체반응(침)과 부자를 울렸을 때의 신체반응이 같다는 것을 증명했다. 웬지 그런 기분이 든다. 우리도 매실 이야기를 하면 입안이 시어지고 침이 나온다. 그와 마찬가지로 개도 그럴 수 있겠지 하고 쉽게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을 파블로프는 틀림없이 그렇다고 증명했다.
그래서 총괄해서 말하면 파블로프 실험이 말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점이다. 하나는 고기가 고기라는 것을 신호한다는 사실, 고기는 그 색․형태․냄새 등으로 <나는 고기다>라고 (밖을 향해서) 신호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서 개는 침을 흘린다. 또 하나는 부자가 고기를 신호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파블로프 실험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말이라는 것도 <나는 고기다>라고 신호하고 있는 현물로서의 고기를 <고기>라고 하는 <소리>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말이라는 것도 성립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야마모토 이치로라고 하는 분이 인간의 언어(말)는 고기를 신호하고 있는 <고기>라는 <소리>로 구성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한 단계 또 다른 차원의 신호계(논리와 수의 세계), 즉 인간은 <논리와 수의 세계>를 언어로 획득함으로써 <인간의 언어>에 도달했다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여기에 의자가 있다. 내가 여기에 앉는다. 의자는 그림으로 그릴 수 있고 앉아있는 모습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의자에 내가 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 의자의 능력에 있어서 내가 여기에 앉는 것을 이 의자는 수용할 수 있을까 어떨까라고 물을 때 인간은 어떻게 움직이나 하면, 이 의자의 재질은 무엇으로 되어 있으며,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나의 체중을 추측해서 내 체중을 이 의자가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떨까를 잽싸게 계산한 후, 된다 안된다를 판단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화제로 할 때 이 같은 절차는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고기라든가 원숭이라든가 비둘기라든가 콩이라든가 하는 현실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은 아무리 많이 섞어도 <인간의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비둘기와 콩이 어떠한 상관관계에 있는가라는 것을 전제로 비로소 <인간의 말>이 된다. 따라서 파블로프가 말한 것처럼 분명히 고기가 고기라고 음화되는 것은 중요한 절차이다. 그러나 그 것만으로 인간의 말이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또 한 단계 <논리와 수>라고 하는 것이 인간에게 획득됨으로써 말은 <인간의 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현물의 고기가 고기를 신호하는 것(제1신호계)은 인정해도 좋다. 다음에, 고기라고 하는 소리가 고기를 신호하는 것(제2신호계)을 인정해도 좋다. 그리고 <논리와 수의 세계> 즉 제3신호계의 존재도 인정해도 좋지만, 그 경우 제3신호계의 세계에서 고기는 대체 무엇이 되는가. 고기는 이 세계(제3신호계)에서는 100g에 500엔이 된다. 이것이 상품이다.
키타큐슈생협이 모지(門司)라는 지역에 퓨어점을 냈다. 모지에는 조합원이 많지 않아서 가게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A와 B가 응원하러 가서 무엇을 했는가 하면, 시장에서 야채를 떼어다가 100엔에 싸게 팔았다. 가게 앞이 북적거리고, 손님들이 오고, 하루 매상도 오르고, 열심히 일을 하였다. 나는 그 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100엔을 파는 것이지 야채를 파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조합원과 매장은 100엔이라는 관계로 만나게 된다. 매일 열심히 땀흘리면서 매장을 망가뜨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야채를 팔아야지 100엔을 팔지마”라고 했다.
결국 고기가 500엔이 되고 500엔이 된 고기는 600엔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하는가 하면 발색제 속에 고기를 집어 넣게 된다. 발색제 속에 집어 넣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먹으면 해가 되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500엔이 600엔이 되려면 필요하다. 즉 거기에는 고기는 고기가 아니라 500엔이 되는 것이다. 상품이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고기가 ‘고기’라고 하는 소리에 의해서 500엔으로 점프하는 것이다. 그 것이 오늘의 상품 세계이다. 그래서 물건이 나빠지게 된다.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되어 간다. 그러한 언어세계 속에서 고기를 둘러싸고 500엔이 자기운동을 한다. 모든 물건들이 그러한 세계에 휩싸여 가고 있다. 그러한 것을 맑스는 『자본론』 속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적어도 고기라고 하는 소리로부터 500엔이 되고 자기운동하는 구조를 인간의 언어가 획득함으로써 인간은 오늘의 사회를 획득할 수 있었다. 우리들 관념의 세계도 그러한 구조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는 방향성, 혹은 인간을 움직이는 충동이라는 의미에서 말한다면 두 가지 방향성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이 500엔이 600엔으로, 또는 500엔이 무한대로 자기를 증식하는 그러한 방향이 행복이다라고 하는 충동을 언어 구조 속에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색제든 뭐든 사용한다. 그와 동시에 수입고기가 국산고기가 된다. 그것은 某생협만이 해온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500엔이 한정없이 500엔 이상의 것이 되려고 한다. 그것을 실현해가는 프로세스가 인간의 행복을 의미하는 그런 방향으로 우리를 몰아세우는 압력을 애초부터 우리의 언어구조로 갖고 있다. 즉 거품이란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올해에 구입한 토지가 내년이 되면 오른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부추겨왔다.
