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장 농촌운동의 기본계획과 국제 제휴
제1차 농촌 기초조사를 마친 YMCA 당국은 1924년 신흥우 총무를 미국에 파송하여, 당시 YMCA 국제위원회 총무 모트(J. R. Mott)씨, 브로크만(Flecher S. Brockman, 한국에 있는 Frank M. Brockman의 친형), 페니(J. C. Penny, Penny Store 백화점 경영자) 씨 등과 만나 레이크 플래시드(Lake Placid)에서 5인 회담1)을 했다. 이 5인 회담에서 그들은 우선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
(1) 전국에다 10개 지역을 선정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파송한 전문간사를 배치한다.
(2) 이 전문간사는 1925년부터 시작하여 1년에 2명씩 5년간에 10명을 파송한다.
(3) 이 전문간사들은 전부 농촌 문제 전문가라야 하는 동시에 YMCA 정신과 목적에 투철한 사랑으로 한다.
(4) 조선기독교 청년회 연합회는 10명의 외국인 전문간사와 함께 일할 수 있는 한국인 간사 10명을 가져야 한다.
(5) 각 지역에는 회의도 할 수 있고 교육도 할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하며, 농사 개량과 농작물 증산을 시범할 수 있는 최소 한도의 농토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 계획에 합의를 본 YMCA는 또 다른 회의를 가졌다. 즉 1926년 4월 5일부터 9일까지 5일간 서울에서 한국 YMCA의 농촌사업을 연구 추진하기 위한 세미나를 열게 되었다.2)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1) 한국 Y측에서는 윤치호․이상재․신흥우․구자옥․홍병선 등 5명, (2) 본래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인 간사로서 브로크만(F. M. Brockman)․반하트(B. P. Barnhart)․내시(W. L. Nash)․그레그(G. A. Gregg) 등 4명, (3) 농촌사업의 전문간사로 새로 파송되어 온 외국인 기술자로서 어비슨(G. W. Avison)․쉽(F. T. Shipp) 등 2명, (4) 국제위원회를 대표하여 브로크만(F. S. Brockman)․라이언(D. W. Lyon) 등 2명, 도합 13명이었다. 이것이 곧 간부지도자들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 대한 보고서는 라이언(D. W. Lyon)씨에 의하여 작성되었는데, 이제 그 보고서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3)
(1) 농촌운동의 필요성 ……… 한국에는 75,000명 이상의 인구도시는 서울외에는 하나도 없다. 35,000명부터 75,000명까지의 인구 도시는 6개, 35,000명부터 25,000명까지 인구도시는 16개, 그래서 이 22개 도시 인구는 약 750,000명이다. 전체 인구의 약 85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인구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은 곧 한국에 대하여 사업을 아니한다는 것이 된다. 한국 농민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져있다. 전체 국토의 20퍼센트만이 경작이 가능한 농토이며, 전체 농민의 4분의 3이 소작이다. 더욱이 농민들은 이자가 비싼 빚을 내어서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해마다 총생산고의 30퍼센트 내지 48센트에 해당한 이자를 고리대금업자에게 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농민들은 서로 협동하여 농사짓는 방법을 개량하고 소기업으로 발전시키지 아니하면 희망이 없다. 농민들은 싼 이자로 농자금을 얻어 가지고 종자를 구입하고, 비료를 사고, 농기구를 살 수 있는 방법과 농산물을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누구가 이러한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가? 이것을 하기 위하여 서양 선진국에서 쓰던 방법을 수입할 수 있는가? 한국YMCA는 이러한 절망적인 시기에 부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원조가 불가피하다.
(2) 목적 ……… 농촌사업의 기본 목적은 농민들의 정신적․문화적․경제적 향상에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농민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살게 하며, 일상 생활을 통하여 정신적 가치를 인식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문맹자가 없게하며, 농사의 개량과 협동정신을 키워 줌으로써 그들의 경제상태를 향상시켜야 한다.
(3) 재정 조달 ……… 농촌 운동에 관심이 있는 도시 청년회와 학생 청년회가 필요한 재정과 자원 지도자들을 조달해야 한다. 그리고 해당 농촌은 최소 한도의 집회 장소를 장만하고, YMCA 연합회는 필요한 서적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YMCA 연합회는 모든 연합회 직원들의 생활비를 전담해야 한다.
(4) 출판물의 조달 ……… 각종 문서와 서적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문맹퇴치를 위한 교과서, 농민들의 이자 문제를 해석한 소책자, 농사 개량에 대한 설명 책자, 그밖의 소책자가 필요하다. 농민들에게서 책값을 받는다면 인쇄비 정도의 돈만 받아야 한다.
(5) 실무자의 훈련 ……… 도시 청년회와 학생 청년회는 실무자들을 농촌에 파송하기에 앞서 그 실무자들의 지도력 양성과 훈련에 특별히 주력해야 한다. 최초부터 중앙에는 중앙 훈련소를 두고, 지방에는 지방별 훈련소를 두고, 통일된 계획하에서 지도자 훈련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지방 훈련소는 그 지방에서 선발된 각 촌락의 지도자들을 훈련한다. 훈련 사업의 성공여부는 훈련에 필요한 시설이 충분하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6) 외국인 간사들의 임무 ……… 외국인 간사들의 농촌사업에 있어서의 주요 임무는 다음과 같다.
