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와 평화의 신학1)


우리 시대의 평화에 대한 신학적 성찰 :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들

나는 ‘평화’의 문제에 있어서 성서-신학적 성찰을 시도할 때마다, 성서의 두 구절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나는 이 두 구절이 ‘평화’에 대한 성찰이 피상적인 것이 되기 쉽고, 지나치게 이론적이며 실제 삶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구절 중 첫째는 예레미야 8장에 있는데, 이 구절에서 예언자는 당대의 지도층에 대해 격렬하게(vehemently) 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당대의 지도자들이 “그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피상적으로만) 치료해주면서 평화가 없는 때에도 ‘평화’, ‘평화로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렘8:11;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언자는 종교 지도자들도 비판하는데, 종교지도자들이 사람들의 불안함을 누그러뜨리고 그들의 국가가 나아가는 멸망의 길을 은폐하려고 평화라는 말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 지도자들은 국가를 괴롭히는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 현재 겪고 있는 징후들만을 다루는 고육책(苦肉策)만을 제안합니다.

두 번째 구절은 신약에서 나오는데, 이 구절에서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 있을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서, 예루살렘(“평화의 도성”을 의미합니다) 도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고 말했습니다. “ 만약 너희가, 심지어 (바리새인인) 너희조차 오늘날 평화를 만드는 일에 대해 깨닫기만 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이제 평화를 만드는 그러한 일들은 너희 눈에 숨겨졌다.(눅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여기에 나타난 경고는 우리가 실제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고, 때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평화를 추구할 수는 있지만, ‘우리 시대의 평화를 만드는 일“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이번 강연을 이 두 구절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성서에 나타난 평화의 의미

(The meaning of peace in the Scriptures)


우리는 대개 ‘평화’라고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인 샬롬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샬롬은 단순히 갈등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행복(well-being)'의 상태, 또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대로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샬롬에 대한 이러한 포괄적 이해는 언제나 히브리 성서의 모든 종말론적(eschatological) 이미지에 나타납니다.


이사야는 샬롬의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눕고,

표범이 어린 아이와 함께 누우며,

소와 사자, 그리고 여러 가축들이 함께 하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이끈다.“


“그들은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를 입히거나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이,

마치 바다가 물로 뒤덮이는 것과 같이

주님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사11:6, 9)

미가의 환상에서는,

“그들은 자기들의 칼을 부수어 쟁기의 날로 만들 것이고,

그 창을 부수어 낫을 만들 것이다.

(한) 나라는 (다른) 나라에 대하여 칼을 들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편히 쉴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다.“(미4:3-4)


좀더 자세히 보면, 이 친숙한 성서의 구절들은 샬롬과 관련하여 세 가지 부분을 강조합니다.


- 인간 존재 사이에, 그리고 인류와 자연 사이에 있는 모든 형태의 대립(enmity)과 소외를 극복함.

- 모든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평화롭게 앉아 쉴 수 있는 정의의 건설.

- 폭력의 두려움이 없게 함.


정의와 평화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논의는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이미 여러 차례 있었고, 1990년에는 여기 서울에서 개최된 JPIC 대회(정의와 평화, 그리고 창조의 보전에 대한 대회)에서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한 집단이나 다른 집단을 공정하게 대하시를 거부하거나 다른 집단에 의해 한 집단이 지배되거나 억압받는 데에 까지 직접적으로 우리 세계의 국내적, 국제적 갈등을 추적할 수 있다. 부정의의 만연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문화적 영역까지 이르지만, 어쨌든 어떤 집단을 공정하게 대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갈등, 폭력 그리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전쟁에 대한 처방전(recipe)이 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의 대다수의 국내적 갈등과 중동, 전(前) 유고슬라비아와 북아일랜드 등지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우리가


1) Wesley Ariarajah, 역자 : 유경동(감리교신학대, 기독교윤리학교수)

* 필자는 드류신학교, 에큐메니칼 신학교수이다. 위 글은 2006년 5월 2일~4일에 {한국기독교장로회}등이 개최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에큐메니칼 국제 심포지움]의 발표문으로 참고자료로 실었습니다.


오늘의 세계와 평화의 신학(Wesley Ariarajah).hwp

센터 출판물, "YMCA 생명평화운동 구상"에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