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향 건설에 몸바친 독립운동가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남도 정주(定州)읍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에 기독교측 민족대표로 활약한 남강은「내가 죽거든 몸뚱이를 땅에 묻지 말고 학생들이 만질 수 있도록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교에 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위대한 애국자이다.
YMCA와의 관계는 직접적으로는 남강선생이 창설한 정주 오산(五山)학교에다 학생YMCA를 조직하면서부터이고 간접적으로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 산농(汕農) 박승봉(朴勝鳳) 선생,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선생들과 민족운동을 벌인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먼저 선생의 생애를 보면, 가세가 너무 가난하여 11세부터 남의 집 사환노릇을 했으며, 16세부터 약 10년 간 행상과 상점을 폈다. 38세부터 약 5년 간은 무역상으로서 크게 성공을 했다. 1907년, 그러니까 남강선생이 44세 되던 해 우연히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을 만나 그의 감화로 신민회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또한 당시 영변(寧辺) 관찰사로 와있던 산농 박승봉 선생의 후원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농 선생의 추천으로 서울에서 많은 훌륭한 선생들을 데려다가 오산학교 교사로 삼음으로써 오산을 명문학교로 키웠다.
남강 선생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1910년, 그가 47세 때였다.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기독교인들은 희망을 오직 기독교에 두고 열심히 신앙운동을 벌이는 통에 남강 선생은 열렬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때부터 서울의 산농 선생을 비롯하여 좌옹 윤치호 선생, 월남 이상재 선생 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친우관계를 맺고 있었다.
1912년 49세 때에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좌옹 선생과 함께 6년 징역언도를 받아 옥고를 치루고 풀려나와 오산학교를 열심히 운영하는 동시에 교회 장로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였다. 서울에 있는 육당(六堂) 최남선씨로부터 연락이 와 올라가 보니 독립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강선생은 즉석에서 이에 찬성하고 곧 친우 산농(汕農) 선생 집에서 월남선생 등과 함께 의논을 했다. 이때부터 산농 선생의 집은 비밀 집회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남강 선생의 뛰어난 지도력은 3.1운동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첫째로, 육당선생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을 수정, 결정하는 일이었다. 즉 위창(葦創) 오세창(吳世昌), 월남 이상재, 산농 박승봉, 남강 이승훈 등 네 사람이 산농선생 집에서 이 기초안을 최종적으로 수정, 결정했던 것이다.
둘째로, 3.1운동을 천도교와 기독교 합동으로 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즉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으로 해야만 성공할 것을 확신하고 추진하고 있었으나 기독교측 대표들의 반대에 부딪쳤던 것이다. 합동문제를 논의하는 비밀회의에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양전백, 이명룡 등 평북지방 대표들은 거리상 관계로 전권을 남강선생에게 도장까지 맡긴 채 참석하지 못하고 다만 오화영, 박희도, 정춘수, 이필주, 이갑성, 김창준, 최성모 그밖에 33인 대표가 아닌 함태영, 현순, 오기선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정춘수 같은 사람은 「천도교와 합동하는 것은 불가하다’…우리는 기독교 목사의 신분이므로 감정으로써 일을 하면 안된다…」하고 반대했으나 오화영 목사와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이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2.8독립선언에 있어서도 남강선생의 공헌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선언문의 서명자 11명 중 이광수(李光洙) 씨와 서 춘(徐 椿) 씨는 남강선생을 존경하는 사람들이었다. 즉 이광수는 동고향 사람인 동시에 오산학교 교사로 있던 사람이고, 서춘은 오산학교 학생Y 회원이며 그 졸업생이었다.
남강 선생은 3.1운동으로 3년 징역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석방된 뒤에는 오로지 교육과 언론과 이상향 건설에 생애를 바쳤다.
교육은 물론 오산학교를 재건 확장하는 일이었고, 언론이란 1924년 동아일보 사장이 된 일이었으며, 이상향이란 곧 오산학교, 용동마을, 교회 등을 바탕으로 하여 인근 주민들의 정신계몽, 산업진흥, 애국심 고취를 하는 일이었다.
남강 선생은 이 나라에서 가난을 몰아내기 위하여 산업진흥운동을 했다. 그리고 사회참여를 꺼리는 목사들에 대해서는 「나라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천당에 갈 수 있소? 이 백성들이 모두 지옥같은 데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목사들만이 천당에 가겠소?」했다.
1930년 5월 8일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선생은 「내가 죽거든 학생들을 위하여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라」고 유언을 했다.
우리 정부는 남강 선생에게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중장을 드렸다.
등걸
-1981.4.1.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