또 하나의 방향은 현실 속에 500엔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500엔이 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지만 500엔 이상의 것이 되려고 자기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고기가 되려는 방향을 항상 견지하는 것이다. 그러한 방향 외에는 참다운 인간의 풍요로움에 도달할 길이 없다고 하는 새로운 방향이 제안되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었으면 한다.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고기가 그 곳에 있다. 누군가가 본다. 그러면 고기가 <나는 고기다>라고 확실하게 말한다(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다. 그러나 고기는 언제부터 신호를 보냈던 것인가, 고기는 고기가 아니었던 것인가, 확실하게 고기는 고기임을 신호한다. 그러나 그 이전의 고기는 고기가 아니었던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예를 들면 아무도 가지 않는 깊은 계곡에 피었다지는 꽃이 신호였던 적이 있을까. ‘나는 꽃이다’ 라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오로지 꽃으로만 존재하는 그러한 운명을 타고난 꽃이 있을 것이다. 신호가 되기 전의 고기와 신호가 되어버린 고기와의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그 사이에 어떠한 운명의 전환이 초래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것은 단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않을까. 즉 대상화 되었다 혹은 신호화 되었다 혹은 보이고 말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보이고 말았다는 것과 대응관계로 <나는 고기다>라는 것을 신호하는 일이 발생한다. 보이고 만 결과로서 신호로서의 고기가 된다고 하는 프로세스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언어구조라고 하는 것은 돌이켜보면 여기(제1신호계)부터가 언어의 세계, 그 다음에 고기라고 하는 소리가 고기를 신호하는 세계가 있다(제2신호계). 그 다음에 고기가 500엔이 되고 마는 세계(제3신호계)가 있다. 이것이 삼층구조로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인간의 언어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두고 싶다.
현물(물적) 세계 |
언어(심적․관념) 세계 | ||
대상화 ․신호화 (언어화) 음화․언어화 數化․논리화(소외) | |||
고기 그 자체 |
신호로서의 고기 |
고기라고 하는 소리 |
상품으로서의 고기 |
0신호 |
제1신호계 |
제2신호계 |
제3신호계 |
대지로서의 조합원 |
조합원 |
조합원사무국(워커즈) |
직원사무국 |
(3) 「대지로서의 조합원」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대지로서의 조합원」이라는 것은 일반 조합원을 말한다. 그러나 일반 조합원이라는 것이 무내용적으로 말해지는 것(개념)에 비해서 「대지로서의 조합원」은 나에게 있어서 제1신호계 이전(0신호)의 것이다. 아직 이것은 그린코프 언어 세계에 들어와 있지 않다. 제1신호계로 있는 조합원(지구운영위원, 이사, 이사장 등의 역원이 된 조합원)은 그린코프라는 언어 세계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진 조합원 또는 자기표현으로서「나는 조합원이다」라고 신호를 보낸 조합원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합원은 신호화된 것만으로 「대지로서의 조합원」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먹어 보면 똑같은 맛이 난다.
여기에 조합원 사무국(제2신호계)이라는 것이 있고, 專從(직원)사무국이 있다. 직원 사무국이란 500엔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업에 대하여 확실하게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 있음으로 해서 직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극도로 빈곤하다.
