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YMCA 소개
1. 한국YMCA 운동의 형성 배경
한국YMCA는 1903년 10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창립을 기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100여년 전 그 때, 한국YMCA 운동의 횃불을 들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 10년 안팎의 기간에, 다양한 선도적 개화청년운동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활동을 통하여 한국YMCA 운동지도력이 훈련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국YMCA 운동으로 결집된 개화청년운동은 그 이전단계에서 대체로 두개의 커다란 줄기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 안에 개화청년운동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896년 11월, 배재학당에 협성회(協成會)가 조직되어 있었고 (그 뒤 이 협성회는 학숙청년회가 되었다가 학생YMCA로 전환했다) 그 다음해 6월에는 황해도 장연 솔내교회에 ‘협성회’가 조직되었으며, 9월에는 서울 상동교회에 ‘엡윗청년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1885년에서 1900년에 이르는 15년간, 기독교는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의료선교활동(알렌의 광혜원)과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이었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예수교학당(경신학교의 전신)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라는 배재학당을 창설하였다. 이 밖의 스크랜튼이 이화여학당(1886.10)을, 엘러스양이 정신여학교(1895)를, 평양장로교계에서 숭실. 숭의여학교, 감리교계에서 정의여학교를 설립, 청년인재들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바탕이 한국YMCA 운동의 형성과 확산을 가능케 하였다.
또 하나는 개화, 자주, 민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던 일단의 개화청년 지도력들이 강제해산과 투옥 등 좌절의 과정을 거쳐 YMCA 운동에 합류함으로써 한국 YMCA운동의 형성과 확산을 가능케 하였다. 국정을 쇄신코자 일으킨 개화파(김옥균, 박영호, 서재필 등)의 갑신쿠데타(1884)가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 서구 학문을 수학했던 서재필이 12년만에 귀국하여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1896)하였다. 그리하여 순한글의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을 건립하는 등 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1898.3.10), 대한제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위한 의회설립안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는 보수. 수구세력의 음모로 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 340명이 체포되었으며, 모든 민회(民會)의 영구해산령에 의해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되었다(1898). 때문에 독립협회를 잃은 개화청년들은 독립협회를 대신하는 새로운 개화의 구심력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한 염원과 지도력이 YMCA 운동과 만남으로써 비로소 주체적 한국YMCA 운동의 시대가 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2.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탄생
한국YMCA 운동 형성의 밑거름이 된 두 줄기의 커다란 흐름 - 하나는,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안의 개화청년회 운동과 또 하나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로 모아졌던 개화청년 그룹이 있었다면, 이것을 하나의 에너지로 묶어내는 구체적인 실천작업이 때맞추어 추진되고 있었다.
그것은 1899년경 150여명에 이르는 한국기독청년들이 YMCA의 창설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자료로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대체로 상류층 청년들이었다고만 알려지고 있다. 어떻든 이들의 절실한 요구에 따라 언더우드와 아펜젤라 목사는 별도로 북미YMCA 국제위원회에 한국YMCA 창설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 무렵 서울에서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라는 영문잡지를 펴내고 있던 헐버트(H. B. Hulbert)는 1903년 4월호에서 이런 글을 쓴 일이 있었다.