㈀ 외국인 간사는 해당 청년회가 제정한 여러 가지 정책과 원칙을 수행하는 전문가이며, 청년회 사업의 기술자이다.
㈁ 외국인 간사는 한국인 간사의 자문과 또는 협조자로서 그 업무 집행의 찬조자이다. 업무집행의 전 책임은 수임받은 한국인 간사들에게 있다.
㈂ 외국인 간사는 청년회와 선교사 단체 사이에서 봉사하는 연락관 구실을 하는 자이다.
㈃ 그리고 외국인 간사는 청년회와 선교사 단체의 밀접한 연관 관계를 수립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크리스챤이 되게 하며, 지도력을 강화하고 국제적인 이해 증진을 창조하는 자이다.
이상 외국인 간사들의 임무 규정은 그들이 다른 나라에 와서 봉사할 때에 갖기 쉬운 인종 차별의식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문화적 배경이 다른 나날에 와서 일한다는 사실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이 한국에 오기 전에 얼마나 훈련을 많이 받고 얼마나 교양을 많이 닦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의 개인적 능력과 인간성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4)
40장
농촌사업의 개시와 교계 대표자 협의회의 소집
……… 중략
반면에 YMCA 운동은 우선 기구 개편을 단행했다. 즉 1925년 2월을 기하여 이때까지 Y 연합회와 중앙청년회의 총무를 겸임했던 신흥우 총무로 하여금 Y 연합회의 총무만을 전담케 하는 동시에, 6월에 기서는 학생부 간사 홍병선으로 하여금 신설될 농촌부 간사를 겸임케 했다.5) 따라서 11월에는 Y 연합회 내에 농촌부와 도시부를 신설하고 각 위원회에 5인씩의 위원을 선임했다.6) 그 결과로 평양과 원사Y를 제외한 중앙(서울Y)․선천․함흥․교남(대구)․광주․신의주 등 6개 도시 Y가 일제히 농촌운동을 시작했으며, 학생Y로서는 숭실전문학교(평양)․영명학교(공주)․영생학교(함흥)․광성고보(평양)․송도고보(개성) 등이 농촌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7)
따라서 농촌운동의 더 활발한 추진을 위하여 Y기관지인 청년(靑年)을 1926년 1월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YWCA)와 협동해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자 각 신문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취재했다. 즉 1925년 벽두 1월1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신흥우 총무는 『금년부터는 노동 야학을 확장해서 노동자와 무산자를 위하여 고등한 겁보다 보통교육을 실시해서 다대수의 편의를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금년부터는 사업의 입장을 바구어 도시를 버리고 전체의 8할 이상이나 되는 농촌의 계발을 표준하고 일을 하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경제적으로 파멸을 당하고 있지마는 정신상으로는 점점 결심하자는 것이 보이므로 장래에 많은 희망을 붙이고 기뻐합니다. 』8)라고 말했으며, 또한 동아일보는 2월 14일자 기사에서 “농촌에다 천당 건설”이란 제목으로 중앙기독교청년회의 새사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도회 생활은 헛생활이다. 조선인의 10분의 8까지가 농촌의 소작인들이다. 조선인은 무엇보다도 농촌 계발에 힘을 써야 되겠다는 취지로써 시내 종로에 있는 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는 농촌사업을 새로 계획하고, 우선 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10리 내지 30리 이내의 여러 농촌으로 전문지지식을 가진 회원을 파송하여 석달(3개월) 동안을 일기로 하고 간이 교육 강습소를 설치하여 문맹의 동포에게 지식을 주어, 농민의 고문이 되어 농작물에 대한 것은 물론이요, 위생에 관한 것이든지 혹은 농가 부업이든지를 무보수로, 직접 원조를 하여 농촌의 향상 발달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리라는데, 때때로 활동사진과 환덩을 이용하여 촌민에게 오락을 주고, 또 한달에 한번이나 두 번씩 명사를 청하여 농민에게 필요한 통속적 강연을 하게 하리하더라』고 대대적으로 기사를 취지했던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노동자 무산자를 위한 사업』이라든가 『농촌에다 천당건설』등과 같은 용어는 그당시 『무산대중의 유토피아』 또는 『계급도 없고 차별도 없는 공산 사회 건설』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용어와 일맥상통되는 데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을 통하여 그당시 청년회가 민중에게 얼마나 적극적으로 호응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청년회 간사 이대위(李大偉)씨는 더 구체적으로 노동자 농민 운동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민중화(民衆化)할 금일(今日)과 농촌개량문제”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전세계 인구 16억중 10의 8과 9는 노동자라 할 진대, 그네들을 제외한 이론이 합리(合理)적인 이론이 될 이유가 무엇이며, 그네들을 제외한 운동이 합리적인 운동이 될 것이 무엇인가? 그리하여 과거의 뭇 사회 개조가들 중에 톨스토이와 러스킨 같은 이는 그의 운동중의 최고봉은 오직 농민에게로 나아가라 하였으며, 레닌 같은 이는 전 러시아로 하여금 공산주의까지 실행케 하였으되…내지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만도 1천8백만이라 하고 그중의 농민과 노동자를 제한 외에 다른 계급이 몇사람이나 되는가? 이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한 문제이오 긴급한 문제이다』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