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없는미래"라고 마이클 네이글러라는 분이 쓴 책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항암치료로 입원했을 때 이윤희 간사님이 사준 책인데 이제야 읽었네요..
그 책은 많은 책을 인용하고 있는데
덕분에 저는 간디의 연설, 편지, 기고문 등을 묶어 놓은 "진리와 비폭력(상)" "진리와 비폭력(하)",
한나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 on violence" 월터 윙크가 편집한 "Peace is the way" 라는책을
책꽂이에 꽂아 두게 되었습니다. ㅋㅋ

"peace is the way"는 평화운동가들의 기고문 등을 엮어 놓은 책인데..
우리나라에 아직 번역판이 없는 것 같아서..
제가 읽은 것 중에 좀 좋은 것을 시간 날때 마다 번역하여 올려놓으려고 합니다.
글이 짧아서 부담이 좀 적은 것 같아서요..
오늘은...
A.J.Muste의 "평화주의적 방식의 삶 Pacifist way of Life"이라는 글을 올리겠습니다.
제가 영어가 짧아서 잘 모르겠건 헷갈리는 건 영어본문만 올리거나 한글과 영어를 병기했으니
잘 처리하시길...ㅋㅋ

평화주의적 방식의 삶

A.J. Muste

A.J Muste는 오랫동안 생산적인 삶을 살면서 종교적 개임과 정치적 생활양식으로써 비폭력적 직접 행동을 위해 트럼펫을 불면서(열심히 주장했다.. 뭐 이런뜻일까요?)  FOR(fellowship of Reconciliation)과 연합하여 많은 일을 했다. 20세기에서 진실로 위대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인 Muste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노동운동가들과 평화주의자들에게서 신뢰를 받았으며 그들을 함께 연합할 수 있게 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쉽게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을 것이다). 2차 대전의 그림자 속에서 Muste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의 평화주의적 신념을 말하고 있다.(Fellowship, 1941년 11월)

평화주의는, 오늘 사용하고 내일은 사용하지 않거나 일상의 어떤 관계에서는 사용하고 다른 관계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집어 들었다가는 내려놓을 수 있는 도구나 연장이 아니다. 평화주의는 그 자체로, 평화주의자의 생활에서 분리될 수 없는 신념, 태도와 습관으로부터 성장하는 생활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의 삶에서 기본요소는 무엇일까?

기본요소를 설명하기 위해서 1차 대전 이전(마치 선사시대와 같이 멀게 느껴진다) 내가 공립학교에 다니던 11살 때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서 과거 세월 동안 때때로 나는 그 사건을 기억해 냈다. 1년이나 2년전에 있었던 일처럼 특별하게 유의미있는 것으로 그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날 오후에 우리 반에서 뒷줄에 앉아서는 반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덩치 큰 아이가 선생님에게 야단 맞기 위해 앞으로 불려나가게 되었다. 그 말썽장이는 앞으로 걸어 나가는 길에 반에서 작은 축에 속했던 한 아이의 자리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작은 소년이 자기 발을 통로쪽으로 몰래 내밀고 있었기 때문에 덩치큰 아이는 작은아이의 발에 걸려서 넘어졌고 그 때문에 선생님의 발에 자기 엉덩이를 부딪히게 되었다. 선생님은 과거 행적으로 봤을 때 이 또한 덩치 큰 아이의 장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몰래 내밀어졌던 그 발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가르침의 존엄과 권위에 대한 또 다른 불경"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덩치 큰 아이는 그의 행동 때문에 추가로 야단을 더 맞고 벌도 받았다.