“우리는 매일 거리를 쏘다니는 수백명의 청년들을 본다. 그들은 구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자극만 있으면 가장 유망한 청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YMCA와 같은 새로운 단체를 바라는 이유로서
첫째, 한국에 들어와 있는 기독교와 교회가 이미 상민이나 천민들에 점령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반출신인 그들 지식 청년들은 천민과 자리를 함께할 수 없었다. 양반과 상민은 신분차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
둘째, 개화청년들은 그 당시 정부로부터 위험시 당하고 있었다. 독립협회 운동이 모두 개화청년들에 의해 운영되어 왔고, 그들이 개화다 민족독립이다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일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개화에 뜻을 가진 청년들이라면 위험시 하는 경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
셋째, 청년들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이 다시 소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국사람들은 자고로 하느님을 믿는 민족으로서 기독교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데에 한국인들은 처음부터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넷째, 청년들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 전통신앙의 소생을 의식했다. “
한국 개화청년들의 요구를 접수한 북미YMCA 국제위원회는, 중국YMCA 운동을 개척한 라이언(D. W. Lyon)으로 하여금 현지 정황을 조사케 하였다. 그는 1900년 6월 28일부터 9월 17일까지,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국에 YMCA를 창설할 필요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조사하였다. 그는 언더우드, 여병현, 헐버트, 알렌, 아펜젤라, 게일, 벙커, 스크랜턴 등 제씨를 차례로 만나 의견을 나누고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에는 이미 상당수의 선교사가 와서 교회를 세우고 활동하고 있으나 교회에 오는 신자들이 대부분 한국 하류층의 가난하고 무식한 상민들이기 때문에 양반들이 모일 마땅한 장소가 없다. 한국의 개화청년들-그들 대부분은 양반층-이 이미 YMCA 창설을 요구하고 있다. YMCA를 창설하면, 교회안의 청년들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라이언의 보고를 받은 북미YMCA 국제위원회는 숙의끝에 두 가지 결정을 내렸다. 하나는 한국에 파견할 간사로 필립 질렛트(Philip L. Gillet)를 선정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회관건립 예산으로 5천불을 책정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1901년 9월 서울에 도착한 청년간사 질렛트는, 1년간 한국말과 풍습을 익히고, 청년들과 사귀며, YMCA 창립을 준비하였다. 그러다가 1903년 3월, 그는 당시 중국, 한국, 홍콩 YMCA 전체위원회 총무로 있던 브록크만(F. S. Brockman)을 초청하여 그와 더불어 YMCA 창설준비협의회를 조직하였다. 협의회가 열린 것은 1903년 3월 18일이었고, 이 자리를 통해 한국YMCA의 창립의지가 재확인되었고, 회관건립을 위한 상당액이 모금되었다.
1903년 10월 28일 수요일 하오 8시, 서울 유니언회관(정동 공동서적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시청년회인 “황성기독교청년회”가 탄생되었다. 이날 헐버트가 의장이 되어 사회를 보았고, 게일 목사가 헌장초안을 낭독하고 통과된 헌장에 모인 이들이 서명날인 하니, 정회원이 28명이고 준회원이 9명이었다. 헌장에 따라 12명의 이사를 선출했는데, 한국인 2명(여병현, 김필수) 미국인 4명(언더우드, 헐버트, 하윤셸, 샤프), 영국인 3명(브라운, 터너, 켄뮤어), 캐나다인 2명(애비슨, 게일) 그리고 일본인 1명(다까기 - 高未正義)이었다. 질렛트는 당연직 이사가 되었다.
덧붙여 특기할 사실은,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되던 날 낮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YMCA운동체인 배제학생YMCA가 배재학당 교장 벙커와 질렛트의 지도로 창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질렛트는 하루에 두개의 YMCA를 조직하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3. 한국YMCA 운동의 정착과 확산
1903년 11월 11일 황성기독교청년회는 그 임시 회소(會所)를 인사동(태화사회관 자리)에 마련하였다. 집을 쓸만하도록 수리하고 가꾸어서 체육실 겸용의 공작실, 도서실, 사무실, 기도실 겸용의 교실 그리고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을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이 땅에 YMCA운동의 기치가 높이 들어올려진 것이다. 당시 연동교회 게일 목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YMCA 회관이 일반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YMCA는 이제 시민들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 회관은 상점들과 관가의 중심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대지 역시 훌륭하였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마웠던 것은,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회관으로서는 협소하여 더 큰 회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제 YMCA를 통하여 다년간의 우리의 소원이던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하류층의 자녀들, 상인들의 자제들, 선비나 양반의 자녀들이 모여와 한자리에 앉게 되었으며 밤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그러던 중, 1904년 여름에는 일단의 개화청년 운동지도력이 YMCA와 합류하게 된다. 오랜 옥살이에서 풀려 나온 독립협회 간부들, 즉 이상재, 홍재기, 김정식, 이원중, 유성준, 안국선 등이 연동교회에 입교한 다음 YMCA 운동에 가담하였고, 또 옥살이에서 풀려난 이승만과 학생운동가 신흥우도 감리교회에 입교한 다음 YMCA 운동에 합류하였고, 서울에 돌아와 있던 윤치호와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김규식도 이들과 함께 YMCA에 가입하였다. 이들로 해서 비로소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민족YMCA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이사회는 1904년 가을부터 한국인 간사들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수석간사에 김정식, 서무간사 겸 통역에 배재학당 출신인 최재학, 교육부 간사에 김규식, 육정수, 이교승 등, 운동부 간사에 김종상을 배치하였다. 11월에는 미국인 브록크만이 협동간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말경, 윤치호, 김규식이 새로운 이사로 추가되었다. 또 YMCA내의 중추조직으로서 사업정책을 입안하는 의사부가 있었는데 그 부원이 거의 유력한 한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8년도 명단을 보면, 여병현, 전덕기, 김명준, 김규식, 조남복, 고찬익, 민찬호, 김원선, 이익채 등 8명이었다.
