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 : 민족대표 33인중 YMCA 관계자 9명

․YMCA직원(5명) - 오화영, 박희도, 이필수, 양진백, 이승훈

․YMCA이사(2명) - 정춘수, 최성모

․YMCA회원(2명) - 이갑성, 박동완


우리는 3.1운동 모사과정에서나 운동진행에서 YMCA 총무였던 윤치호나 또 이상재의 주도역할 불투명이란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윤치호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의 문제도 있겠지만, 3.1운동이 어떤 국내조직기관의 공적개입이란 차원에서 수행될 수 없었다는 객관적 사실을 시인하여야한다. 기독교회나 천도교나 어느하나에서도 그 거국적 조직의 공식 대표성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은 공개결의과정이란 노출이 운동전체의 비밀 진행을 당초에 파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YMCA역시 어떤 인사가 참여하였든지, 그것은 다 개인적인 양심과 판단에 따라 규합된 운동이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시인하여야한다. 이상재는 만일 <일본 정부와의 담판이 있을 때 그를 내세우기 위해> 명의를 대표로 내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있다.

33인의 민족대표 중에는 16명의 기독자가 들어있다. 그 중에서 직접간접으로 YMCA와 관련된 인사는, 당시 학생부와 회우부의 간사였던 박희도(朴熙道, 1888-1951), 초창기 체육부 간사였던 이필주(李弼柱, 1869-1932), 종교부 위원장이었던 오화영(吳華英, 1879-1950), 하령회의 강사를 여러번 담임한 양전백(梁甸伯), 회원활동에 열정을 쏟던 박동완(朴東完, 1887-1944), 이갑성(李甲成,1891-1981), 강연회 등을 여러차례 주관한 정춘수(鄭春洙,1875-1951), 최성모(崔聖模), 그리고 오산학교 창설자이며 그 학교 기독학생회 설립자인 이승훈(李承薰)이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개성의 강조원 목사가 독립선언서의 함경도지방 반출 연락에 크게 활약한 사실이다. 그는 오화영과 박희도에게서 받은 선언서를 원산(元山)에 가지고 가서 낭독 배포하였던 것이다. 그는 YMCA의 중요 멤바로 일하고 있었다

일제 통치체제하에서 YMCA와 같은 무게있는 조직체가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그 조직이 동원되었을 때 그 조직자체가 괴멸 당할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박희도가 기독청년 동원의 대사를 진행하며서 대관원(大觀園)이나 승동교회 및 정동교회에서 회합을 가졌던 사실은 그의 조시스러운 판단에 기초한, 뚜렷한 역사적 감각의 행동이었다. 윤치호가 총무로 있으면서 신익희(申翼熙)가 교섭해 왔을 때 <뒤에서 멀지감치 따라가겠다>한 말은 회피하기 보다는 조직 책임자의 쓰라린 자기견제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3.1운동과 YMCA정신

YMCA의 명예총무인 전택부는 1957년 최남선이 별세하기 전 찾아가 3.1독립선언서 초고자로서의 솔직한 심정을 듣고 그것을 기록에 남겼다. 최남선은 선언서 초고에 기독교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인하고 자신의 사상적 배경이 기독교임을 고백했던 것이다. <나의 사상에서 기독교적 요소를 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독립, 자유, 정의, 평등이란 개념의 기독교적 유래를 피로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회택이나 이상설, 이준 등이 무시로 모여 국사를 모책하는데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전덕기(全德基)의 <감화가 큼>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3.1 정신과 YMCA와의 관계의 실제 있었으며, 또 어떤 것이었던가. YMCA와 조직상의 관여가 없었다면 그 정신적 연계는 어떤 것이었던가.

여기 우리는 이상재의 경우를 살펴 그 진상을 궁구해 보는 것이 현책이라고 본다. <朝鮮의 勇氣와 信念의 典刑>으로 <毅然히 朝鮮敎會의 柱石>이었던 이상재에게서 YMCA의 모습을 보고 3.1운동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신념체계를 판단할 근거는 그의 YMCA 행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 구원의 길이 <정신적 갱생>이란 기독교적 이념에 있다는 자각의 중요성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다. 이것이 YMCA 학관출신인 변영로가 지은 이상재 묘갈명(墓碣銘)에 나타나있다.

