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YMCA 목적문을 다시 생각한다1)



(I)

한국YMCA전국연맹 90주년을 맞이하면서 지난 한국YMCA 100년을 회고할 때 크게 세 가지로 시대적 구분이 가능하다.

그 첫째는 윤치호의 미국유학후의 귀국(1887년)을 계기로 시작된 한국Y운동이 한국 근세사의 개화운동과의 접목에서 반식민 운동이 끝나는 1945년까지의 영광의 제 1기, 두 번째는 해방 후의 혼란, 나라의 분단, 지도이념의 상실 등으로 한국Y운동의 혼돈과 방향 상실의 고통스런 시기였던 1970년도 초기까지의 제 2기로 대략 가늠해 보며, 제 3기는 한국사회가 극도의 반공 군사독재시대 속에서 헤매면서도 그 운동의 정체성과 에큐메니칼 운동정신을 되찾아 가면서 한국Y목적문을 제정한 1975년부터 오늘에 이르는 시대로 구분해 본다.

이런 시대의 흐름속에서 오늘의 주요관점은 제 3기의 시대 속에서 우리 Y운동의 정체성과 운동성의 재검토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우선 한국Y가 목적문 채택에 이르기까지에는 국내외의 YMCA가 가졌던 위기의식이 전제된다. 

그 첫째는 세계 Y 전체가 송두리째 느낀 정체성의 위기이다. 우리가 주지하는 바대로 세계YMCA는 1855년에 YMCA 파리기초선언을 채택하면서 그 후에 불 붙기 시작한 세계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한 신학적 틀과 운동의 방향을 제시함으로 이는 그 후에 조직적인 차원에서 통합된 에큐메니칼운동(WCC)의 모델이 되었고 또 그 주요지도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1955년에 이르러 세계 각국의 YMCA들은 주로 지역사회중심 및 가족중심의 미국YMCA로 크게 변화되면서 YMCA 고유의 평신도 신학과 에큐메니칼 정신은 급속도로 상실되어 갔다.  YMCA 기초선언채택 100주년을 맞아 깊은 성찰을 할 때 YMCA의 조직적 외연은 엄청나게 성장했고, 세계 곳곳에 YMCA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그 프로그램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는 만큼의 수천가지로 증폭되어 갔으나 다른면에서 볼때, YMCA의 중심 주체성이 무엇이냐를 합의하는데는 실패하기에 이른다.

YMCA 기초선언도 100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새 시대에 걸맞는 YMCA의 새 기초선언이 필요하다고 느낀 세계Y는 몇 번에 걸친 새 선언 기초와 채택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대신 캄팔라 원칙만을 채택한다.  그 실패의 최대 원인은 이미 다양화 해버린 Y 프로그램의 신학적 기초와 통합기능을 상실한데 연유한다. 그리고 세계 Y 각국이 스스로의 특성에 맞추어서 새로운 Y 기초선언을 채택하기를 권고 했다.

이같은 권고를 받은 당시 한국YMCA의 상황이란 새삼 재론의 여지도 없이 그 방향 및 목적도 기독교적 정체성도 없이 떠다니는 “기독교적인 하나의 단체” 에 불과했다. 그리고 닥쳐온 권위주의적 유신정치문화 속에서의 생존논리만에 매달려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청년운동, 대학생운동도 없는 하나의 중간치기 사업체로 굴러가고 있었다.

이같은 정체성 위기 속에서 발족된 것이 YMCA 연맹의 “목적과 사업”을 생각하는 기구를 신설하게 된 배경이다.  그 목적은 ① 한국YMCA운동이 지닌 에큐메니칼운동성의 회복 ② 반봉건 반식민의 시대정신을 회복하여 새로운 기독교사회운동의 정체성 회복 ③ 다양하게 전개되어 가는 각종 프로그램을 시대적 에큐메니칼정신으로 통합 하려는데 있었다. 그리고 이 회의를 매년 개최하면서 잊어버린 한국Y운동을 되찾는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모임에는 매년 20-30명 정도의 기독교계의 운동가, 신학자, 기독교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은 학자들 그리고 Y 실무자들의 일부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 모임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Open Forum이었다.

하지만 우려한 바대로 시청년회의 일부에서는 Y의 이사장들과 이사들을 제외한 참가자들이 모여 현재의 Y 체계를 전복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격렬한 반발이 있었고 또 이해를 구하여 참석하게 하였으나 모임 도중에 퇴장하고 돌아가 버리는 해프닝도 있었다.

하지만 이 회의는 매년 그 비중이 높아져 갔으며 의식있는 실무자들과 신학자들의 지지율이 계속 늘어나 결국은 긍정적인 평가를 갖게 되었다.


(II)

특히 목적과 사업위원회는 그 이듬해에 드디어 한국YMCA 목적문의 기초문안을 채택했고 그 해의 연맹 전국대회는 진통 끝에 이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그 쟁점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 첫째는 “역사적 책임의식을 계발하고”에 있었고 두 번째는 “사랑과 정의”를 위하여 일하며 이를 통해 “민중의 복지 증진”과 “새 문화 창조”를 지향한다는 대목이었다.

당시의 연맹 이사장은 전 국방부 차관출신으로서 본인의 사전동의 없이 이같은 일을 진행시키는 연맹총무의 태도가 우선적으로 싫었고 그 다음으로는 그 당시의 정부가 싫어하는 “역사의식” “정의” “민중” “새문화 창조” 등등의 표현이었는데, 이미 좋은 표현의 세계 YMCA 파리기준을 두고 이같은 쟁점이 되는 단어들로 선량한 Y 회원들을 선동하느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새 시대를 호흡하기를 바라는 그 대세를 꺾지는 못하였고 결국은  1976년 4월 1일 연맹이사장 본인께서 사회를 보았던 그 전국대회에서 만장일치로 ‘한국 YMCA 목적문’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이 자랑스러운 한국YMCA의 목적문이 단지 연맹 이사장과 젊은 연맹총무의 기 싸움으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한국YMCA 초창기의 영광스러운 역사의 토양속에 그리고 담겨있던 잠재성이 큰 원인이 되었다. 