1) 초창기 YMCA 사업
초창기 YMCA가 역점을 둔 사업은 교육이었다. 1904년 가을부터 임시건물교실에서 시작된 주 3일의 야학은 150명 가량의 학생들이 수강하는 성과를 올렸다. 학관의 중점은 특히 실업교육에 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그릇된 관념을 깨고 공업과 상업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장차 이들이 한국을 부흥시킬 것이라는 비전을 갖고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뜨개질, 도자기 굽기, 비누만들기, 가죽 이기기, 염색 등이었으나, 1906년 가을 캐나다의 그레그(G.A. Gregg)가 학관의 실업교육 및 학감의 직책을 맡으면서, 임시교사를 세워, 목공, 철공, 사진, 연공(鉛工), 기공(機工)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신 회관이 건립되자, 기계실을 갖추고 전기시설을 마련하면서 캐비닛 제조실, 인쇄실, 양화점을 개설하고, 교실에서는 설계, 산수, 그리고 성경을 가르쳤다. 그때 교육부 위원장 (제2대)은 이상재였다. 1908년에 이르면 학관학생은 1,800명을 넘고 있었다.
초창기 YMCA의 또 하나의 획기적인 사업은 강연회와 토론회였다. 오늘의 YMCA “시민논단”은 이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YMCA의 강연회와 토론회에는 당대의 명사들이 등단하여 강당은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YMCA는 이 열린 토론마당을 통하여 시민의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질렛트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YMCA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다른데서는 찾아볼 수 없고, 미국에서도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 37회의 토론회와 38회의 강연회에는 300명 내지 400명의 청중이 모여들어 강당은 언제나 꽉 찼다.
그 강연제목 중에는 (새 시대에 처한 기독교의 사명), (한국인의 임무), (교육과 기독교), (재래식 혼인관습의 개혁), (기회는 기다리지 말고 만들자), (위대한 민족성의 5요소), (청년이 할 수 있는 일), (자기실현) 등이 있고, 토론제목 중에는 (덕망이냐 지위냐), (경험이냐 교훈이냐), (도의냐 법률이냐) 등이었다.”
체육사업과 종교사업 또한 초창기 YMCA의 역점사업이었다. 체육사업에서 특기할만한 일은, YMCA가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하여 보급한 운동들이 적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가령 농구는 1907년 질렛트가 처음 연습시켰고, 스케이트 역시 1908년 그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갖고와 소개했으며, 배구 역시 1916년 반하트(B.P. Barnhart)가 소개하여 크게 이목을 끌었다. 종교사업의 중점은 기도회와 성경연구반에 있었다. 특히 1907년 이후, 이상재가 종교위원장으로서 헌신한 결과 많은 성과가 나타났다. 한 해에 754명이 입신을 선서하는 기록을 남겼고, 875명이 사경반에 등록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가 주재한 만국기도일에는 1,200명이 넘는 청년들이 YMCA 강당에 운집하여 ‘구원의 말씀’을 들었다.