…번연히 깨달으신 바 있어서 기독교를 신앙하시고 반생을 청년훈육에 바치시었다.

그중 특기할 것은 3.1운동의 방법을 지정하신 것이다. 그때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가 함께 모의를 거듭하실 때 다수인은 한결같이 살육을 주장하였으나 오직 선생이 남을 살육하느니보다 우리가 죽기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고 제의하시였다. 그리하여 무저항 비폭력의 혁명운동이 처음으로 전개되어 인류역사상에 우리가 영광스러운 사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재에 관한 글은 좌우 보혁 사방에서 수백에 이른다. 그러나 어느 하나에 그를 한치도 한 획도 비판 성토한 글이 없다. <절대적인 성실과 지고의 비자기중심>이 그의 알려진 성품이었다. <선생이 거인이 아니시면 어떤 사람이 거인이겠는가> 따라서 3.1운동에 임한 그의 자세 결정은 그의 이런 인품과 신념에서 정확히 판단되어야한다. 함께 YMCA에서 지낸 브록크만이 그 정곡을 찔러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이상재 이상 그 민족의 정치적 영감에 깊이 이르렀던 사람이 누구이랴. 그러나 열혈청년의 극렬한 정신에 그만큼 현명하게 그리고 건전하게 상담자가 되어 주었던 사람이 다시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영원한 가치가 지고의 것이요, 산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은 그 정신에 따라서 진행되어야 했다.







한국YMCA 운동사

3․1운동과 지방조직 확대

재일본 한국YMCA회관에서 일어났던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한국YMCA와 관계가 깊은 학생들에 의해 이룩된 것이며 국내의 3․1독립운동에 대해서도 큰 영향을 주었다.

첫째, 3․1독립선언의 초안자인 최남선이 기독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인사였다는 사실이다. 최남선은 어려서부터 기독교서적을 많이 읽었고 그대의 애국지사들은 대개가 기독교 교인들이었던 만큼 그들과 자주 접촉하는 동안 자연 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최남선은 본래 자유사상이 농후한 사람이었으며 독립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정의니 하는 말이 다 기독교에서 나온 개념이므로 그의 사상속에 기독교의 영향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 및 YMCA 관계자가 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33인을 종교별로 나누어 보면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16명의 기독교인을 교파별로 보면 장로교인 7명, 감리교인 9명의 비례로 되어있다. 이 중 YMCA 관계자는 9명이다. 즉 정춘수, 최성모, 오화영, 박희도, 박동완, 이필수, 양전백, 이갑성, 이승훈 등 9명이다

. 이 9명의 관계인사들을 다시 분석하면 박희도는 당시 YMCA 회우부 간사이며 학생책임자였고 이필수는 본래 구한국정부 때 군인으로서 초창기 YMCA 체육부 간사였으며, 오화영은 Y이사이자 종교부 위원장이었으며, 정춘수, 최성모 양씨는 Y 이사위원을 거쳐 일요강화 하령회의 명강사였으며 이갑성, 박동완 양씨도 YMCA에 수시로 드나드는 열성위원이었으며, 양전백은 선천 신성학교 창설자로서 그 학교 학생기독교청년회의 창시자이며, 특히 그 학교를 창설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서울Y의 박승봉과 이상재와는 오래전부터 동지관계에 있었다.


YMCA와 3․1운동과의 관계는 이상과 같았으나 Y는 이밖에도 미국위원단을 맞이하여 제 2차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주도적 구실을 했다.

미국정부는 윌슨대통령이 선포한 민족자결주의원칙이 약소민족들 사이에서 잘 이행되어 가는지를 조사하기 위하여 1920년 8월 미국의 상하 양원들로 구성된 시찰단을 극동에 파견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도 그들에게 외교활동을 맹렬히 추진하였거니와 서울에 있는 지도자들도 YMCA를 중심으로 하여 ‘미국의원시찰단환영회’를 조직하였다. 환영회 임시사무실을 중앙YMCA 회관에 두고 환영식때에는 윤치호씨가 사회를 하고 환영사는 이상재가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동아, 조선 두 신문과 손잡고 기사와 모금활동은 청년층이 맡게 되었다. 일선에서 뛴 사람으로서는 동아일보의 장덕준, 경제회(경제회)의

이풍재, 중앙청년회의 신흥우 등이었다.