지금까지의 생협운동은 여기 제1신호계와 여기 제3신호계를 주체로 전개되어 왔다. 조합원 사무국이 있지만 그 것이 있는 곳은 그린코프 외에는 없다. 지금까지의 생협운동이라는 것은 직원 사무국와 조합원이 주체로, 여기 제2신호계라고 하는 것이 없다. 따라서 500엔의 세계가 알몸의 조합원에게 위에서 직접 손을 대는 것과 같은 이미지로 생협이 만들어져 왔다. 1970년 전후에 태어난 생협운동이라는 것은 조합원을 또 하나의 주체로서 확실하게 등장시켰다. 그 이전의 생협에는 조합원이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 전후에 태어난 생협운동은 혁명적이었다. 예를 들면 1970년 전후에 지역 공동구입형 생협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지만, 그 이 전의 생협은 기본적으로 노동조합의 물자부와 같은 것으로 거기에 노동 조합원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생협 조합원은 없었다. 예를 들면 노동조합 대회에서 생협을 만들자고 결정해서, 노조원은 자동적으로 생협 조합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조합원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노동조합의 집행부로부터 생협 이사가 지명되고, 선출되고, 지금의 공중 낙하 단체처럼 누군가의 밥줄이 되는 그런 것과 매우 비슷한 구조였다. 지역의 공동구입형 생협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노동조합이 경영하는 점포이거나 생협이라는 하청 단체와 같은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 전후에 지역 공동구입형 생협이 탄생했다. 거기에는 명확하게 생협 조합원이 등장하였다. 이전의 이사회는 노동조합의 집행부와 그 주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기에 구색 맞추기 식으로 지역 사람도 이사가 되는 그러한 이사회였다. 그에 비해서 지역 공동구입형 생협이라는 것은 압도적으로 지역 아줌마들이 이사가 되었다. 조합원이 생협운동의 또 하나의 주체로서 등장했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혁명에 비길 만한 사건이었다. 그럼으로써 1970년 이 후 일본에서의 생협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실현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문제는 조합원(제1신호계)과 직원 사무국(제3신호계) 양자밖에 생협의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2신호계의 층(조합원사무국, 워커즈)이 또 하나의 주체로서 생협운동에 등장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그린코프의 앞날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4) 「워커즈형」에 대해서
덧붙여 이야기를 하자면, 인간의 노동에 대해 지금은 임노동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다. 사실 아기가 태어나면 대개 3-4시간 간격으로 젖을 먹여야 하는데 엄마는 그 일을 맞춰서 해나간다. 혹은 아이가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나면 간병을 한다. 그리고 육아와 가사일로 매일 싸움을 하는 것과 같은 노동이 인간 생활에 뿌리박고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종류의 노동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가장 먼저 나온 말이 섀도우워크(그림자노동, shadow work)인데 섀도우워크라는 말은 웬지 느낌이 나쁘다고 해서 최근에는 언페이드워크(지불되지 않는 노동, unpaid work)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콜럼부스처럼 그러한 종류의 노동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라고 하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 것은 처음부터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임노동의 관점에서 어떻게 재평가할까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섀도우워크 또는 언페이드워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임노동 중심주의이다. 그러한 종류의 노동이 없으면 인간의 생명은 지속되어질 수가 없다. 임노동으로는 절대 대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노동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은 어떤 의미에서 농업 혁명 이전에는 모두 그랬다. 그런 종류의 노동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원숭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한다. 그것을 노동이라고 말하는가. 주변에 있는 잎이라든가 열매를 먹고 있다. 그것은 다만 먹고 있을 따름이다. 생활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노동이 생활 속에 파묻혀 있던 시대가 있었다. 만일 땀을 흘리는 것과 같은 행위 전부를 노동이라고 한다면 씹는 것도 노동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산에 가서 산딸기를 따서 먹으면 그것을 노동이라고 하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먹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종류의 행위는 생활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생활로부터 나오는(외화하는) 프로세스가 농업혁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농업혁명을 통해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이 농업이라든가 직업인 것이다. 소위 교환이라든가 분업이 시작된다. 산딸기를 많이 따서 집으로 갖고 와서 먹는다 하여도 먹는다는 그 자체로 끝났다. 이것은 아직 생활 속에 포섭되어 있다. 그러나 산딸기를 많이 따서 갖고 와서 쌀과 교환했다면 거기서부터 그러한 행위는 생활로부터 외화하게 된다(모순이 된다). 그러한 종류의 노동전형이 농민(농업자)의 노동이다. 이 단계는 아직 노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생산물의 소유는 노동한 사람에게 귀속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산기슭에 도자기가마를 설치하고 도기를 굽고 있다. 