우리 모두는 그날 오후에 학교가 끝났을 때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우리가 행진해서 걸어나가는 것을 계단 위에서 보고 있을 때 선생님이 우리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까지 평소보다 더 점잖게 교실을 걸어 나가 홀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고 문을 빠져나왔다. 문을 빠져나오자 마자 말썽장이와 그 졸개들이 그의 주위에서 둘러섰다. 이윽고 작은 아이가 걸어왔고 우리들도 주위에 둘러섰고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덩치 큰 소년이 어깨를 뒤로 빼더니 말했다. "네가 날 함정에 빠뜨렸어"

물론 우리는 작은 애가 훌쩍거리면서 거기서 빠져나가려고 노력하거나 도망을 치거나 혹은 최선을 다해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애는 그 자리에 침착하게 서서 말했다. "응 내가 그랬지"

말썽장이는 발을 옮겨 놓더니 다시 돌아섰다. 이윽고 그는 돌아서서 그들의 졸개들과 걸어나갔다. 곧 작은 애도 걸어나갔고 우리들도 걸어 나갔다. 많이 실망하면서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마도 다섯가지 일이 이 사건에 관련되었을 것이다. 첫 번째, 작은 애는 기대 밖의 일을 했다. 두 번째, 그는 그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세 번째로 그는 진실을 말했다. 네 번째, 그는 두려워 하지 않았다. 다섯 번째, 물리적인 힘이 아닌 다른 수준으로 갈등이 옮겨갔기 때문에 그는 다른 종류의 힘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종류의 법칙이 그 상황을 조정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 작은 애는 예상치 못한 일을 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상황에서는 둘 중에 하나를 하는 경향이 있다. 싸우려고 시도하거나 싸움을 통해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만약에 우리가 둘 중에 한가지를 하게 되면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는 명확하다. 그것이 일반적인 형태이고 그는 일반적인 형태에 따라 행동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다르게 행동하면 그는 경계를 무너뜨리게 된다. Richard Gregg가 말했듯이 도덕의 분류가 jiu jitsu 그에게 수행되는 것이다(a sort of moral has been performed upon him).

깊이 있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인간은 매우 다양하다.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각이 독립된 존재다. 각각이 독특하다. 창조성의 중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찾는 것은 준거(conformity)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것과 똑같이 옷을 입고 말하고 행동한다. 각자가 자신이 행동하기를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준거의 효과는 발을 묶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발을 제대로 쓸 수 없고 몸이 자연스럽게 작동할 수 없도록 몸 전체를 변형시킨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기대된 것을 하도록 긴장이 조성된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말하듯, 우리는 "분풀이를 해야"만 한다. 우리가 긴장을 발산하려면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는 "누군가에 분풀이를 하게"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 즉 종교적 평화주의자들은 한쪽에서 생각해보면 단순히 자신이 하기를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 자신들 안에 존재하는 창조성이 작동하도록 하는 사람들, 결과적으로는 규율에 따를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대신에 그들은 신선하고 근원적이며 자발적인 것을 하는 것이다. 나는 평화주의자들, 평화주의를 향한 사람들과 기독교인들, 혹은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자발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이 내부에서부터 유기적으로 끓어오르게 하기 보다는 외부의 압력아래서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가 하도록 원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해야만 한다는 느끼게 됨으로써 타인의 노예가 된다. 압력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항상 격화된 방식으로 압력에 대항하기 때문에 외부세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서 환경을 뛰어넘어 긴장을 발생시킨 그 상황을 전혀 중요하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신선하고도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을 할 때 힘과 삶의 효율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전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방식을 시각화하면서 사람들이나 상황에 대해서 습관처럼 했던 것 보다 더 많이 우리의 상상을 이용해야한다. W.H. Auden은 그의 저작 "현대의 기도(혹은 현대의 기도자? : Modern Prayer)"에 나온 훌륭한 구절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그는 신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 "숙달되고 암기한 것 같은 응답을 금하소서(하지 말아달라?prohibit sharply the rehearsed response.)"

