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해석의 역사와 오늘의 성서읽기1)
오늘 한국교회의 성경공부는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이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해 나가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QT라는 명상의 방법을 통하여 본문에 과도한 뜻을 투여하다보니 본래 그 말씀에 그런 뜻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확대되기도 하고 다른 뜻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마치 뼈다귀를 삶아 재탕 삼탕 하듯이 본문의 구절에서 너무 많은 메시지를 꺼내려 함으로 나중에는 다른 뜻을 가진 본문도 모두 같아지고 결국은 자신의 생각을 반복할 뿐이다. 엉뚱하게 다른 본문도 모두 자기식으로 휘어 결국은 모두가 같은 본문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 큐티식 성서연구의 단점이라 하겠다.
QT에 의한 성서연구는 우리의 생활 깊숙히 성서 본문을 접근시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성서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메시지는 적어도 객관적이고 그렇게 해석하기에 타당한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 본문의 메시지가 주는 올바른 방향을 잡고 명상을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성서해석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우리 시대의 성서읽기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까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영적성서해석의 시대
알레고리(Allegory)
유형론(Typology)
고대 로마 및 중세 유럽시대에는 소위 ‘영적인 깨달음’이 지배적인 해석 방법이 되었다. 이것은 다른말로 ‘알레고리적 성서해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알레고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소재를 해석자의 상황이나 의도에 병치시켜 나감으로 비유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유명한 교부 유스티누수(Justinus)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라는 본문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 즉 교회를 가르키고 여리고는 이방의 땅을 말함으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다’는 것은 교회에서 벗어나 타락한 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고 이렇게 신자들이 교회에서 세상으로 향하게 될 때, 뜻하지 않은 강도를 만나게 된다는 그럴듯한 해석을 했다.
이런 해석은 계속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 그가 말에서 내렸다는 것은 성육신, 그가 강도만남 사람을 맡겼다는 여관은 교회, ‘내가 다시 오겠다’고 한 것은 재림을 의미한다고 하나하나 대립시켜 나간다.
여기서 예루살렘과 여리고라는 것은 단순한 지명이지 그것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비유의 소재들 모두에 해석자의 의도를 집어넣음으로써 모호하던 비유의 뜻은 명쾌하고 분명해지는 듯이 보인다. 이런 매력 때문에 알레고리 해석은 소위 ‘영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오늘 날 까지도 많은 성서해석자들에게 애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중대한 단점이 있는데 결국은 자신의 세계를 성서 안에 투입하고 그를 또 다시 성서의 권위를 빌어 마치 성서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전달해 나가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하고 본인의 생각이 자꾸 강화되므로 고집적인 자아를 형성하기 쉽게 된다. 이것은 성서해석에 있어서 중대한 방법론적 오류이다. 위에 든 예도 그 해석을 자세히 보면 모양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지만 나중에 해석은 사도신조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해석자가 사도신조의 세계 안에 있기에 비유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유형론 역시 흔하게 쓰는 성서해석의 방법인데 예를 들면, 마태복음은 예수를 모세유형에 맞추어 소개하고 있다. 예수 출생시 어린아이들이 희생되었듯이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헤롯의 어린이 학살이 있었고, 모세가 에집트의 파라오의 딸에게 피신했듯이 예수는 에집트로 피신을 가며, 모세가 본격적인 활동전에 40년을 광야에서 생활한 것과 같이 예수도 공생애 전에 40일간의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었듯이 예수도 산상에서 “옛 사람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고 옛 계명과 하나하나 대조하며 새계명을 주신다. 예수는 여기서 모세유형에 맞추어 소개되고 있다.이런 것이 대표적인 유형론이다. 알레고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대조하는 것이라면 유형론은 그 단어들이 진행되는 유형자체의 대조이다.
유형론이나 알레고리 모두가 꼭 그렇게 해석되어야하는 논리적 당위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쉽게 비유적 연상작용에 의하여 떠오르는 대로 꿰어 맞추기 식의 해석이 될 수 있는 오류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험은 성서가 의도하던 말씀 자체는 사라지고, 그 비유의 껍데기만을 빌어 해석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의도만을 절대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성서해석의 방법은 구체적인 역사적 삶을 외면한 관념론적 성서해석의 극치이다. 이런 방법은 해석자의 직관에 의해서 해석되기 때문에 해당본문에 대한 해석은 해석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다. 이 때 해석된 것 가운데 옳은 해석을 보증하는 것은 결국 해석자의 권위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언제나 사회적 강자에 의해서 권위가 부여되었고 엄격히 그 해석 자체가 통제되었다. 교권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교부들에게 이 해석의 특권적 권위가 부여되었고 평신도들에게는 엄격히 금기사항이었다. 성서 자체를 번역하는 것도 허락치 않았고 라틴어로만 읽을 수 있도록 엄격히 금기되었다가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독일어 번역 성경이 나오게 된다. 이 때의 영적해석은 언제나 지배자의 이익수호를 위해 복무하게 되었다.
