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현재 생태유아공동체에서 일하는 윤호창 간사님이 서울YMCA에 있을때 작성한 글입니다.



1970▪80년대 YMCA농촌운동의 전개와 성격

윤호창

서울YMCA

 

 

1. 해방이후의 YMCA와 농촌운동의 탄생 배경

 

1930년대 이후 YMCA의 모든 사업은 일제의 간섭과 통제아래 놓이게 되고, 1938년 조선기독교청년회는 일본기독교청년회 조선연합회로 편입되었다. 그나마 서울YMCA만 명맥을 유지했을 뿐, 연합회에 가맹한 것으로 되어 있는 10개 지역YMCA와 11개 학생청년회도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서울YMCA마저 41년에 제정된 ‘종교단체법’에 따라 조선기독교청년회는 일본기독교청년회의 직할아래 놓여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서울YMCA)는 경성기독교청년회(일본인들의 YMCA)의 종로지회가 되어 사실상 활동 중단기에 들어간다.

해방이후에 YMCA는 재건운동을 벌여 지역 YMCA들이 속속 구성되기 시작했으나, 5․60년대를 거치면서도 운동체로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그러다 ‘전환’이라는 명명되는 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YMCA는 활동에 대한 내부 반성과 운동성 회복,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각성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1967년 제 19회 전국대회에서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YMCA’를 운동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학생YMCA가 중심이 되어 ‘학생사회개발단’운동을 전개, 몇몇 지방 YMCA에서 선도적인 사회참여 프로그램 진행, 1971년 서울에서 ‘동남아시아YMCA지도자대학’이 개최되면서 한국YMCA는 사회개발운동에 적극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2. 7․80년대 YMCA 농촌운동 전개

 

1) 시대적 상황과 문제의식

 

70년대는 YMCA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농민운동의 역사에서 볼 때 중요한 시기로 분류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농지개혁이 실시된 이래, 사회운동으로서의 농민운동이 전무한 상태에서 비로소 농민운동의 개념과 뿌리가 내리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의 농민운동은 70년대 초반 카톨릭농민회의 탄생과 70년대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농민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YMCA연맹의 농촌개발사업으로부터 시작된다.

해방 후 운동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방황을 계속하던 YMCA는 60년대 후반 들어 운동성 회복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각성을 새롭게 시작해, 1971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대한 YMCA연맹 제21차 전국대회에서 ‘사회개발사업’에 대한 참여를 결의한다. 이 대회에서 YMCA는 소외된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지역사회조직, 시민의식개발, 주체적인 대중문화 형성의 과제를 수행하기로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사회개발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사회개발위원회는 20여 차례의 연구모임을 통해 ‘시민의식개발’ ‘지역사회조직’ ‘직업기술교육’의 중점 사업분야를 설정하고 전국YMCA가 이에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2) 한국YMCA 농촌사업의 탄생

 

한국YMCA가 농촌사업을 중심적인 과제로 선정한 것은 당시 한국Y가 체질개선과 관련된 문제의식이 중요한 동기의 하나가 되었다. 무엇보다 과거 서구적 문화유산을 계승된 한국YMCA가 스스로의 경험과 사회 문화적 풍토, 한국 사회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새롭게 선교적 사명을 규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한 YMCA운동의 사회적 책임을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하면서 대부분의 YMCA가 중소도시에 조직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여기에 맞는 중소도시 YMCA의 모델을 설정하고 육성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농촌사업은 한국YMC의 새로운 기독교운동이자 바로 YMCA자신의 체질개선운동으로 이해됐다.

이 같은 이해에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기존의 대도시 중심, 봉사중심의 사업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가 깔려 있다. 사실 한국YMCA는 20~30년대 일제하에서도 민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으나, 해방 후에 북미주 YMCA의 영향 속에서 도시 중심, 봉사중심의 프로그램들이 유입되면서 한국YMCA운동의 이념과 철학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서구적인 중산층 복지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는 도시중심 - 봉사중심의 활동모델은 당시의 한국사회의 현실적인 맥락 속에서 보면 부적합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사회에는 서구국가와 같은 중산층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급속한 산업화과정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소외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YMCA의 내적 동기와 함께 당시 한국농촌이 처해있던 현실 또한 농촌사업을 착수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60년대 상황을 보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면서도 농촌이 창출하는 부는 국민총생산의 4.3%에 불과했으며, 농민들 중 30%가 소작농이고 생산물의 50%를 소작료로 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이와 같은 농촌사회의 빈곤은 해방 후 미국 잉여농산물의 수입과 불완전한 토지개혁으로 인해 더욱 심화됐다. 60년대 이후 경제개발사업으로 연평균 10%이상의 고도성장을 했으나, 외자에 의해 생산재를 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그것을 저임금으로 가공, 조립해서 노동집약적인 최종소비재를 선진국에 수출하는 대외의존적인 불균형공업화의 결과물이었다. 이같은 내외적 문제가 맞물려 YMCA는 농촌사업은 준비기간을 거쳐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3) 제1차 농촌사업 (1976-1978)

