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여학생, 정치에 눈뜨다
노 전대통령 분향소 찾아 자원봉사
정부 정책 토론도 남학생보다 많아
“촛불 경험공유가 정치 성숙도 높여”
한겨레 이완 기자
» '얘들아 슬퍼하지 마라!' 25일 오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분향소에서 조문을 마친 여중생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나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의 초반을 이끌었던 10대 여학생들이,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와 영결식 뒤 집회에도 대거 나타났다. 이들은 교복을 입고 분향소를 찾기도 했고, 조문을 마친 뒤 촛불을 들고 가려는 걸 막는 경찰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영결식이 열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양초를 나눠주는 등 자원봉사 활동도 했다. 남학생에 견줘 여학생의 모습이 훨씬 더 많이 눈에 띄었다. 박찬욱 영화감독도 “분향소에 갔을 때 새벽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등굣길 여고생들이 밀려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왔다. 우리나라는 여고생들이 짊어지고 갈 나라가 아닌가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 청소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진 지난달 29일 밤 서울광장에 있던 송상현(18·고3)양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단순히 불쌍하다는 얘기보다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얘기를 친구들과 많이 한다”고 했다. 김하나(15·중3)양은 “중3도 사회 시간에 민주주의를 배우는데, 정치가들이 여기에 나와서 민주주의가 뭔지, 여론이 어떤지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양은 영결식 뒤 떨어진 쓰레기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시간째 줍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단지 슬퍼서가 아니라, 뭔가 구체적인 이유를 지니고 나온 셈이다. 지난해 촛불 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을 연구한 이창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학생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며 “지난해 촛불 집회 때만 해도 먹거리라는 이슈의 특성 때문에 나오지 않았나 할 수 있었는데, 올해도 나오는 것을 보니 이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해 가는 거 아닌가 생각된다”고 진단했다.

여학생들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는 <한겨레>에 보낸 전자우편에서 “한국은 아직도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사회인데, 아들, 특히 장자에게는 ‘좋은 학벌’을 따고 사회에서 ‘성공’하라는 가족의 압력은 훨씬 더 크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기에 남학생에게는 심적인 여유가 대단히 부족한 데 비해, 여학생들은 ‘학습기계’가 되라는 강요에 반기를 들 만한 여지가 더 크다”고 했다. 남녀 공학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윤은진 교사도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과 얘기를 해 보면 성별 차이가 조금 있다”며 “남학생들은 ‘정치는 뻔하다’며 자신을 더 경쟁력있게 만들려는 면이 강한 데 반해, 여학생들은 비판의식을 더 발전시키는 편”이라고 말했다. 영결식 뒤 서울광장에서 열린 추모제에 나온 이윤경(18·고3)양은 “남자애들은 노무현 대통령 얘기를 해도 반응이 없다. 스포츠나 게임 얘기를 더 좋아한다. 여학생들은 점심시간 때 텔레비전을 켜 놓고 영결식 보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10대 여학생들이 정치적으로 급진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배은경 서울대 교수(여성학 협동과정)는 “10대와 20대 초반 여성들은 ‘미선이 효순이 촛불 집회’ 때부터 집합적 경험을 나눠 가졌다. 또 이미 사무직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 여성의 현실을 보고 있기 때문에 정치의식이 더 급진화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지난해 청소년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역사적 경험’을 묻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가장 많이 꼽은 것은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역사학)는 “이들이 이번에 ‘평생 투표하겠다’는 실천을 얘기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의식의 급진화보다 몸의 생활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