2) YMCA 회관의 건립
YMCA 회관 건립의 꿈은 YMCA 창설을 준비하던 모든 이들의 공통된 것이었다. 1901년 질렛트가 창립준비를 위해 서울에서 활동하는 동안 회관 건축기금 마련을 위한 모금활동도 아울러 전개했다. 1903년 5월에 있었던 창립준비협의회에서도 6,000원을 목표로 모금에 앞장섰으며, 그밖에도 개인차원에서 윤치호, 브라운, 알렌, 민영환, 한규설, 김가진, 이윤왕, 헐버트, 다까기, 언더우드 등의 기부로 도합 1만원 가량이 추가 모금되었다. 이렇게 해서 확보된 기금이 2만 3천원 가량이 되었고, 이 돈으로 드디어 “종로 큰길 북변”의 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큰 건물’을 짓기에는 아직 미흡하다는 미국의 후원약속자(존 와나케이커)의 지적에 따라 인근 대지의 추가매입에 나섰다. 마침 언더우드와 안면이 있던 현홍택이 5천원 가치의 자기소유 대지를 기부하고, 나머지 땅을 구입할 자금 5천원을 모오간이 기부하여 1906년 6월 29일자로 대지소유권 등기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서울의 성과를 보고나서 미국의 죤 와나메이커가 회관건축 보조비로 4만불(8만원)을 기부하였다. 이로써 서울 종로 한복판에 한국YMCA 운동의 기지가 마련될 수 있었다.
1907년 5월 15일에 건축공사가 개시되어, 1907년 11월 14일에 상량식을 가졌으며, 1908년 12월 초하루에 드디어 회관이 낙성되어 3일간 계속된 개관식을 가졌다. 이 회관은 960평의 부지와 약 600평에 달하는 건물로서, 강단, 운동실, 교실, 도서실, 공업실습실, 식당, 목욕장, 사진부, 사무소, 소년부 등의 방대한 시설을 갖추었다. 게일은 이런 글을 남겼다.
“이 새회관은 서울의 심장부에 우뚝 서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진고개의 천주교당과 덕수궁을 빼놓으면 YMCA 회관은 서울에서 가장 훌륭하고 출중한 건물이다.”
3) 재일본 한국YMCA의 창설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서울 한복판에 창설된지 3년되던 해인 1906년경, 일본에 유학가 있던 한국학생들 사이에서 재일본 한국YMCA의 창설요구가 제기되고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의 한국유학생수는 400명에 달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민족적 치욕감을 느끼면서도 신학문을 배워 조국에 돌아와 일하겠다는 애국개화청년들이었다. 1906년 봄, 질렛트가 동경을 방문하였을 때, 244명의 한국유학생들이 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며, 재일본 한국YMCA의 창설이 필요함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그해 8월 황성기독교청년회는 한인총무로 있던 김정식을 동경에 파견하였고, 11월 5일에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07년 8월에는 동경 간다구에 회관을 마련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총무 김정식을 도와서 최상호가 부총무로 활약했으며, 서기에는 장혜순이 맡아 일했고, 이사장에는 조만식이었다. 뒷날 ‘2.8독립선언’이 여기서 반포되었고, 오늘날에도 그 자리에 존재하여 활동하고 있다.