 

75년 11월부터 시작된 제1차 농촌사업은 교육과 지도력 양성에 초점을 두고 기본방향을 협동화와 민주화에 두었다. 민주화 또한 협동의 실천과정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마을의 협동화를 무엇보다 강조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신용협동조합과 양곡조합을 통해 기초조직 육성단계의 기본사업으로 채택되었다.

신용협동조합은 당시 농가경제의 고질적 병폐중의 하나였던 고리채를 해결하고 장기적인 농촌사업을 전개를 위한 재정을 농민들의 경제협동운동으로 해결한다는 취지에 따라 농촌사업의 기본사업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또한 조합운영을 통해 합리적 사고 및 경영능력을 키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협동정신 및 민주주의 훈련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곡협동조합은 농촌사회에 만연한 50%에 육박하는 장리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물 협동조합운동으로 도시에서 도시민들의 기금을 조성해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대출하도록 함으로써 장리쌀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양곡조합운동은 73년 서울YMCA의 ‘사회개발단’사업의 일환으로 73년도에 결의되었으며, 74년 3월부터 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경기도 화성 수촌리를 비롯한 13개 마을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YMCA연맹은 이 사업을 모델로 삼아 76년도에 312가마를 모금해 18개의 양곡조합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신용협동조합이나 양곡조합으로 농촌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부락종합개발 사업을 통해 지역적인 협동체를 만들고, 이런 지역단위의 협동체가 생기면 전국적인 협동운동체로 발전시켜 농촌운동이 경제중심의 협동운동에서 사회운동, 농민권익옹호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런 장기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농촌운동 기초조직 육성(1단계), 지도력 육성(2단계), 전국적인 유대강화(3단계)의 목적으로 매 단계 3년, 총 9년 내에 일정한 수준의 사회운동을 형성하도록 하는 계획이 만들어졌다.

76년 상반기까지 YMCA농촌사업은 신용협동조합과 양곡협동조합을 합해 32곳의 신규조합을 창립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75년 이전에 구성되어 있던 13개의 양곡조합을 합하면 모두 45곳의 농촌운동 근거지를 확보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45개 농촌마을을 근거로 해서 그 해 76년 9월에 전국YMCA농민지도자 연수회가 열렸다. 또한 농촌사업실무자의 제안에 따라 78년 4월에 제1회 부락개발지도자 교육이 의정부 다락원에서 열렸으며, 부락개발지도자교육은 이후 YMCA농촌사업의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1차 농촌사업결과>

구 분

계획

실제

대비

신용협동조합

60

66

+6

양곡 조합

48

27

-21

시범부락개발

5

1

-4

1차 사업기간 동안 신협은 모두 66개의 조합이 결성돼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통해 농민교육과 협동정신, 농민들의 권리옹호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으며 실제로 신협과 양곡조합을 통해 농가경제의 일부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양곡조합운동을 통해 도시YMCA가 농촌을 돕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도시와 농촌을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YMCA가 도시중산층운동에서 농촌지향으로 바꿔갈 수 있는 가능성도 나타났다.

하지만 부락개발사업의 성과가 부족한 것은 한국YMCA가 농촌문제의 구조적 심각성을 정확히 보지 못한 결과였다. 한국YMCA부락 개발사업을 통해 기본적인 차원의 결여, 농업기술과 정보의 부족, 농민들의 사회의식, 농촌개선을 위한 국가정책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4) 제2차 농촌사업(1979 - 1983)

 

시범사업 성격으로 진행된 제1차 농촌사업은 기초조직 육성단계라는 목표 아래 진행되었으며, 1차 사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조직을 확대하는 사업과 조직된 농민들을 교육하는 문제가 관심사로 부상했다. 또한 1차 농촌사업 기간 중에는 농촌사업을 전체Y 사업의 단순한 일부분으로 간주했던 데에 반해 2차 사업시에는 농촌사업을 중점사업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나타나면서 의욕적으로 사업이 계획되었다.

