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1> YMCA의 농촌운동과 협동조합운동


1920년대 민족 개량주의 농촌운동이 한창일 때 농촌계몽운동, 농사기술보급운동 특히 협동조합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YMCA 농촌운동의 시작은 당초 미국이나 영국을 통하여 들어온 YMCA운동은 농업이 지배적인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는 반성하에 출발했다. 우선 당시 YMCA 총무였던 신흥우 총무가 1923년 겨울을 서울 근교 농촌에서 3개월 간 살면서 농촌실태를 조사한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방향이 정해진 것 같다.

이렇게 제1차 농촌조사를 마친 YMCA는 1924년 신흥우 총무를 미국에 파송하여 당시 YMCA 국제위원회 총무 모트(J.R.Mott), 브로크만(Fletcher S. Brockman), 한국에 있는 Frank M. Brockman의 친형), 페니(J.C.Penny, Penny Store 백화점 경영자) 씨 등과 마나 레이크 플래스드(Lake Placid)에서 5인 회담을 했다.


   이 5인 회담에서 그들은 우선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

(1) 전국에다 10개 지역을 선정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파송한 전문간사를 배치한다.

(2) 이 전문간사는 1925년부터 시작하여 1년에 2명씩 5년 간에 10명을 파송한다.

(3) 이 전문간사들은 전부 농촌문제 전문가라야 하는 동시에 YMCA정신과 목적에 투철한 사람으로 한다.

(4)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는 10명의 외국인 전문간사와 함께 일할 수 있는 한국인 간사 10명을 가져야 한다.

(5) 각 지역에는 회의도 할 수 있고 교육도 할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하며, 농사개량과 농작물증산을 시범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농토를 마련해야 한다1)는 결정을 하고 농촌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즉 1925년 2월에 YMCA 기구를 개편하여 홍병선으로 하여금 새로이 신설된 농촌부 간사의 업무를 맡게 하고 서울 Y, 선천, 함흥, 고남(대구), 광주, 신의주 등 6개 Y가 농촌운동을 시작했다고 하여 YMCA 국제위원회는 협약에 따라 1925년 5월에 쌀에 대한 전문가인 아비슨( )씨와 농촌교육에 대한 전문가인 쉽( )씨가 파송되어 왔다. 또 1928년과 1929년에 외국인이 각각 1명씩 와서 한국인 지방간사와 짝을 지어 1929년 1월부터 홍병선(洪秉璇), 계병호(桂炳鎬), 최영균(崔瑛均), 이순기(李舜基), 이기태(李基台) 등이 주관이 되어 농촌사업을 했는데 중앙와이의 이기태가 신촌의 덴막식 고등농민학교(농민강습소)의 책임자가 되었고, 농촌부간사 홍병선은 중앙지부반과 전국순회를 담당했다고 한다.

농촌사업의 대략의 내용은 정신교욱(종교활동), 보건교육(체육, 성교육, 식생활개선, 가정치료법), 농사개량지도(종자개량, 비료사용법, 원예, 양잠, 과수재배, 임업, 농기구사용관리), 농촌계몽 및 문맹퇴치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이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들 사업의 성과를 보면, 1925년 4월부터 26년 9월까지의 농촌운동의 실적을 보면,

1. 농촌사업조직을 끝마친 촌락수 ---- 23개

2. 농촌사업을 실행중인 촌락수 ---- 121개

3. 농촌사업을 실행중인 단체수 ---- 16개

   (Y연합회의 농촌부 소관 3, 도시와이 6, 학생와이 7)  

4. 사업에 종사하는 직원수 ---- 161명(유급2, 무급 159)

5. 사업경비 ---- 12,350원 ( 이 경비 중에는 총무나 간사로서 농촌사업을 돕는 직원의 봉급도 포함)

6. 농민회(기타 농촌단체 포함)수 ---- 14개

7. 수업을 마친 생도수 ---- 3,500명

8. 현재 수업중인 생도수 ----3,200명 2)


그리고 1926년 9월부터 1929년 5월까지의 농촌사업의 성과를 보면 다음 통계와 같다.

1. 농촌사업조직을 끝마친 촌락수 ---- 188개

2. 농촌사업을 실행중인 촌락수 ---- 170개

3. 농촌사업을 실행중인 단체수 ---- 18개

   (Y 연합 농촌부가 직접 하는 것 3, 도시Y 9, 학생Y 6)

4. 사업에 종사는 직원수 ---- 385명 (유급 37명, 무급 362명)

5. 협동조합수 ---- 49개 (조합원수 1,692명)

6. 기타 농촌단체수 ---- 90개 (단체원수 3,910명)

7. 사용경비 ---- 9,998원39전 (전임강사의 봉급, 인쇄, 여비 등)

8. 수업을 마친 생도수 ---- 4,856명

9. 현재 수업중인 생도수 ---- 5.793명3) 등으로 되어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YMCA 농촌사업은 장로교파와 에큐메니칼운동으로 발전되어 가는데 이런 방향으로의 변화는 1928년의 예루살렘선교대회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1930년 9월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농촌부를 신설하고 ---- 현재 사업은 진행중인 YMCA 농촌부와 협동하기로 결정하고 또한 장․감교 양파 선교사로서 조직된 선교부 농업전문가회가 탄생되었다. 그리하여 1929년부터 1934년까지 60여 개의 강습회에서 7,200명의 학생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사업 중에서도 중요한 사업은 신촌의 고등농민수양소와 농업협동조합운동을 들 수 있다.


