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토착화를 주장한 변성옥 박사

-목사, 정치가, 신학교 교수, YMCA 총무


감리교회 목사․신학교 교수․정치가․YMCA 총무이던 변성옥 박사는 1892년 평양 태생, 1913년에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나왔으며, 도미하여 1926년에 시카고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곧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이어 미감리회 조선연회의 종교교육부 간사로 시무했다. 1930년 12월에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될 때에는 유형기(柳炯基), 김성실(金誠實) 등과 함께 합동총회의 간부로 활약했으며, 그 뒤 조선감리회 선교연회의 만주 선교사로 임명되어 만주로 갔다.


만주에 가서 선교를 하던 중 그는 1935년 1월 조선감리회 북만(北滿)지방회장 현성원(玄聖元)과 그 밖의 한동규(韓東圭), 우인철(禹仁哲), 박세평(朴世平), 김병택(金炳澤) 등과 함께 감리교회를 탈퇴하는 동시에, 그 해 12월에 장로교회의 몇몇 동지들과 함께 「조선기독교회」라는 새 교단을 창설하였다. 동시에 그는 길림(吉林)에다 길림신학교를 창설하고 그 교장이 되었다.


이렇게 새 교단을 만든 데 대하여 그는 몇 가지 이유를 설명했는데, 첫째로 만주선교는 교파를 초월해서 해야한다는 것, 둘째로 한국 교회는 선교부의 재정원조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야한다는 것, 셋째로 기성교회는 부패했으므로 이를 극복하는 동시에 장감 양교파가 연합해서 한국교회의 토착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 등을 내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기성교회의 부패상으로서 그는 몇 가지 실례를 들었는데, 즉 1935년 장로교총회의 분쟁, 감리교 총회와 중부연회에서의 비기독교적인 행위, 적극신앙단 문제 등을 들었다. 그는 조선기독회는 만주에 있는 모든 교회 즉 장로교, 감리교, 동아기독교, 성결교회를 총망라하여 하나의 기독교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국내의 이용도(李龍道), 김장호(金庄鎬) 등 기성교회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혁신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종파들과 강단을 교류하며 총회격인 공의회(公議會)에 상호 대표를 파송하면서 대동단결을 모색했다.


한편 그는 만주 길림성 경도선 강밀봉(江密峰)에다가 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는 동시에 자파 교역자 양성에 주력했다. 특히 그는 교역자들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그 여름에는 농사를 시키고 겨울에는 공부를 시켰으며, 이를 위하여 집단농장을 경영했다.


이렇듯 변성옥은 종교개혁정신과 독립정신을 가지고 만주 선교에 힘쓰다가, 마침내 1943년 길림에서 항일 독립군들과 밀통한다는 혐의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2년 간 옥고를 치루었다.


8.15해방 후 그는 남한으로 피난와서 정계에 투신했다. 즉 1946년 미군정하의 민주의원(民主議院)이 결성될 때 그는 그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47년부터는 민주의원의 부회장이 되었는데, 그때 서울YMCA 총무를 겸해서 취임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1947년부터 세 가지 직무를 겸직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극도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무릅쓰고 YMCA 재건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YMCA에 대해서는 무보수로 봉사했던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제헌국회가 성립될 때에는 정계에서 떠나 전적으로 YMCA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분서주 남한 전역을 순방하면서 지방 YMCA를 재건하는 일과 새 YMCA 창립에 전력을 다했다. 한편 그는 간사양성과 지도력 개발에 주력했다.


때마침 종전 후 한국YMCA를 도와주기 위하여 파송되어서 내한한 핏취(G. A. Fitch) 박사를 맞이하여 그와 손잡고 맹활약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는 1950년 3월 청주지방에 출장을 갔다가 급성췌장염 때문에 순직하고 말았다. 응급수술로 회생을 기도했으나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핏취 박사는 다음과 같은 애도의 말을 했다. 즉

「나는 이 친구의 죽음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더 가까이 내 곁에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의 정신적인 공적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 동지애, 평화 일정하의 2년 간의 옥고생활, 그의 선비다운 고상한 인품, 그의 신앙, 겸손과 온유의 정신은 YMCA 동료들과 전 국민에게 오래오래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등걸

-1982.11.1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