제2차 농촌사업은 1차 농촌사업의 조직적 기반 강화를 위한 농민교육과 축산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당시 소고기 수요량에 비해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소사육은 농가경제에 큰 보탬이 될 수 있고, 한 농가에서 1~2마리를 사육함으로써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며, 수요자에게 직접 판매함으로써 중간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농촌운동조직운동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선택된 축산협동조합은 엄격하고 세부적인 계획하에 추진되었다.

80년대 초반 국내외적으로 경제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농촌사업을 재평가하고 향후 사업방향을 논의하는 ‘80년대 농촌개발 협의회’가 81년 6월 20~21일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열린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한국의 80년대 이후 농업현실을 대단히 비관적으로 보고 70년대의 연장선상에 농촌운동을 80년대에도 전개해야 하며, 80년대 이후에 농업상황에 대해 ∆ 농가경제의 악화와 농업인구의 지속적인 감소 ∆ 농민사회의 계층분화 ∆ 농민의식의 변화를 예측하고 이에 맞춰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또한 YMCA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부락개발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협동조합비판론자들은 경제적 협동활동 중심의 부락개발 방식은 지금과 같은 경제구조와 정책 아래서는 성공하기 어려우며, 협동조합만능사상에 매몰돼 적극적인 운동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반면에 찬성론자들은 부락단위의 협동활동을 무시한 대외적 권익투쟁은 주로 비농민 지식인 주도로 추진되어 불연속적이고 농민으로부터 고립되고 파급효과도 약하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결국 참가지들은 논쟁 끝에 운동이 지속적으로 농민주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마을내의 영농 협동조직을 기반으로 해 권익투쟁도 보완되어야 하며 현실적으로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YMCA농촌운동의 중심축 역할을 했던 신용협동조합운동은 80년도 광주항쟁이 일어나면서 사회운동이 위축되었고,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운영상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게다가 신용협동조합의 승인제도가 바뀌면서 YMCA농촌사업은 전면적인 궤도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문에 1982년 6월 이후 농촌지역의 신협조직사업은 사실상 불가능해져 조직 확대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양곡협동조합 또한 쌀이 농촌사회에서 갖는 표준거래단위로서의 의미가 상실됨에 따라 조직적 기반이 점차 상실되어 갔다. 따라서 YMCA농촌사업 또한 81년까지는 협동조합을 통한 조직 확대에 초점을 두었으나 82년 이후에는 농민들의 권익문제와 부락개발을 중심으로 변화됐다.

<제2차 농촌사업결과>

구 분

계획

실제

대비

신용협동조합

90

18

-72

양곡 조합

23

19

-4

시범부락개발

3

4

+1

축산조합

17

12

-5

(*제2차 농촌사업 계획은 79 ~81년을 3개년 사업계획으로 설계된 것이며, 사업결과는 79~ 83년 상반기까지의 결과)

제2차 농촌사업의 결과 84개의 신협이 만들어졌지만, 인가를 받거나 자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31개 조합을 제외한 61개 조합은 활동중단 상태에 있었다. 이같은 이유는 계속되는 농촌경제의 악화에 따라 신협이 농촌사회에 뿌리내리기가 어려웠으며, 정부의 신협정책이 도시중심으로 추진됨에 따라 농촌신협활동이 자산형성의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농촌지도력의 잦은 교체와 YMCA와 신협연합회의 이중 지도 등으로 인해 신협운동 활성화에 장애로 와 닿았다. 하지만 신협운동을 통해 민주적이며 합리적인 의식, 협동활동의 체험, 경영능력의 향상 등은 YMCA농촌운동의 중요한 성과로 볼 수 있다. 양곡조합은 쌀이 농촌사회에서 표준적인 거래단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정부정책 변화와 경제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양곡조합식의 운동은 보편화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으며, 축산협동조합은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소값 폭등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제2차 농촌사업을 통해 당초 기대했던 것보다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YMCA는 전국에 걸쳐 90개 마을에 300여명의 지도력과 1억원에 달하는 유동자금, 풍부한 실무자 및 회원들의 지도력을 갖춤으로써 제 3차 농촌사업에 들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5) 제3차 농촌사업( 1983-1986)

 

제3차 농촌사업은 부락개발 사업과 교육을 통한 지도력 육성에 초점을 두었으며, 변화하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자료발간과 농민법률상담실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농민법률상담 사업은 1983년 11월에 농민상담위원회를 구성하고 상담주제 250여 문항을 정리해 ‘농민생활법률’을 발간했다. 상담사업은 85년까지 모두 82건의 상담이 이뤄졌는데 주요한 내용은 농업과 관련되 세금, 토지소유권문제, 교통사고, 부채 및 신용문제, 정부 상대의 법정 투쟁 등이었다.