전쟁과 같이 무기로 무장한 사업은 상상력의 결여를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인데 전쟁은 이미 숙달되고 암기한 것 같은 응답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무기를 만들면서 말한다 :"본질적으로 나는 이 총으로 누구도 공격할 생각이 없고 특별히 누군가를 두려워 하지도 않지만 나는 내가 안전하기를 원한다. 나는 다만 위험이 제거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나면 다른 나라는 무슨 짓을 하는가? 뭔가 본질적인것? 뭔가 다른 것? 뭔가 독립적인 것? 절대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는 말한다 : "본질적으로 만약 1등 나라가 총을 가지고 있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언젠가 흥분되는 일이 생기면 총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국가도 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첫 번째 나라가 하는 짓은? 첫 번째 나라는 예외없이 이렇게 말한다 : "나는 다시 완전히 방어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내가 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도 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과 같은 상태일 뿐이다" 그래서 두 번째 총을 가지게 된다. 두 번째 나라가 하는 짓은? 두 번째 총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기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총 하나가 발사되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뭔가 본질적인것? 뭔가 다른 것? 결코 그렇지 않다. 모든 총들이 발사되는 것이다. 이렇게 지루할데가... 정말 상상력이 빈곤하다...

이제, 작은 소년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는 자기가 잘못했음을 인정했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뭔가 깊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잘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분리된 존재, 껴안아야 하고 포기 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일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기반하게 된다. "그를 보면 나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야. 일이 잘못되었기는 하지만 내 잘못은 아니야"

따라서 자기 자신을 똑바로 세우게 되면 마음속에서 영적으로 타인을 누를 수 있을까? 나는 영적인 공격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영성이 타인의 영성을 습격하고 죽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한 것이다 : "'살인하지 말지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마음속에서라도, 그의 생명 아래서, 형제에 대해, "너는 바보다!"라고 말하면 지옥불의 위험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서로 숨길 수가 없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을 높은 곳에 올려놓으려고 뒤에서 싸운다. 그들은 자기 정신을 방어하면서 말한다 : "흥!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는군, 그러나 내가 보여주겠어" Like the Japanese when we passed the Oriental Exclusion Act.

그것은 여성지원사회, 평화단체, 교회협정 같은 가장 존경받을 만한 집단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내부 전쟁, "우리들 사이에 전쟁"은 말(term)에 대한 관습적인 인식 안에 있는 전쟁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어떻게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단 한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는 노력을 멈춰야 한다. "물론 나는 내가 그래야만 하는 것보다 더 좋지는 않다. 물론 나는 잘못을 했고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우리들 자신 내부에 있는 역사의 원천(springs)을 정화하자"고 Jacques Maritain이 말했다. 사람들이 타인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즐거웠던 과거에 탐닉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할 때 아름다운 상황을 만들 수 있고 냉정함을 치유할 수 있는 있는 것이다!(What a healing coolness and sweetness comes into a situation when people quit indulging in the so-pleasant pastime of confessing other people's sins and begin to confess their own!)

국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지금까지 가장 위험했던 것은 모든 국가들이 신이 만든 우주의 사원에 감히 들어서서는 "신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특히 세리들이나 비열한 나치놈들, 개같은 파시스트 놈들, 악마같은 일본놈들과는 다릅니다," 라고 말한다. 만약 독일 사람이라면 "이 나약해빠지고 위선적인 영국놈이나 미국놈들과는 다릅니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사원 안에서 그의 머리를 숙여 절하지 않고 가슴을 치면서 말한다 : "신이시여 나 같은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란 말입니다"

세 번째로 작은 소년은 진실을 말했다. 이것 역시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우리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작은 사건이 벌어지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할 때 "자, 네 얘기를 해봐, 나도 내 얘기를 할테니..."라는 식으로 말한다. 왜 그저 자기 얘기를 솔직하게 하지 않는가?

우리는 사업상의 관계에서도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전혀 진실이 아닌 영업상의 이야기를 한다.