점토를 반죽해서 매일 즐겁게 만들고 있다. 어쩌다 가마에 불을 넣을 때는 삼일 동안 밤새면서 술을 마셔가며 일을 한다. 그런 종류의 노동, 교환을 전제로 하는 노동, 분업으로서의 노동, 자기표현으로서의 노동이 태어났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노동하는 사람은 생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의 소유자이다. 아무개는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을 깨트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도기를 굽는다 하더라도 임노동자의 경우에 기계공장에서 나온 완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깨트리면 변상을 해야한다. ‘당신 것이 아니잖아, 깨부술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 농민의 노동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즐거운 것이다. 힘들다, 안힘들다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노동에 대해서도 임노동 중심주의자는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농민춘투’ 따위로 말한다. ‘농민춘투’ 등의 개념을 갖고 와서 농민의 노동을 임노동의 시선으로 판단한다. 여자들의 생활에 포섭된 노동에 대해서도 언페이드워크 등으로 말하면서 섀도우워크보다는 고상하다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다. 그것과 ‘농민춘투’ 따위로 말하는 사람은 같은 부류이다. 그러한 노동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임노동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세계, 오늘날의 세계에도, 가장 먼저 원시에도 존재했던, 생활에 포섭된 노동이라는 것이,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 생활에 포섭된 노동을 언페이드워크라 말하면서 임노동의 자리로 갖다 놓는다. 모든 것을 임노동의 방향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그리고 500엔을 600엔으로, 700엔으로 자기운동 해나가는 것이 역사의 진보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그것 자체는 멈출 도리가 없으며, 일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본은 그렇지 않으며 또 하나의 방향이 있다. 임노동이 농민이나 도예가의 경제화된 자기 표현으로서의 노동과 연대하고, 생활에 포섭된 노동, 혹은 생활 그 자체를 향해서 내려가는 방향이 있다. 생협운동은 필시 조합원의 생활, 워커즈 등의 경제화된 자기표현으로서의 노동, 그리고 직원들의 임노동, 이 삼자의 연대를 모색해가는 것이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워커즈 노동은 자기 표현으로서의 노동이다. 노동 그 자체에 대해서 기쁨으로 한다고 하는 그런 종류의 노동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노동이라는 것이 생협의 사무국 속에 어느 만큼 커다란 분량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조합원의 존재와 워커즈의 존재와 사무국의 존재가 각각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없을지이다.
그러한 구조를 만들지 않은 채, 그린코프가 21세기에 어떤 의미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린코프는 이번 총회의 기조총괄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곳과 비교하여 지금 상당히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0년 후에도 그럴 수 있을까, 만일 10년 후에도 직원사무국이 지금 그린코프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압도적으로 존재하고, 조합원 사무국이라는 형태의 워커즈가 아주 조그만 비중인 채로 10년 후를 맞이한다면, ‘예전에는 좋았는데, 예전에는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데...’ 라고 말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앞으로 조합원 사무국이 혹은 워커즈가 자기 표현으로서의 노동으로 그린코프 사무국 속에 크게 들어올 것이다. (들어오지 않으면 안된다).
매장은 워커즈가 맡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생업과 경쟁해서) 이기지는 않지만 지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사서비스 워커즈의 경우 그것은 경제활동으로서는 절대 성립되지 않는 세계다. 그러나 워커즈는 지금 그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매장이라는 영역에서는 쿠르메미나미쬬(*지명)점이 어떻게든 경영되고 있다. 앞으로 매장이라는 의미에서 어디와 경쟁하게 되는가. 다이에 (일본의 거대 유통업체)의 나카우치 씨는 올해 정월에 지방 로컬 체인과의 경합에서 다이에가 ‘졌다’고 말했다. 지방 로컬체인을 해체시키는 전략으로 다이에는 영업을 했지만 마침내 지방 로컬체인에 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지방 로컬체인에 진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만의 성을 갖고 싶어한다. 아내와 아이를 동원해서 가게를 열고 하루 18시간 일하는 식으로 유통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절대 무너질 수 없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사업을 한다. 정말로 24시간 일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경쟁에서는 다이에라는 시스템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따라서 그린코프가 매장을 생각하는 경우, 공급을 하는 것처럼 트럭 뒤에 가만히 서서 조합원에게 물건 가지러 오라고 하는 공무원 같은 딱딱한 태도로 일해서는 안된다. 일생협(日生協,닛세이쿄)이 점포를 만든다고 한다. 나는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계속 유통업계에 들어오는 개인들에게 이기지는 않겠지만 지지도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 쿠르메미나미쬬점이 거기까지 왔다. 앞으로 어떻게 효율화․시스템화해서 현장의 부담을 가볍게 해줄까라는 과제는 있지만 매장은 일단 그 수준까지 왔다.