교육사업은 농민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기본교육과정과 농촌개발지도자 교육장기전문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장기전문교육과정은 사회, 역사, 종교, 경제에 대한 인식강화를 목적으로 마을, 면, 군 단위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력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85년 11월부터 시행되었다.

기본교육은 연 4회 실시되었으며 이 때 형성된 지도력을 중심으로 지역단위협의회 혹은 YMCA농민회를 구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 결과 1987년도에는 교육성과에 기초해 군단위 농민회가 아산군, 순창군, 홍성군, 나주군에서 창립되었다. 이와 같은 지역농민회의 구성은 76년도에 시작됐던 YMCA농촌사업의 전반적인 성격변화를 엿보게 하는 것으로써 이미 86년 4월에 열린 농촌사업실무자 사업보고에서 상황이 인식되었다.

 

“YMCA의 농촌사업은 제1단계 협동조합활동기(76-80)로부터 2단계 농촌지도자교육기(81-85)를 거쳐 3단계 농민운동조직기로 돌입하였다고 판단된다”

 

YMCA내부에서도 YMCA농촌사업의 체계화, 계통화를 위해 연맹농촌사업과 지역Y의 연대를 강화해가면서 지역농촌사업의 발전대책의 일환으로 해남Y, 거창Y, 홍성Y등이 지역농촌사업의 중심센터 역활을 하도록 했고, 지역별 실무자들도 2개월에 1번씩 회의를 정례화 했다.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YMCA농촌사업 지도력을 전국적으로 묶는 ‘한국YMCA 농민지도자 협의회’를 1987년 11월에 조직한다. 1, 2차 농촌사업의 조직적 성과를 바탕으로 전개된 제3차 농촌사업(1983 ~ 1986년)의 조직성과와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제3차 농촌사업결과>

* 조직사업

구 분

목표수

실제

대비

양곡조합

5

9

-4

축산협동반

6

9

+3

여타협동조직

13

6

-7

기타조직

40

42

+2

총합

64

66

-2

* 지역협의회 및 훈련프로그램

구 분

회수/참가자

구분

회수/참가자

지역협의회

8

방문교육

1254

마을개발지도자교육

9/418

법률상담

533

여성농민교육

2/66

법률상담교육

5/150

장기교육

2/42

농민법률강연

8/683

지역 교육

59/1829

 

 

 

6) 제4차 농촌사업(1987 - 1991)

 

제 4차 농촌중점사업은 YMCA농촌조직을 토대로 마을, 면, 군, 전국 단위로 농민들을 조직해나가는 것이며, 이런 조직화를 위한 교육훈련 프로그램의 개발이었다. 동시에 기독교농민회, 카톨릭농민회, 군단위의 자주적 농민회가 성장하고 만들어지는 추세 속에서 YMCA농촌지도력의 구심체인 ‘한국 YMCA농민지도자협의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였다. 당시 지도자협의회 속에는 거창농민회, 해남YMCA농어민회, 승주YMCA농민회, 나주농민회, 홍성군농민회, 아산농민회, 괴산농축산물 생산자협의회, 음성군농민회, 순창군 농민회가 군단위 농민회를 가지고 참여하고 있었다.

협의회는 88년 2월에 모임을 개최해 협의회 성격을 회원자격을 개인자격으로 하며, YMCA농촌사업의 발전을 위해 협력하고 군농민회를 강화하는데 필요한 지원과 정보교환 및 재교육을 명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국적으로 군단위 중심으로 농민회 통합논의가 일어났고, 90년 2월 전농연, 농민협회, 자주적 농민회가 참여한 ‘전국단일조직건설을 위한 군농민단체 대표자회의’가 열리고 4월에 해방이후 최대의 전국농민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됐다. 이와같은 현실 속에서 향후 농촌운동에 대한 고민의 YMCA는 89년 6월의 실무자회의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 YMCA연맹은 농민운동자원 및 조직사업등에서 보다 개방적이고 YMCA 자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지원 협력해 나갈 수 있는 금욕적인 자세정립의 정책적 결정이 요망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YMCA농촌사업은 ‘전농’이 결성되기 전까지는 군단위 농민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단위 농민회가 결성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전농이 결성된 이후에는 농민지도력을 양성하는 교육프로그램이나 군단위 농민회 지원사업을 전개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실제로 YMCA 농촌사업을 통해 육성된 지도력이나 군단위 농민회들이 모두 ‘전농’으로 흡수되었다. 때문에 농촌운동 담당자들은 전농결성과 상관없이 YMCA농민지도자교육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YMCA가 한국농업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연구협의회 같은 형식으로 농민운동에 대한 좌표제시를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견, 농민운동이 자주적인 통일이 이뤄졌으므로 이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한편 독일EZE로 지원으로 추진된 농촌사업은 90년 상반기에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고, 만 15년간 지속해온 농촌사업을 어떻게 마무리지을 것인가를 두고 정책적인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사업지속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교육사업을 독자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YMCA농촌사업의 목적이 농민들의 경제적, 사회적 권익실현을 위한 자발적인 조직의 형성에 있었으므로 ‘전농’의 교육사업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모아져 ‘전농’과의 협의를 추진하게 됐다. 몇 차례 협의를 통해 90년 5월 16일 ‘전농의 조직강화 및 지도력 훈련을 위한 전농과 대한YMCA연맹간의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대한 YMCA연맹은 농민지도자교육의 연장선상에 조직강화와 지도력훈련의 범위 내에서 ‘전농’의 사업을 지원하면서 4차에 걸친 농촌사업을 마무리짓는 국면으로 들어갔다.