정치적이고 공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두 말한다 : "나는 민주주의를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로 신뢰하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실천됨으로써 거두게 된 민주주의 열매, 민주주의의 이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분이 만나고 있는 사업가들은 John L. Lewis 나 William Green 혹은 지역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절대 권력에 대해서 설득력 있게 이야기 할수도 있지만 그들은 자기 행동으로 그들이 진심으로 관심있어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 사업에서 계속 황제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 뿐이니 민주주의에 대한 무의미하고도 어리석은 생각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노동운동 지도자는 월스트리트나 거대기업에 대해서 능숙하게 이야기 할수도 있찌만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자신의 조합에서 계속 황제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들 역시 민주주에 대한 무의미하고도 어리석은 생각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뒤에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지 않을 때 갑자가 상황이 해결되고 향유가 상황으로 오는(a balm comes into it) 방법을 모두가 알아채지 못할까? 카드는 탁자위에 놓여있다. 누구도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는다. 국가들 사이의 진실로 충만하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히틀러가 국가와 민중이 위기에 처했을 때 진실을 말한 적이 있을까? 정치가들이 자기가 말하려든게 무엇이든지 간에 히틀러에게 진실을 말한 적이 있을까? Did Mr.Chamberlain, after Munich, when he went home and said, "The Dawn of peace has come on earth," and then made a speech in Parliament, the burden of which was, "Now we've got to arm more rapidly than we ever have before"?

거짓말이 있는 곳, 솔직함이 결여된 상황에는 부패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실패할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폭탄과 총알이 아니라 거짓말과 탈세가, 사람들이 지구를 피로 적시도록 죽일 것이다.

네 번째로 작은 소년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많은 순간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것이 전쟁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야생동물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야생동물을 만났을 때 공격 받을 가능성이 훨씬 낮다. 물리적이고도 심리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동물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동물이나 인간이 두려워하면 그러한 상황에서는 두 개의 중심적 긴장이 존재하게 되고 다시 여러분은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앙갚음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한쪽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긴장을 해소시킨다. 긴장이 흘러서 빠져 나갈 수 있게 하는 빠른 지팡이(lightning rod)가 있다. 긴장을 지속시킬만한 것도 없었기에 긴장 폭발이 필요하게 될 이유가 없다.

싸움이 일어나면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두려움이라는 마귀를 몰아내고 안전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작해야 순식간에 일어난다. 무언가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었을 때 내면에 두려움이 있다면 나의 적은 나의 두려움을 심화시킨다. It brigns to the vanquished animal the sickening fear of the defeated, the mortally stricken. 두려움은 승리자의 마음에도 있다. 현재의 승리자가 강한 자가 곧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안전하게 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두려워 하기를 멈추면 된다. 예수가 늘 말했던 것이다. "너희의 마음이 근심하게 하지 마라"

어떻게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가? 핵심은 단순하다. 단순히 자신을 걱정하고 껴안는 것을 멈추면 된다. 위험에 처해서 붐비는 군중속에 있는 아이를 돌보는 엄마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직 아이의 상황에만 열중하게 된다.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그만둬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라. 인류를 사랑해라.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오, 미국!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나라들 보다 훨씬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소유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꽉 잡는 짓도 그만둬라. 스스로를 전진하게 하라. 인류를 사랑하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완벽한 사랑은 두려움을 던져버린다" 그리고 작은 사랑이더라도 두려움을 떨치게 한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유대인과 흑인을 사랑한다고 가정해 보자. 히틀러를 이렇게까지 두려워 할까? 굶주리고 있는 유럽과 아시아의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류, 약을 보낸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지금처럼 두려울것이라 생각하는가?