4. 한국YMCA의 시련과 극복
한국YMCA운동이 최초의 형체를 드러낸 1903년부터 그 이후 10년간 YMCA로서는 격변과 수난의 시기를 체험하고 있었다. 국운이 쇠잔해 가고 있는 가운데, 일제의 침략계획이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904년 2월, 한.일 의정서가 체결되었고, 1905년 11월에는 ‘제 2차 의정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되었다. 그리고 1907년 7월에는 ‘한일 신협약 -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끝내는 1910년 8월 22일, 치욕적인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됨으로써 급기야 나라 잃은 민족이 되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이제 막 싹을 틔운 YMCA로서는 조직적인 저항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면, 여기에 모여드는 청년들을 깨우쳐 국권회복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제침략의 선봉대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한국에 부임해온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일본총감부는 YMCA의 움직임에 특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YMCA는 기독교계와 국제사회에 열려있는 창구를 갖고 있는 단체였으며, 간부들 구성도 결코 친일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07년 6월에 일어난 고종의 헤이그 밀사파견에서도 이를 모의한 주동인물이 이준, 전덕기, 이상재 등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YMCA와 관련 있는 인사들이었던게 사실이었다. 일본 언론도 고종의 양위를 격렬히 반대한 시위군중 속에서 해산명령을 거부한 주동인물 가운데 YMCA 사람들이 많았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YMCA가 기독교의 항일운동의 총본산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1910년 한. 일 강제합병은 필연적으로 한. 일YMCA운동의 합병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황성기독교청년회는 YMCA국제위원회와 협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들어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은 YMCA 운동 지도력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이 ‘105인’ 사건은 일제의 초대총독 데라우찌가 기독교세력을 뿌리 뽑자는 저의에서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수 백 명의 한인들을 구속한 사건인데 그중 105인의 지도급 인사들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사건은 1910년 11월 5일에 발단되어 검거선풍이 불었고, 1912년 6월 28일 첫공판이 열리고 1913년 3월 21일 선고공판이 있었는데, YMCA 지도자 윤치호(당시 부회장)를 비롯하여 이승훈, 안태국, 양기탁, 임치정, 옥관빈, 유동열 등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은 신민회 비밀조직을 분쇄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YMCA 세력을 꺾기 위한 것이 보다 큰 목적이었다.
한편 YMCA 총무 질렛트는 이 음모날조와 고문의 진상을 국제기독교 선교협의회(IMC)에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중국의 1912년 8월 4일자 “차이나 프레스”에서 기사화 되고 그 전문이 게재되었다. 이것이 다시 ‘서울 프레스’ 라는 총독부 관영지에 전재되었다. 결국 일제의 음모극인 ‘105인 사건’으로 해서 윤치호는 영어의 몸이 되었고, 이승만, 김규식이 망명의 길을 떠났고, 질렛트도 추방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YMCA를 뒤흔든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105인 사건’이 밖으로부터 YMCA를 파괴하려 한 음모였다면, 이른바 ‘유신회 사건’은 안에서 회원들을 매수하여 YMCA를 예속시키려 한 일제의 또 다른 음모였다. 일제는 한국YMCA 운동을 일본YMCA의 통제하에 두려는 공작을 끈질기게 벌였다. 이 공작에 매수되어 활약한 이가 1907년부터 YMCA 부총무로 있던 김린이었다. 그는 YMCA사업에 남다른 수완을 갖고 있었다. 회관건립에는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이완용과 친근하게 지냈으며, 伊藤博文과도 내왕이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일본 조합교회와 선이 닿게 되면서, 유신회(維新會)라는 사조직을 구성하고 YMCA의 조직변경을 계책하게 된다. 1912년 말부터 음모가 진행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미국 선교사들의 손에서 한국YMCA를 독립시킨다. ‘중국. 한국. 홍콩YMCA 전체위원회’ 구조에서 탈퇴하여 일본YMCA에 가입한다. 그리고 ‘황성’이라는 명칭을 떼어버린다는 목표를 관철하려 하였다. 일제의 앞잡이가 된 유신회 일당의 조직적인 음모가 거세게 추진되었으나, 1913년 2월 21일에 소집된 이사회는 단호히 김린을 부총무직에서 파면하였고, 2월 27일에는 회원총회가 소집되어 이러한 이사회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이로써 내부의 준동은 일단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본YMCA는 존 알 모트를 설득하여 중재에 나서 줄것을 요청하였다. 모트는 이 일을 결말짓기 위해 1913년 1월, 동경과 서울에 들렀으며, 결국 황성기독교청년회는 1913년 4월, 이상재, 남궁억, 신흥우, 언더우드 등 대표 5인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측 대표와 협의케 하였으며, 그때의 의장은 모트였다. 마침내 4월 12일 양국 YMCA대표가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비록 그 문항 중에서 ‘자치(自治)를 인정한다’ 하였으나 그것은 명목일 뿐, 한국YMCA의 일본예속화를 위한 합법적인 틀이 마련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그 합의서 문항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사라지고,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 일제의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서에 반발하는 회원들의 움직임이 서울에서는 물론 재일본 한국YMCA안에서도 거세게 일었으나, 지도급 인사들의 설득으로 일단 분열의 위기는 넘어갔다.