 

한편 농촌사업이 시작되면서 중심축 구실을 했던 양곡협동조합과 축산협동조합 사업 또한 운동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농촌의 금리가 내려가면서 양곡조합은 농촌사회에서 매력을 많이 상실했으며, 축산협동조합은 정부의 쇠고기수입과 수입과 공급 조절정책에 따라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양곡조합은 경기도 일원에서 8곳, 축산조합은 충북지역에서 7곳이 만들어지는데 그쳤다.

80년대 말 이후 YMCA농촌운동은 군단위 농민회로 통합된 뒤 농민중심의 농촌운동보다는 도시소비자가 중심이 된 농업농촌 지키기운동을 중심으로 소비자운동, 환경운동의 측면에서 보다 중점을 두고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국제화와 개방화에 따른 농축산물 수입개발에 대처하기 위해서 1988년 4월 제 29차 대한YMCA전국대회에서 ‘우리농산물먹기운동’과 ‘양담배불매운동’이 채택되었다. 양담배불매운동은 양담배국내시장잠식율 3%미만을 목표로 전개되었고, 우리농산물 먹기 운동은 전국 34개 YMCA가 중심이 되어 활동을 전개해 농촌문제를 전국화시켰다. 한편 15년간 추진된 농촌사업이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한국농업이 전반적 위기에 대한 대안제시를 위해 91년 2월에 ‘UR타결이후 한국농업’이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한다.

3. 7․80년대 YMCA농촌운동의 한계와 성과

 

60년대 말 YMCA의 사회적 책임과 새로운 각성운동과 70년대 초 사회개발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 YMCA농촌운동은 90년대 전국농민회총연맹라는 자주적 농민단체가 결성됨으로써 운동전개 당시의 목적을 달성하고 16년(1975.11 ~ 91.5)간에 걸친 공식적인 농촌사업은 일단락 짓게 된다.

이우재가 비판하는 것처럼, 70년대의 농촌운동은 외국의 기독교 기관의 원조에 의해 이뤄졌으며 YMCA농촌운동 또한 독일의 개신교 개발사업 중앙위원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이뤄졌다. 비록 자생적인 재정마련 등에 따른 아쉬움과 한계는 있지만, YMCA농촌운동 15년이 우리 사회와 농촌운동에 던진 의미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YMCA 농촌사업은 협동사업과 교육사업을 통해 배출한 농민지도력은 각각의 지역사회와 농촌사회에서 민주적인 지도력으로 성장했으며 90년 전농의 조직형성과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농민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

둘째, YMCA는 7,80년대의 농촌사업을 통해 내적으로 일제하의 농촌운동을 포함한 민족운동의 경험적 전통을 계승하고 주체적 사회참여 양식을 전개시켰으며,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각성을 이끌어 냈다.

셋째, 해남YMCA 거창YMCA, 홍성YMCA 등과 같이 농촌사회의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회개발사업을 벌일 수 있는 지역적 거점이 확보되었으며 이후 농촌사회운동의 모델로서 작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넷째, 80년대에 들어 활발하게 전개된 YMCA시민운동이 사회문제에 대한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인식수준을 넘어 보다 심층적으로 우리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인식과 실천의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우리 사회의 농업위기에 대한 시민운동차원의 소비자운동이나 환경운동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적 망을 만들었다는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90년대 이후 YMCA가 도시를 중심으로 생활협동운동 전개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