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시대, 생명과 평화의 선교1)



들어가는 말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인류가 역사에서 배울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역사를 학문으로 최초로 연구한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큰 충격이다. 왜 헤로도토스는 그런 말을 했을까.

문자기록으로 남아있는 인류의 역사는 3천5백21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전쟁이 한번도 없었던 해는 전체의 고작 8%인 286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나머지 92%인 3천2백35년 동안 인류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는 말이다. 인류의 역사가 전쟁으로 날이 새서 전쟁으로 날이 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인류는 평화의 시기를 살다가 가끔 전쟁을 벌이는 게 아니라, 늘 전쟁의 시기를 살다가 가끔 평화의 순간을 맞이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역사관이다.

다른 어떤 학자는 기원전 3천년부터 지난 19세기까지 약 5천년 동안 인류가 전쟁에서 살상한 인명수를 추정해 보았다. 대략 3천만 명이 나왔다고 한다. 한 세기인 1백년에 약 60만 명씩 죽인 꼴이 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지난 20세기 단 1백 년 동안 인류가 전쟁을 통해 살상한 인명이 무려 1억 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가공할 군사 과학기술 덕분이다. 이런 통계들을 접하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왜 헤로도토스가 인류가 역사에서 하나도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절로 이해가 한다. 


평화와 샬롬


평화는 인류의 중대한 관심사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심사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산에 올라가 이렇게 가르치셨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children of God - 마태 5:9).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여러 가지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를 받는 복, 위로를 받는 복, 땅을 차지하는 복, 배부른 복, 자비함을 입는 복, 하나님을 보는 복 등. 그런데 필자는 이 복들 중에 가장 큰 복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선포하신 복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다른 모든 복들을 다 따라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예수께서는 같은 복음서 몇 장 뒤에 가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다른 복음서 안에서는 한 술 더 뜨신다.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에게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누가 12:51-53)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어디에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시고, 다른 데서는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고 불을 지르러 오셨다니...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예수께서 한 입으로 두 말씀을 하신 것일까? 아니면 마태와 누가가 예수를 말씀을 잘못 기록한 것일까?

이 수수께끼 같은 예수의 ‘두’ 말씀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성서에서, 특히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서에서 평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 성서에서 평화는 ‘샬롬’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샬롬은 특별한 용어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매일의 인사말이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밤낮으로 전쟁에 시달리다보니 그들에게 평화보다 값진 것이 어디 있었겠는가? 한 나라의 인사말을 뜯어보면 그 나라 국민의 역사와 삶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과거 한국에서의 인사말은 무엇이었는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혹은 “진지 잡수셨습니까?”이었다. 얼마나 밤새 안녕하지 못한 일이 많았으면, 얼마나 밥 굶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그것들이 인사말이 되었겠는가. 샬롬, 그 성서의 용어는 이스라엘의 역사 한 가운데서 간절하게 피어났던 소망의 언어였던 것이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샬롬은 오늘날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평화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사용하는 평화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샬롬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깊다. 비록 전쟁이 없는 평시라 하더라도, 만약 전쟁과 갈등의 불씨가 되는 사회적 불의와 억압이 남아 있다면, 성서는 그것을 결코 샬롬이라 부르지 않는다. 샬롬은 첫째 ‘사회적 정의’를 강조한다. 정의의 바탕 위에 세워진 평화가 샬롬이다. 그래서 요즘 영어권에서는 정의를 뜻하는 justice와 평화를 뜻하는 peace를 한 단어로 합쳐 ‘justpeace'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특별히 돌보시는 야훼 하나님은 ‘정의에 기초한 평화’(peace based on justice)를 강조하신다. 둘째로 샬롬은 사회 전체의 ‘온전성’(integrity)을 강조한다. 샬롬의 반대말은 ‘쉐다’인데, 그 뜻은 무엇이 ‘깨지다’, ‘쪼개지다’, ‘상하다’이다. 만약 사회 구성원의 단 한 명이라도 불의와 억압과 고통으로 깨지거나 쪼개지거나 상하면, 설사 나머지 사회 구성원이 다 행복하더라도 성서는 그것을 샬롬이라 부르지 않는다. 저 끔찍했던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가 그것을 증언해 주고 있지 않는가.

필자는 지난해 가을학기 영남신학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아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거기서 안심역까지 대구 지하철을 이용한 적이 있다. 그 때 코가 예민한 필자는 대구 지하철 중앙역 쪽에서 불어오던 그 참혹했던 사건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필자가 뉴욕 맨해튼에서 유학할 당시 911 사태로 무너졌던 그 쌍둥이 건물더미에서 불어오던 것과 같은 냄새를... 57세의 한 남자가 IMF 이후 어려워진 삶을 비관하다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고 휘발유를 뿌려 지른 불에 아무 죄도 없는 수 백 명의 고귀한 생명이 그렇게 덧없이 죽어가지 않았던가. 한 개인이 깨지고 쪼개지고 상하니 온 사회의 평화가 깨졌다. 샬롬이 깨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남자가 정신병자여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에 대한 사회적 원한으로 방화범죄가 꾸준히 증가해 왔다고 한다. (사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중산층은 몰락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경제 신자유주의의 경제재편의 골자이다.) 눈에 띄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 상류층의 범죄는 17%나 줄어든 반면, 하류층의 범죄가 수직 상승했는데, 그 범죄자들의 연령이 청년대가 아니라 40-60대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렇게 그 57세의 대구 지하철 방화범은 ‘만들어’졌다. 사회적 정의가 무너져 샬롬이 깨진 한 사회 속에서 이미 그 끔찍한 범죄는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이태수는 ‘이제는 촛불을 밝힐 때’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누가 이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랴. 이 경악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으랴. 우리는 사랑으로 따스하게 끌어안지 못하고 나눔과 베풂보다는 차지하고 빼앗았으며, 위로 아래로 자기밖에 몰랐다. 재앙의 불씨를 키웠다.” 그랬다. 우리는 재앙의 불씨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 전체가 온전하지 않으면 성서는 그것을 샬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성서의 예언자들은 그것을 ‘거짓 평화’라고 질타했다.


샬롬이 깨진 이 ‘시대의 징조들’


1) 장윤재,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한국YMCA전국연맹 대학YMCA특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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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 출판물 "생명평화운동 구상"에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