미국의원시찰단 일행은 일본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8월24일 300여명의 경관이 삼엄하게 경계하는 속에서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했다. 이때에 환영회 간부들은 한바탕 시위운동을 벌리려했으나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위원단을 만날 방법이 없었다. 총독부 당국은 시찰단이 조선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총독부 관서와 시내관광을 한 뒤 그날 저녁으로 출발하겠금 짧은 일정을 짜놓았다. 경찰이 삼엄한 경계망을 펴놓았기 때문에 환영회 간부들은 도저히 그들에게 접촉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환영회 측은 25일 아침에 조선호텔에서 비공식으로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상재는 신흥우를 데리고 아침 일찍 조선호텔을 방문했는데 정문을 지키고 있던 일본경관이 이상재를 시골농부로 잘못 알아 무난히 정문을 통과하여 일행 중 한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는 친절하게 영접을 받아 YMCA에서 계획한 환영대회에 나와줄 것을 교섭하여 허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1시쯤 되어서 조선호텔에서 비밀서한이 오기를 「사정이 의하여 3시에 가려고 하던 것을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일본총독부 당국이 못가게 방해한 때문이었다. 이에 환영회간부들은 크게 실망하고 모였던 사람들은 하나 둘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위원단일행 중 허어스맨(H. S. Hersman)이라고 하는 위원이 위원단 일행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자동차에다 미국국기를 달고 YMCA회관에 나타났다. 그때는 환영회가 유회되는 줄 알고 모였던 사람들이 다 해산한 뒤였지만 윤치호는 사무실에 있다가 그를 맞아들여 강당에 올려 세웠다. 그러자 관중이 다시 모여들어 800명이나 되었다. 이날 허어스맨은 “조선청년 여러분! 어디까지나 정의와 인도로 항상 발전하도록 분투하시오”라는 연설을 했다. 이상재씨가 답사를 했다. 청중이 우레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는동안 종로경찰서장이 수백명의 정복경찰을 인솔하고 달려와서 강단에 올라가 허어스맨을 데리고 나가게 하고 군중을 해산시키려 했다. 그리고 경찰은 문간에서 시민들을 마구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차며 폭행을 가했다. 이 광경을 보고 허어스맨은 “무슨 연고로 조선인을 때리며 감금하느냐, 만일 조선인을 내보내지 아니하면 나도 나가지 않겠다”하며 경찰서장과 다투었다. 결국 허어스맨 위원은 본국에 돌아가 이 광경을 신문에 크게 소개했다. 그 시찰단의 단장인 J. H. Small씨도 나중에는 환영회 간부들에게 감사장을 전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비단 국내만 아니라 일본정계와 미국조야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시찰단이 다녀간지 약 2주일이 되는 9월 10일부터 5일간 서울에서는 YMCA전국연합회 제 3회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를 계기로 청년회 간부진에 큰 변동이 생겼다. 이때 신흥우씨는 이리하여 윤치호, 이상재, 신흥우가 명실 그대로 3거두의 강팀을 이루게 되었다. 그때 신흥우는 38세, 윤치호는 56세, 이상재는 71세였다.

1914년 개성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가 조직될 당시에는 지방청년회로서는 재일본 한국YMCA 하나만이 있었고 그것고 유학생 위주의 청년회였기 때문에 완전한 지방청년회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리던 것이 국내에서 지방도시에 청년회를 조직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아짐에 따라 제 1차적으로는 조직된 것이 함흥YMCA였다. 이러한 지방청년회의 조직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무단정치하에서 기존단체마저 해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처음으로 지방청년회가 창설되었다.


민주시민훈련

YMCA의 시민논단은 60년대 종반에 개설된 이래 모든 장애를 견디어내면서 70년대말까지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서울․광주․부산․대구 등 YMCA가 시민노단을 통한 민주시민훈련의 중심광장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더 한층의 제약이 가해져 서울YMCA등지에서는 1978년 말로 일시 중단상태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