마지막으로 작은 소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망간다든가 혹은 맞서 싸운다거나 하는 힘의 전통적인 사용을 옆으로 치워두었다. 다른 종류의 힘이 작동되었다. 기적적으로 자기 손을 자기편에 두고 무방비 상태로 서 있었던 그 소년은 안전했다. 덩치 큰 아이는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우주에는 두종류의 힘이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원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힘이 있고 영적인 사랑의 힘, 신이 있다. 이것들 중에서 우리가 사용할 힘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은 인생의 법칙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인 것이다. 두가지를 모두 사용할 수는 없다. 가장 큰 어려움 중에 하나는 다른 많은 상황에서도 그러하지만 케익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먹을 수 있기도 바란다는 것이다(즉 두가지를 모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전쟁 속에서 살기를 원치 않지만 "모든 것과 같이" 한쪽에 승리를 가져오고 다른 쪽은 패배시키기를 원한다. 그들은 싸우는 사람들에게 총을 건네주고 싶어 하지만 자기 자식들이 총에 맞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we have to choose the plane on which, and the weapons with which, we are going to fight ; and then take consequences. 만약 우리가 물질적인 무기를 가지고 물질적 단계를 만족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 가장 큰 것을 가져야만 한다. 만약에 여러분이 어떤 작은 나라라면 이러한 기초에서 볼 때 여러분은 처음부터 행운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큰 나라라면 어떤 상황일까? 여러분은 스스로를 "난공불락"으로 만들어야만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난공불락"이라니, 무슨 뜻일까? 이것은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거나 충분히 동맹되어 있어서 잠재적인 적들이나 수많은 적들을 만나더라도 이길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하다 못해" 자기가 판단한 대로, 국가의 국민생활권(lebensraum, 나찌가 주장하던 국민생활권)을 위해서 필요한 지구의 영토, 천연자원, 시장을 확보하여 지킬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우월한 군사적 힘에 의해서 수많은 다른 나라를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그것이 히틀러와 일본이 하고자 했던 것이고 그들의 공격이 목표하고 있다고 우리가 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나라들 혹은 "주축이 되는 국가들"을 난공불락으로 만들려는 노력의 결과는 모든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전쟁의 비용에 무기력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맞아요, 그러나 만약에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들이 규칙을 깨뜨리는 국가들에 대항해서 집단적 힘을 기꺼이 공동관리한다면 우리는 집단적인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할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와 승전국들이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려면 (1)총체적인 무장해제 (2) 대부분의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국제적인 권위 (3) 19세기와 1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의 중요한 십년간 얻었던 것 보다 더 확장된 정의에 기초해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을 재분배하는 세계 기구내의 새로운 협약이 있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이러한 안전을 세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도덕적인 것이며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다른 조건들이 부재한 상태에서 물질적 힘의 우위는 불가피하게 다른 그룹에 대해서 한 그룹의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이익을 원상태로 굳히려는 오래된 노력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집단적인 안전을 결코 보장하지 못한다. 아마 집단자살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재 국가들은 이러한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요구사항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거의 제시하지 못한다.

다른 종류의 힘이 존재한다 ; 영적인 힘이다. 다른 종류의 방어가 있다 ; 신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쉽지는 않다. 제국의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 오는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민족이 또 다른 제국,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돌아설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언자가 말했다. "이집트인들은 신이 아니다. 그들의 영웅은 육체이지 영혼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실제로 답했다 ; "맞아요. 문제는 그것뿐이죠. 이집트는 큰 나라, 강한 나라, 무장한 나라입니다. 신으로만 그들을 대적할 수 없어요. 그들의 영웅들은 육체입니다. 어떻게 더 많고 더 좋은 경주마들없이 그들을 대적하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인 힘은 실제하고 신도 실제한다. 그리고 신의 존재와 신의 의지가 실행되고 있음을 믿는 사람들은 정말 안전하다. "되돌아가서 쉬고 있으면 너희가 안전해 질 것이다. 침묵과 확신 속에서 너희는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나면 정의가 황야에, 올은 것이 비옥한 토지에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옳은 것을 실행하는 것이 평화이다. 옳은 것의 결과, 침묵과 확신이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평화롭게, 안전한 거주지에서 조용한 휴식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영구적인 힘은 조용하고 끈질기며 건설적이며 소동과 고함소리가 사라지고 우두머리와 왕이 떠난 후에 올 것이다. 소동과 고함소리는 항상 사라지고 우두머리와 왕은 항상 떠난다.

물론 이러한 힘 위에 세워진 사람의 몸을 죽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3일 후에 내가 다시 일어나리라" 예수가 말했고 세계는 전에 보다 더 많이 그를 생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약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으면 그것은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것이다"

우리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it is what we were made for. let us embrace it, live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