한국Y 역사는 연맹이 발행한 ‘한국YMCA운동사’ 에서 그 저자 김천배가 밝히듯이 한국Y의 시작은 유교정신이 쇠퇴하고 새로 태동하기 시작한 개화의 물결이 한국과 바로 그 당시의 태동하기 시작한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물결이 서로 부딪히면서 YMCA운동의 태동이 이루어진 절묘한 역사적 일치가 곧 한국Y운동의 초대 정신이었다.

여기에는 다분히 당시의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새로운 나라의 지도이념을 찾으려던 당시의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이상재 등)이 고스란히 YMCA로 옮겨온 행운도 곁들인다.

이같은 초대정신은 해방후 나라의 분단과 동란, 정치혼란 및 군사독재로 이어지면서도 한국Y 역사의 잠재력 속 깊이에서 잠들고 있다가 ‘목적과 사업연구위원회’ 라는 기구를 통해 그 정체성을 재발굴 한데 불과하다.  그리고 한국Y 목적문은 어디까지나 파리기초선언의 형식과 그 신학적 틀안에서 재창조 된 것이다.

목적과 사업연구위원회는 제주도에서 가졌던 그 첫 번째 회의를 통하여 한국Y의 역사적, 신학적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고 그 후 소위원회가 일년 동안 준비하고 토론한 후 몇몇의 기초위원을 선정했는데, 우리는 그 당시의 기초위원장 현영학(이대 기독교학과 교수)을 기억해야 한다.


(III)

한국Y 목적문을 통하여 우리는 그 후 무슨 소득을 얻었는가?


한국YMCA는 그 초창기 역사에 있어 한국Y의 조직적 발전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의 개신교 에큐메니칼 운동 및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창설과 발전에도 기여한다.  특히 여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윤치호, 이승만, 신흥우는 모두가 평신도 지도자로서 교파적 기독교운동의 발전에 제동력을 걸었고 또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행동에 모범을 보였다.

그런데 해방 후에 들어온 북미YMCA의 협동총무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가정중심의 Y 프로그램, 영.지.체의 Y 프로그램을 보급시키면서 당시 한국사회에는 아직까지 형성이 되지 못한 중산층 중심의 Y 운동 그리고 건전한 시민육성을 전개하려 했으니 거기에서 힘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한국Y목적문은 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선교신학의 틀 속에서 민중과 정의를 길잡이로 한 운동으로 재규정해 주었고 또 일감들을 제공해 주었다. 오늘의 전교조의 전신인 Y중등교사협의회 운동이 그러했고 오늘의 전국농민회도 Y가 양성해 낸 지도력이었다.

이같은 운동정신은 종래의 영.지.체로 설명되는 YMCA의 상징인 삼각형을 새로운 역사의식과 운동론으로 설명하는 운동담지체(Constituency)운동이념 및 운동조직체로 옮겨가면서 Y의 Institution과 Movement을 대조해 가는 문제의식 등으로 젊은 간사들에 대한 의식개혁들도 바뀌어 갔다.

한국Y 목적문 제정후 30년간 이 목적문은 그 역사적 사명을 잘 감당했으며 한국Y운동에 대한 지표제공과 동력공급의 사명을 다했다고 본다.  그런데 30년이 지났고 새 시대가 왔으니 또 새 목적문이 필요할까.  나는 1996년 봄에 YMCA 운동 실무자를 퇴임하기 직전의 한국Y 연맹 소식지에 기고하면서 이미 경종을 울린 바 있다. 그 초점은 다음과 같다.

  

“한국Y의 오늘<당시>은 퍽 위험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곧 우리에게 전파해준 미국식 YMCA의 말기적 징후와 너무나 흡사하다. Y 프로그램과 지도력 확보는 아기스포츠단 한조를 모집해 낼 실무능력과 그 임대시설을 갖추어 줄 수 있는 지방지도력만 있으면 새로운 Y가 하나씩 탄생하고 그 운영체의 확대만으로 성장한 후 변혁이나 신학적인 훈련도 없다. 이것은 한국Y운동의 계승자라기 보다는 기독교라는 명칭을 붙인 사업체에 불과하다...” 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다행히 오늘은 민주화된 사회이며 그 속에서 시민사회의 성장도 눈부시다. 당연히 그 속에 자리잡은 YMCA도 시대적인 기운에 따라 그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이미 시민사회의 일각이 드러내기 시작한 영합주의(포퓰리스트)적 체질과 기독교적 정체성에서 벗어난 정치참여를 통한 자극적 행동들은 적어도 우리들 기독교 청년회운동 유산과는 무관하다.

오늘과 같은 글로벌 시대의 시민운동단체가 추구해가야 할 공공성(公共性)의 문제와 좌표설정은 분명히 새로운 규범과 강령이 필요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정체성 점검을 위한 작업에는 그것에 앞서는 철저한 자기비판과 신학적 성찰이 앞서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지난날의 민족주의에서 해방 되는 보편적 가치체계로 연결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이념을 모색해 가기 위한 지속적인 기초작업이 앞서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1) 강문규, 한국YMCA전국연맹 전사무총장, 한국YMCA 소식 187호(2003. 10-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