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MCA 생명평화 운동 담론 형성을 위한 기본 얼개1)
– YMCA 눈으로 생명 평화운동 말하기
1. YMCA 내부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와 질문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한다. 크게 그 문제제기는 운동성과 정체성이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1. 운동성
오늘의 상황에서 Y가 왜 생명 평화운동을 하느냐고 원칙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이 운동을 Y가 어떻게 구체화 현장화 대중화 시키느냐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첫째, 생명평화의 정신을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으로 만드는데서 아직 실질적인 ‘감’이 안잡힌다는 문제 제기이다. 이 문제는 생명평화운동이란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이해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또 보다 현실적인 문제제기로서 지금 지역사회 현장속에서도 요구되는 운동 과제들을 대응하기에도 벅찬 실정인데 생명 평화란 왠 추상적인 담론이냐는 항의가 있을 법하다. 생명평화의 추상성과 현실성간의 차이를 어떻게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구현시켜야 할 것인가가 과제로 남는다. 두번째는 생명평화운동이 본질적으로 갖는 래디칼리즘과 대중운동간의 격차감이다. 소수자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질 수 있는 생명 평화운동을 어떻게 대중화시킬 것인가란 과제가 남아있다.
1.2. 정체성
생명평화운동이 Y운동의 역사적 계승이냐 아니면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냐는 문제 제기이다. 다시말하면 Y 생명 평화운동은 기존 Y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지는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새로운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이다. 역사적 계승성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Y운동에 대한 생명평화적 재해석이 요청될 것이다. 아마도 무언가 질적인 변화를 요청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정체성과 관련된 다른 문제제기는 기독교 신앙상의 문제제기일 것이다. 생명평화운동과 기독교 신앙, 기독교 사회운동간의 상관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이는 기독교와 사회, 신앙과 사회적 실천간의 긴장에서 오는 문제로서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긴장성이 Y운동의 정체성을 활기있게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현재는 생명평화운동이 추상적으로 말해지는 한 모두 조아하고 문제를 걸지 않치만, 이것이 갖는 기존 인식, 삶의 방식, 제도권에 대한 근본적인 혁명성을 만나게 될 때 긴장감은 커질 것이다. 이는 지역사회 제도권 교회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추구하는 기독교 사회운동체로서 Y운동이 가질 수 있는 제약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과제와 관련된다. 다소 부족하고 못마땅하더라도 현실은 제도권 교회의 눈높이와 맞추는 신앙운동을 요청한다. 이와 연관된 과제로서 생명평화에 대한 신학적 설명도 새로이 요청된다.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신학적 숙고만이 아니라 현실 교회에 대한 전략적 숙고도 요청된다고 보여진다.
2. Y 생명평화 담론의 출발점으로서 문명 성찰론
2.1. 생명평화운동은 문명론적 성찰을 요청하는 총체적인 과제이다.
인간을 비롯한 전 생명체가 빠진 총체적 위기에 대한 총체적 반응으로 나온 가치이자, 삶의 양식이며, 전 사회적 지향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군사적 문제, 생태환경문제라는 부분적 접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반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문제 인식을 본질적으로 하고 그 해결 방향 역시 본질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생명 평화운동은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 인식을 본질적으로 해야 그 실천 방안과 행동 프로그램도 제대로 구체화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우리가 생명평화운동의 추상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문제를 본질적으로 보고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나, 이 추상성을 현장 실천에 연결시키는 ‘감’을 못잡고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의 생명평화 사고가 본질적이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 있다. 참으로 본질적인 사고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발현되게 되어있다.
이점에서 우리는 우리를 참으로 본질적인 사고를 못하게 가로막는 현실적 제약 조건들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Y는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서 부터, 그 일을 왜 무슨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를 성찰해봐야 한다. 또 그 일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있는 실무자는 누구인가(여기서 누구인가는 단순히 이름을 묻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전적 삶과 비전을 묻는 것이다) , 실무자는 누구와 그 일을 하는가라는 실천적이고 생활적인 면을 간과해선 안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생명 평화의 담론 형성을 하고자 할 때는 세계와 인간의 변화 흐름을 전체적인 전망에서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을 이해하는 문명적 성찰이 요청된다.
2.2. 오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 평화 운동은 산업문명의 성과와 폐해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는 산업문명이 비약적으로 꽃피웠던 세기라 할 수 있다. 산업문명은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었던 문명이다. 경제 성장은 전지전능한 지배가치가 되었다. 산업문명을 일으켰던 서구사회는 빈곤과 기아에서 해방되었으나, 다른한편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시키고 식민지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순을 낳았다. 부와 기아의 편중현상은 산업문명이 낳은 기형적인 지구사회의 모습이다.
산업문명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생활양식을 낳았다. 화학제품들이 대량을 쏟아져 나왔고, 에너지 의존형의 사회구조를 만들었다. 도시화와 교통혁명은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했으나 땅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도배하고 있다. 이결과 환경오염과 생태계 위기에 인류는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생태계위기는 1950년대이후 부터 일어난 대량생산 대량소비 문화가 빗어낸 결과이다.