신촌의 고등농민수양소 : 와이 연합회는 연희전문학교의 땅 1만2천평을 빌어 가지고 신촌에다 정말식 고등농민수양소를 차려 전국에서 유능하고 열성있는 청년들을 선발하여 1931년 11월부터 시작했는데 겨울 4-5개월 간씩 교육을 실시했다. 수업은 YMCA 간사들과 연희전문학교 교수들이 담당케 했는데 주로 농업기술교육이었고 이기태가 담당했었다.


협동조합운동 : 협동조합운동은 1928년 신흥우와 홍병선이 덴막(덴마크)을 시찰하고 다녀온 후 홍병선의 주관하에 진행되었다.

“대다수의 농민들이 빚에 쪼들리며 살고 있었다. 연평균 이자가 3부6리 이상이었다. 이 빚 때문에 농민들은 지주에게 땅을 빼앗기고 그래서 소작인으로 전락되고 나중에는 절망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빚투성이에서 농민을 구출해내는 운동이 협동조합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남편들이 노름판에 빠져 정신을 잃고 있을 때에 가정부인들은 끼니마다 몇 줌씩의 쌀을 모아 가지고 시작한 것이 1년에 35원의 자본금을 만들 수 있었다. 보통 40가정이 모여서 한 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적금이 300원에 이르면 조합원들에게 싼 이자로 영농비, 비료값 등으로 돈을 빌려주게 되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단결심은 농산물 판매에도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사과의 경우 함흥Y는 사과판매조합을 만들었다. 사과 한 알에 보통 1전 5리밖에 안되는 것을 일본에 수출하면 3전부터 5전까지는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YMCA 간사가 일본까지 출장가서 일본업자와 수천 상자의 계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사과를 협동판매조합에 가지고 가서 일일이 감정을 한뒤 제 1착으로 1천상자를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4천상자를 수출했다. 이 협동판매조합은 농민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얻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확신과 희망까지 안겨 주었던 것이다. 협동조합은 신용조합, 판매조합, 소비조합 등으로 그 요구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써 했다. 이것을 통틀어 협동조합이라 하는 것인데 1929년 5월가지 전국에 협동조합이 49개 (조합원수 1,692명)이었다. 1950년의 통계에 의하면 ‘서울지방에는 협동조합이 11개, 소비조합이 5개, 판매조합이 11개 있었다. 그때 농민들은 4부 이자가 하면 4부대신 1부로 돈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31년 4월에는 중앙청년회회관에 협동조합 연합회를 결성하였고, 1932년의 통계에 의하면 협동조합이 65개에 총 자본금이 11,273원에 달했던 것이다.4)

이와 같이 협동조합운동이 활발히 진행된 것은 YMCA의 유능한 전문가들에 의하여 지도되었고 특히 홍병선에 의하여 경기지방이 활발했던 것이며 1930년에는 홍병선은 전문가로서 ‘농촌협동조합과 조의법’이라는 협동조합책을 저술했다. 이와 같은 YMCA의 협동조합운동도 일제의 농촌운동 탄압의 시기를 맞아 1933년 농촌진흥운동의 추진에 의하여 부락내의 부락진흥회에 강제로 합쳐지는 수난을 당하면서 1935년경에는 거의 해산을 당하게 되었고 1937년에는 중앙의 협동조합도 해체되고 만다.

이외에 우량종자보급 사업과 우량가축 보급사업도 했으며 YMCA는 농촌운동을 위하여 많은 출판물도 출간했는데 농촌과 관련된 것으로서는 홍병선의 ‘농촌협동조합연구법’ ‘정말과 정말농민’ 등의 단행본의 출판과 ‘이동(里洞)과 기독청년회’는 등사판으로 밀어서 출판했으며, 1929년 2월부터는 월간지 ‘농촌청년’을 2천2백부씩 출판했다.

농민들의 교과서격인 ‘농촌총서’, ‘농촌지남(農村指南)’, ‘농촌요람(農村要覽)’ 등을 발행했다.

이와 같은 YMCA 농촌운동은 당시 기독교가 일반농민대중과의 접촉을 확대하여 선교적 역할에 중대한 역할을 했고 이 사업에 국제기구에서 원조한 자금액은 1929년부터 1930년까지 10만1천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1934년에는 국제위원회의 농업전문가를 소환해갔고 차츰 지원을 중단하게 되어 농촌사업이 여의치 않았는데 때 마침 농촌진흥운동에 탄압되어 종결되고 말았던 것이다.5)

 

자료출처: 「한국농민운동사」 대한YMCA 연맹, 3, 일제식민지하 농민운동중 6) YMCA의 농촌운동과 협동조합운동 부분을 실은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