합리주의적 성서해석
양식비평(Form Criticism)
전승사비평(Tradio-Historical Criticism)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
사본비평(Textual Criticism)
종교사적 비평(종교사학파)
18세기 이후 이런 인간의 영적 판단의 오류를 넘어 좀더 객관적인 방법으로 성서를 이해하는 다양한 과학적 방법들이 모색되게 되었다. 본문과 본문을 대조하여 분석, 비판하여 연구하는 방법들을 통해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과학적인 성서해석의 방법들이 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인해 성서는 객관적인 해석의 길을 열 수 있는 도구들을 얻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성서신학이란 새로운 학문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성서를 연구하는 방대한 저작들이 나오게 되었고 이는 성서자체의 본문들의 비교 연구 뿐만이 아니고, 고대근동의 다양한 문화권의 자료들 또는 성서사본들간의 연구 비교등 다양한 측면으로 비평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로써 과거 시대의 전근대적 잔재인 ‘영적 깨달음’은 교권의 부당한 권위에서 근거한 것임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되고, 그 대체물로 합리주의적 세계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의 전제는 ‘성서는 인간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구체적인 역사과정에서 던진 신앙고백들을 모아놓은 것이 성서라는 말이다. 이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 역사환경과 문화적, 사회적 조건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의 목소리로 성육신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서의 그때 거기서의 메시지는 역사의 제약이라는 한계를 통하여 표출된 것이기에 오늘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시대에는 우리의 언어로 다시 ‘성육신’하지 않으면 성서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질 수 없다. 따라서 그때 거기에서의 성서의 저류를 꿰뚫고 있는 맥, 즉 기본정신을 찾아낼 때라야지만 우리의 언어로 성서의 메시지를 ‘성육신’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영적해석의 시대에는 이 공백을 메우는 일에 성직자 귀족의 영감이 동원되었다고 비판하고 합리주의 시대에는 객관적이며 비 당파적 해석방법이라는 확신에 차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근대이후에 과학의 발전과 교육의 확대로 인해 광범위하게 확대된 지식계층의 또 다른 이해관계를 전제하는 한계를 가졌다는 것이밝혀졌다. 이러한 소위 ‘합리주의적 세계관’은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한 부르조와 계급(자본가 계급)의 세계관에 다름 아니며, 그 세계관의 산물이 지식계층의 고도의 학술적 작업인 역사-비평적 방법이었다는 인식이 일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부르조와 계급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신앙관을 재창조할 뿐이라는 것이다.
최근의 성서해석
사회학적-인류학적 성서해석
신문학비평(구조주의 비평, 정경비평방법)
민중에 의한 성서읽기
‘민중에 의한 성서읽기’라는 것은 그때 거기의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여기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솔렌티나메 농민들의 성서읽기 “말씀이 우리와 함께”(분도, 1985)와 이동철이 정리한 “짓눌러도 할렐루야”(청사출판사, 1988)가 그 실례이다. 이것은 방법상 알레고리적 성서해석과 유사하나 근본적인 차이는 알레고리적 성서해석의 지금 여기는 지배층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임에 비해 ‘민중에 의한 성서읽기’의 지금 여기는 바로 민중의 현실인식, 민중의 경험과 사회적 실천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민중의 관점으로 보는 사회경제사적 성서읽기
이것은 그동안 성서신학의 발전된 방법론등을 사용하여 민중의 입장에 서서 성서를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때 거기에 관한 역사적 질문을 통해서 왜곡된 성서해석을 낳은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며 지배계층에 의해 왜곡되거나 오염되지 않은 민중의 신앙을 재구성하게 된다. 이것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를 역으로 비판해야 하기 때문에 이 작업은 일정한 지적인 훈련을 거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으며 역사비평적, 사회-경제사적 연구가 적용된다.
여기서는 성서를 단순한 문학적 산물로 보거나 문헌학적인 관점으로 보지 않고 사회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함으로 당신의 민중의 사회상을 재구성하여 그 다양한 사회의 계급적 실체들 간에 맞서는 이해관계 안에서 야훼신앙, 예수신앙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민중에 의한 성서읽기는 직접 민중에 의해서 해석된다는 점, 민중의 경험과 상상력을 근거로하여 성서가 해석된다는 점이 장점이기는 하나, 여기서는 이 성서읽기의 주체가 지배적인 계급이 왜곡시킨 성서해석에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커다란 혼란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런데 비해 사회경제사적 성서읽기는 성서 안에 채색되어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비평해서 제거하고 민중의 신앙을 찾아내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즉 그때 거기에서의 이데올로기의 왜곡이 없는 이스라엘의 실천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시대마다 성서해석이 객관성을 띠고 저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올바로 찾아내었다는 확신 가운데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볼 때 그것은 그 시대에 지배적인 권력을 쥔 계층들의 이익을 하나님의 뜻과 객관성,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권위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해석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해관계나 입장을 초월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느 헤게모니를 쥔 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성서 읽기가 아니고 가장 보편적인 대중인 민중(교회 안에서는 평신도)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올바른 성서읽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 자신이 히브리 노예민들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노예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에집트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주시며 또한 사회 안에서 균형이 기울었을 때, 자신을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시면서 “누구든지 그들을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쳐서 고아와 과부가 되게 하겠다”며 스스로를 약자들의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시는 성서의 하나님의 모습과도 일치할 것이다.
1) 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목사, 전 강남향린교회 목사, 2004년 간사학교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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