배송(공급)은 어떻게 할까. 나는 ‘워커즈가 공급을 맡으면 뭐가 나쁜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영역도 워커즈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단지 워커즈가 배송(공급)에 등장하기 어려운 것은 점포의 경우에는 경영이 매장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경영을 워커즈한테 맡길 수 있다. 그런데 배송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경영으로서의 주체성을 어떤 식으로 워커즈에게 보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기술적으로 회계구분해서 명확하게 해두지 않으면 파트처럼 되어지고 만다.
파트처럼 되서는 안된다. 역시 자기표현으로서의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워커즈의 에너지가 있는 것이며, 언어의 부드러움이 존재한다. 그러한 워커즈가(회계구분의 문제 등을 해결해서) 배송의 영역까지 넓혀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직원은 어디로 가는가. 걱정 없다. 할 일은 산처럼 많다. 비율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지 직원을 그만두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좀 더 말하자면 세계경제는 붕괴한다. 그 결과 직장이라고 하는 것은 능력제로 바뀌어 간다. 능력주의로 바뀐다. 인간은 일생 자신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100%내는 일이란 없다. 역시 젊었을 때 한껏 능력을 발휘한 후 잘 안되는 사람도 있고, 나이가 들수록 능력이 발휘되는 사람 도 있다. 앞으로 사회는 그것을 전제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경우에만 고용한다는 것이다. 또는 지속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확률이 놓은 사람만을 고용하는 형태로, 직장은 500엔의 세계가 한층 강화되어질 것이다. 그것은 심하게 말하면 인간을 쓰고 버리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은 생산성이 나쁘니까 배제해 나간다. 앞으로 21세기는 그러한 경향들이 점점 강화되어질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면 능력주의가 최고라고 한다. 그러한 흐름에 대해서 그린코프는 어떠한 대안을 내놓는가. 그것은 그린코프가 「워커즈형」으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른다. 워커즈 노동이 그린코프의 사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분량, 비율을 가능하면 빨리 빠른 시기에 확대해 나간다. 그리고 그것을 자원으로 그린코프의 직장이 능력주의로 하이어라키화(관료주의화) 되어가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소득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면 완만하게 되어가는 것이다(워커즈노동과 임노동의 시간 단가가 평준화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인간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모습의 직장을 구성하고 유지해간다는 방향을, 그린코프가 대안으로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지 안할지는 워커즈가 존재하는 분량에 달려 있다. 나는 워커즈의 주체성을 기업 속에 살려 나가는 것은 좀처럼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반 기업이 반공동구입을 연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같은 시스템을 가동시켰더니 똑같이 기능했느냐 하면 결국 기능하지 않았다. 왜 그런가하면 기업의 영리의 논리로는 조합원의 주체성을 활성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워커즈의 주체성에 대해서 기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구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워커즈가 갖고 있는 주체성과 능력을 기업적인 의미에서 활성화시킨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그들은 할 것이다. 어떻든 우리 사무국 안에 그러한 워커즈의 새로운 주체성을 어느 정도 넓게 등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 대응 관계로 직원의 언어가 500엔을 파는 것이 아니고 고기를 판다고 하는 언어로 얼마만큼 부드러워질수 있는가가 있다. 따라서 500엔의 세계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500엔의 세계를 잊고 조합원과 놀고 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시 500엔의 세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지켜낼 수 있는 주체가 없으면 이 언어 세계는 것은 붕괴한다(그린코프는 파산한다). 그런 의미에서 직원 사무국은 없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없어지면 그린코프라고 하는 언어 세계는 붕괴한다. 따라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직원 사무국은 앞으로도 명확히 존재한다. 존재 방식으로 워커즈가 등장해오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의 능력을 충분히 살려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재미없는 500엔의 세계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21세기 그린코프가 의미있는 존재가 될지 아닐지는 본질적으로 지금은 조합원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새로운 동료인 워커즈를 얼마만큼의 속도로 우리 속에 참가하게 할 수 있을까에 달려있다. 그녀들이 새로운 주체성으로 등장한다면 그에 따라 직장이라는 말도 좀 더 부드럽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린코프도 반드시 변화될 것이다. 그린코프는 그 동안 여러 가지 문제로 고생해 왔지만 당면과제에 대해서는 대강 윤곽이 잡힐 것 같다. 따라서 10년 후에도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 10년 후에는 새로운 주체와 함께 이루어낸 10년이 있고,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는 방향성에 대해 그린코프연합과 회원 생협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문제 의식을 정리하고 우리의 장래를 서둘러 만들어가는데 좀 더 힘을 쏟으면 좋겠다. 이것이 그린코프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상황 인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