2.3 산업문명 시대에 인간은 두 이념 충돌을 경험했다.
자유와 평등. 두 이념은 궁극적으로 인간욕망을 어떻게 해결해 줄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자유는 물리적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물학적 기초 욕구라고 볼 수 있다. 평등은 사회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개념이다. 그동안 우리 인간문명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사이에 두고 경쟁해 왔다. 이 두 가치는 그러나 공히 인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자연세계의 생명을 희생시켜왔다. 기회평등은 자유주의체제에서 조건평등과 결과평등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났다. 개인주의는 자유를 궁극가치로 삼는다. 두 이념 공통적인 점은 모두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경제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자유의 이념이 평등 이념보다 인간 욕망을 더 잘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판명을 받았다. 이 흐름은 21세기에 신자유주의 세계화란 이름을 달고 더욱 가속화되고 있으며 정비례하여 평화와 생명의 위기는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성장지향적 모델과 고용과 성장 동시에 추구하는 복지모델을 넘어 생명평화의 가치를 지향하는 생태적 발전모델에 대한 담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2.4. 산업문명으로 물질이 풍요로워지고 인간 욕망을 최대한 만족시켜주는 자유(자본주의)의 이념이 승승장구하고 있음에도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이 새로이 각성하고 있는 깨달음이다. 기존의 경제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물질의 만족이 삶을 만족하게 할 것이란 전제에서 온 힘을 기우렸다. 그러나 그 전제는 맞지 않고 있다. 행복 경제학의 출현은 이런 새로운 깨달음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그동안 살던 집과 직장, 학교, 도시를 떠나 새로운 삶을 찾기 시작했다. 탈출과 실험의 생활양식이 새로운 문화로 늘어가고 있다. 이가운데는 비판적 대안적 신념을 갖고 탈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점점 많은 사람들은 산업문명에서 폐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대안적 사고, 삶의 양식이 산업문명을 대체할 새 문명을 창조할른지는 좀 더 두고 볼일이지만 산업문명에 대한 지적이고 본능적인 저항이란 점에서는 주목할 현상이자 흐름이다. 산업문명으로부터의 탈출은 점점 늘어갈 것이다. 기존 문명 역시 그대로 이 탈출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문명비평가 앙토냉 아르토가 말하듯이 “개들이 끊임없이 늑대들을 찾아 대초원을 누빈다. 늑대를 개들로 만들기 위해서.” 생명평화운동은 산업문명을 탈출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찾아 나서는 이들에게 구심점을 제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늑대는 다시 개를 잡아먹어야 하기에.
3. 생명 평화 영성
3.1. 평화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산업문명, 자본주의 문명이 낳은 것은 전쟁과 폭력의 만연이다. 인류역사상 20세기가 가장 많은 전쟁과 폭력으로 뒤덮었던 것은 이런 이유이다. 평화는 내적인 차원(마음의 평화), 관계적 차원(평화로운 관계), 사회적 국제적 차원(내전과 국제전)에서 이해될 수 있다. 현대평화론은 빈곤, 억압, 사회적 불의를 해결하는 문제를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평화는 인간생명을 존중한다는 가치위에 서있다. 이점에서 평화와 생명관계는 불가분리이다. 최근 생태계 보전 운동을 평화운동의 과제로 인식하고 케냐의 그린벨트 운동가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일은 평화를 생명의 관점에서 확대하여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사례이다.
진정한 평화는 현실국가권력과 갈등요인이 되며, 일반 국민들의 애국심과 갈등해야 할 대도 있으며 사회적 분쟁을 해결하는 노력에서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중재자로서 바른 가치판단을 해야하는 책임이 있고, 또 불의한 구조를 개혁하기위해 갈등을 만들어야 하는 갈등도 있다. 이런 복잡하고 모순적인 개념인 평화를 운동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Y 운동가들이 현장감에 맞는 탄력성 있는 사고능력을 갖추는 것이 요청된다. 합리적으로 사고하면서 세계와 사회, 인간현상의 다양한 면모를 인식하면서 실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평화운동에서는 요청되는 새로운 능력이다.
교회는 신앙 본질적으로는 평화이나, 역사적 교회는 전쟁과 폭력에 깊이 간여되어 있다. 국가와의 결탁속에서 혹은 신앙 포교상의 목적으로 폭력에 가담해왔다. 그러므로 Y 평화운동은 교회개혁운동과 직결되어 있다. 교회 제도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신앙 체질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영적 혁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는 사회혁명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본 방향을 그렇게 인식하고 잡아야 할 것이다.