5. 한국 학생YMCA 운동의 태동
한국YMCA 창설간사로 1901년 서울에 온 질렛트는 한국도착 후 배재학당(1896년 개교)에서 학생 YMCA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는 최초의 도시YMCA의 창설을 준비하는 동안, 배재학당의 학생YMCA를 육성 강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한국 학생YMCA는 1901년에 중국과 홍콩의 학생YMCA와 제휴하여 “중국. 한국. 홍콩 전체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를 통하여 1902년에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에 가맹하였다.
1910년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근교에 있는 진관사에서 김규식 간사가 주관한 제 1회 학생하령회(대회장 윤치호)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46명의 학생대표가 참가하였고, 6개 교파와 4개국에서 16명의 연사가 초청되었다. 이 학생하령회를 계기로 각학교에 학생YMCA가 조직되기 시작하여 1911년 말까지에는 배재학당과 상동청년학원의 학생YMCA가 부활되었고, 경신학교, 세브란스의학교, 개성의 한영서원에도 학생YMCA가 조직되었다. 이와 같이 학생YMCA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는 학생운동 담당간사를 물색하다가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이승만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서울에 온 이승만은 기존 학생YMCA 조직을 지도하는 한편, 브록크만과 함께 3주간 전국을 순회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1911년 6월 15일-20일까지 개성에서 개최된 제 2회 학생하령회(대회장 윤치호)에 참가하였다. 이 하령회에는 93명의 학생대표가 참석하였다. 1912년에는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의 북한산성에서 하령회가 개최되었는데, 57명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대회분위기는 처음부터 형사들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눈물과 흥분이 교차하는 매우 침울한 것이었다. 그때는 이른바 총독 데라우찌 암살음모 혐의를 씌운 ‘105인 사건’으로 대회장 윤치호와 연사 양전백목사 그리고 상당수의 학생들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과 김규식은 미국 망명길에 올랐고, 김창제가 학생사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1913년에는 송도에서 50명으로 제한된 소규모의 학생하령회가 열렸다.
이렇듯 학생YMCA 운동이 하령회를 통해 그 기반을 굳히는 한편, 한국YMCA 운동의 전국확산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1914년 4월 2일 - 5일, 개성 한영서원에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 기청학관, 배재학당, 경신학교, 세브란스 의전, 한영서원, 전주 신흥학교, 군산 영명학교, 광주 숭일학교 YMCA등 1개 도시YMCA와 9개 학생 YMCA 대표 45명이 회집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서 초대회장에 언더우드, 부회장에 이상재, 총무에 브록크만이 선임되었다. 이로써, 학생 YMCA 운동의 힘을 얻은 한국YMCA운동은 전국조직을 일구어 내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6. 일제하 한국YMCA 운동
한국의 YMCA 운동은 일제 침략이라는 역사적 격변기에서 이른바 ‘105인 사건’과 ‘유신회 사건’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그 결과 YMCA의 주요 지도력이 투옥, 망명, 해외 추방 등으로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1914년 4월 ‘연합회’ 결성으로 구심력을 갖추게 되면서 새 힘을 얻어 전국확산에로의 길을 착실하게 밟아 나갔다. 1916년 이상재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의 회장에, 그리고 4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윤치호가 중앙청년회와 연합회의 총무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한국YMCA의 중심지도력이 재정비되었다.
