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시인이며 영문학자인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


3.1운동 때에는 YMCA 학관에서 배운 영어로 독립선언서를 번역하여 구미 각국에 알리기도…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은 1898년 5월 9일 서울 맹현(孟峴, 종로구 가회동)에서 변정상(卞鼎相) 씨와 진주 강(晋州 姜)씨 사이의 3남으로 출생했다. 호는 수주로 광복시인이며 수필가, 영문학자, 언론인, 한학자이기도하다. 그의 가족으로는 법률가인 삼청(三淸) 변영만(卞榮晩) 씨가 그의 맏형이며, 자유당 정권 때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바 있는 일석(逸石) 변영태(卞榮泰) 씨가 그의 가운데형이다.

그는 1907년에 사립중앙학교(中央高普 전신)를 다니다가, 1910년에 사립 계산학교(桂山學校)와, 1912년에 YMCA청년회 학관 영어과를 졸업했고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산호대학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천성적으로 방랑벽이 있었기 때문에 중앙학교 졸업을 두 달 앞두고 어린 나이로 만주 안동현 지방을 유랑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3년인 16세 때에는 『청춘(靑春)』지에다 영시 「코스모스」를 발표하기도 했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YMCA에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구미 각국에 널리 알리기도 했으며, 1920년에는 동인지 『폐허(廢墟)』를 내기도 했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을 출간했고, 1933년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월간 『신가정(新家庭)』의 주간이 되었다. 1948년에는 영시집 「Grove of Azalea」를 출간했고 1949년에는 서울시 문학상 문학부분상을 수상했다. 또한 1953년에는 수필집 「명정(酩酊) 40년」을, 1954년에는 「수주수상집(樹州 隨想集)」을, 1959년에는 「수주시문선(樹州詩文選)」을 출간했다.

그 밖의 사회활동으로서는 1916년에 YMCA 청년회 학관의 영어교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서 1918년에 중앙고보의 영어교사,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1946년 성균관대학 영문과 교수, 1950년 진해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 1953년에 대한공사 이사장을 지냈다. 영자신문 Korean Republic의 발간인이며, 국제 Pen-Club 한국본부 창립발기인․초대위원장으로서 1955년에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 Pen-Club 제 2차 연차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1961년 3월 14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복시편(光復詩篇) 중의 ‘꿈팔아 외로움 사서’라는 시 한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꿈팔아 외로움 사서

산골 사쟀더니

뭇새 그 음성 흉을 내

갖은 꽃 그 모습 자아내서

이슬 풀 그 옷자락 그립다네


꿈팔아 외로움 사서

바닷가 사쟀더니

물결의 수없는 발 몰려들매

하늘과 먼 돛과 모래밭은

서로 짠 듯 갖은 추억 들추인다


꿈과 외로움 사이 태어나서

외로움 꿈 사이 숨지나니

별이 하늘에 박힌 듯이

달이 허공에 달리듯이

꿈과 외로움의 두 틈 사이

잠자코 말없이 살으리라


이 시에서 그의 꿈 많고 외로움 많았던 그의 생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편, 1912년 YMCA 학관 영어과를 졸업하자 이듬해 「코스모스」라는 처녀작 영시를 발표했는데, 게일(J. S. Gale) 박사가 이 시를 읽어보고 천재적인 시작이라고 격찬을 하면서 수십 매를 직접 타자해서 고국 친구들에게 소개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정규학교도 아닌 YMCA 학관 영어과에서 배워 영시를 쓰게 되었으며, 영어과 선생으로 지낼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 제일 가까이 모신 분이 월남 이상재 선생이었다. 월남 선생은 수주를 무척 사랑했으며, 그의 3형제를 친자식같이 애지중지했다. 1957년에 월남선생의 유해를 한산(韓山)에서 경기도 양주군으로 이장할 때 그 비문을 수주가 썼는데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생께서는 웃음 가운데 눈물을 감추시었고, 봄바람같이 부드러우시면서도 산악같은 위엄을 지니시었다. 벼슬은 하시었으나 영달에 팔리지 않으시었고, 부귀를 탐내지 않으실 뿐 아니라 뜬구름과 같이 보이시었다. 슬프다. 선생께서는 가시었다.…」

이렇게 비문을 마무리지었는데,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중 특기할 것은 삼일운동의 방법을 지정하신 것이다… 다수인은 한결같이 살육을 주장하였으나 오직 선생이 남을 살육하느니보다 우리가 죽기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고 제의하시었다…」


등걸

-1981.11.1.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