3.2. 평화가 인간학적 차원의 문제로 국한하여 볼 수 있는 것이라면 생명은 평화의 인간학적 차원에 자연 생명을 더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평화(생명) + 자연의 평화(생명)라는 전망에서 오늘의 생명 담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평화운동은 인간 생명에만 집중해 왔고, 그런 까닭에 자연 생명에는 무심해 왔다. 아니 인간 생명을 위해 자연 생명은 아무런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인간 생명은 자연 생명의 극히 일부분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산업문명의 폐해가 준 각성이다. 산업문명에 의한 생명 위협은 인류역사상 처음 겪는 일이며 전 지구적이고 전 생명적이란 특징을 띠고 있다. 현재 과학자들이 심각한 경고를 하고 있는 지구온난화와 기후이변 문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최근 영국에서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와 지구 생태계의 위협, 경제적 영향을 다룬 스턴 보고서(Stern Review)는 이미 0.5도 올라가있는 지구 온도는 현재 추세대로 탄소를 배출한다면 50년내에 2‐3도 오를 확률이 75%, 5도까지 오를 확률이 50%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될 경우 홍수 위기, 극한 날씨의 증가, 경작지 사막화, 해수면 증가에 따른 2억명 이주, 그리고 40%의 생명 종이 멸종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 생명위협 현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 일이 인간의 만든 생산물, 생활양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즉 오늘의 생명 위기는 인간적 산물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오늘의 생명 위기를 해결할 책임적 주체로서 인간을 다시 보게 한다.
자연은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이란 각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산업문명이 가져다 준 위기를 극복하여 나갈 지혜를 갖게 했다. 생명적 각성은 영적 각성의 본질적 차원이다. 생명적 각성은 부분적 개체적 인식에서 총체적 유기적 사고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생명운동은 우리의 사고의 전환을 요청한다. 그동안 우리가 운동을 개체적, 부분적으로 해왔다면 생명적 각성에서 하는 운동은 문제를 유기적으로, 총체적 전망속에서 하는 사고와 방식에서의 체질 변화를 요청한다. 우리가 현장과 구체적인 문제를 맞아 생명운동을 한다는 것은 먼저 생명적 성찰에 기본으로 하고, 문제해결을 통전적 사고(개체문제의 전체문제와 관계)를 체질화시키고, 문제의식과 사고반경도 전지구적 수준을 포함하는 태도를 요청한다.
생명은 인간학적 평화에서 자연적 생명으로 수평적 확장을 한 개념이면서 동시에 그 생명의 원천으로서 신적 차원을 가짐으로 수직적 깊이를 더한 개념으로 이해되어야한다. 생명평화운동은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생명은 생을 命받은 것으로서 하늘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죽임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으로 생명계를 창조하셨고, 인류 최초의 죄는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다. 예수는 생명(요한복음 11: 25)으로 죽음을 이기며 생명의 떡(요한복음 6: 35)으로 생명을 살리는 분이다. 생명에 대한 신학적 담론은 실천론으로서 전개되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있다. 죽임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 참여하여 죽임의 세력을 변혁시키고, 죽임당하는 생명을 증언하고, 세상 안에 생명을 선포해야 한다. 신학은 행동이요 증언이자 선포이다.
3.3. 영성
생명평화운동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인간 스스로 창조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소위 서구 계몽주의 이성이 낳은 산업문명은 현재 인류뿐만 아니라 전지구 생명계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새로운 각성은 따른 새 인간의 출현이 요청되고 있다. 과연 인간은 그럴수 있는가? 인간에 대한 이해는 생명평화운동에서 중요하다. 인간은 생명을 가진 생명체이면서,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존재이며, 더나아가서는 자연과 신 우주의 초월적 고차원적 세계와 소통하는 영성체이다. 인간이성의 산물인 자유와 평등은 현재의 생명 평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가치가 아니다. 결국 인간은 도구적 이성의 존재성을 넘어서는 영성적 차원에서 오늘의 생명 평화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이점에서 종교적 영성과 생명평화적 영성이 친화성을 가질 수 있다. Y가 추구하는 영성(Spirituality)은 생명평화 영성이 될 것이다.
4. 맺으면서
생명 평화의 개념 정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는 총체적인 것이기에 개념 정리를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일 수 있다. 이미 몸으로, 삶으로, 느낌으로, 생명을 가진 이들은 다 알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알고있으면서 모르는 것은, 알면서도 살지 못하고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은 ‘반생명적 문명’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세력에 전존재적으로 포로되어 살아가고 있기때문이다. 나의 삶은 더 이상 나의 삶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그 누구의 삶도 아니다. 서로 얽혀 돌아가는데 그 본질이 죽음이다. 자연적 삶의 본성은 죽음의 문명에 대항 할 수 있는 근원적 원천이다. 어쩌면 생명 평화 담론은 이성적 각성에서라기보다 본성적 각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평화운동은 전(全)문명적 부정과 저항운동인가? 사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부정하는 태도 유형에 따라 운동방식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생명평화운동은 시대적 전환을 표징하며 새로운 사회를 미리 보여주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 운동 방식에서 체질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1) 정지석, 기독교평화연구소장, 정책협의회 주제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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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도 한국YMCA 생명평화운동 제1차 정책협의회(2007년 5월 11일(금) 오후 3시 - 5월 12일(토) 12시, 유성 유스호스텔) “삶과 지역에서 말하는 생명평화운동-나로부터 시작하는 운동, 공명하는 변화, 또 다른 삶의 고백” 보고서 중에서.
센터 출판물 "생명평화구상"에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