1919년 제 1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함께 일어난 민족자결주의의 물결이 조선민족의 반식민 독립운동으로 번져 나갔고, 그같은 물결은 YMCA 조직을 타고 전국에 파급되었다. 3. 1독립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한 ‘2. 8 독립선언’이 재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 있었다는 사실이나, 3. 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그 중 9인이 YMCA관련 인사였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연합회는, 1920년의 제 3차 전국대회에서 1) 도시YMCA와 학생YMCA 발전을 위한 연합사업 2) 각 지방YMCA 강화 연대를 위한 순방 3) 평양, 대구 등 대도시에 YMCA를 신설하는 일 등의 사업을 계획. 추진키로 하였다. 한편 전국연합회는 1921년 3월부터 기관지 월간 “청년”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청년”지는 단순한 단체기관지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사회사상과 기독교사상을 소개하는 월간종합지로서, 일제의 사전검열에 의해 많은 부분이 삭제 몰수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1940년대 초까지 20여년에 걸쳐 꾸준히 발행되었다.
1922년에는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세계총회에 이상재, 신흥우, 이대위, 김활란, 김필례 등이 참석하였고, 돌아와 한국YWCA 창설에 협력하였다. 이 당시 YMCA인으로서의 이상재의 지도력은 많은 사회영역에도 미치고 있었다. 3.1운동 때는 배후인물로 활약하다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조선교육협회 발기인으로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1922년 조선교육협회가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1924년에는 연합소년척후단(지금의 보이스카웃연맹)의 초대총재에, 조선일보의 사장에,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달 전 1927년에는 민족의 단일전선을 구축, 반일투쟁을 목표로 조직된 신간회의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3월 29일 78세를 일기로 이승을 떠나자 그의 장례는 수십만이 추모하는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20년대의 또 하나의 주목할만한 사업으로 평양YMCA의 조만식 등의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여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은, 식민치하에서 점차로 잠식되어 가는 민족경제 소생운동의 일환으로서 국산품 애용과 생산진흥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점차로 자각 자급운동과 외래상품 배척운동으로 발전하는 범민족적 운동의 성격을 지님으로써 오늘날의 YMCA가 추구하는 시민경제주권운동의 시원이 되었던 것이다.
1925년부터 한국YMCA 운동은 공업화된 도시중심의 서구식 사업보다 한국실정에 맞고 대다수 국민들이 관련되어 있는 농촌사업에 주력하기로 하고, 사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의 일차적인 단계에서는 농촌의 계몽에 그 초점을 두고, ‘3대강령’을 마련하였다. 즉 그것은 1) 정신적 소생, 2) 사회적 단결, 3) 경제적 향상이었다. 이 ‘3대강령’이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속에서의 오랜 실험과 경험 후에 설정한 ‘개발이념’에서의 1) 자조적 정신 2) 민중의 단결 3) 경제적 성장의 목적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은 주목할만 하다. YMCA 농촌사업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는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다가 결국은 또 다른 좌절을 경험한다. 그러나 농촌운동의 전개를 통해 YMCA는 전국 19개 도시에 농민학교를 세웠으며, 전국에 330여개의 농촌사업소, 그리고 전국에 730여개의 협동조합이 조직되었다.
이때에 ‘연합회’는 도시Y, 학생Y, 농촌Y로 구성되었고, 중앙YMCA를 비롯한 대도시Y는 지도력을, 25개의 학생Y는 인력과 지도이념을, 미국YMCA 국제위원회는 기술과 재정을 제공하면서, 농촌운동에의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한편 YMCA는, 오늘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전신이 기독교연합기구 창설을 위해 ‘장감(長監)연합협의회’를 중앙YMCA회관에서 조직하였다.(1926) 여기에는 장감교회 대표 각 20명과 교회기관 대표 25명이 참석하였으며, YMCA 지도력에 의해 비로소 한국기독교연합기관이 출범할 수 있었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제가 중국 본토를 침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기독교와 YMCA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노골화되었고, 끝내는 1938년 여름에 신흥우, 구자옥, 최두선 등이 체포되는 상황에 이른다. 1938년 제 9회 YMCA 3년전국대회를 계기로 전국YMCA는 세계연맹에서의 이탈이 강제되었고, 다시금 일본YMCA동맹 산하에 예속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로써 조선중앙YMCA만 형식적으로 명맥이 유지되었고, 그 외 전국의 모든YMCA는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다.
센터 출판물 "YMCA 운동 이해"에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