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평신도상을 심어준
해사(海沙) 김명선(金鳴善) 박사
-인술을 통해 영혼을 구혼하는데 힘써
해사(海沙) 김명선(金鳴善) 박사는 1897년 10월 17일, 지금은 이북 땅이 되어버린 황해도 장연군(長淵君)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에서 태어났다. 송천리는 보통 ‘소래’라고도 하고 ‘솔내’ 또는 ‘솔샘’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소나무가 울창한 계곡에 맑은 샘물이 콸콸 솟아 문전 옥답에 물을 넉넉히 대어주면서 황해바다로 잇고 있으며 소나무 숲과 바닷가의 모래밭, 그리고 그 위에 만발한 해당화의 절경은 유명하다.
그보다도 소래 마을은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이기도 하다. 대개는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처음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미 소래마을에는 복음의 씨가 심겨져 있었다. 소래마을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평북 의주 태생의 서상륜(徐相崙) 씨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씨는 26세 때(1873년) 만주로 인삼장사를 떠났다가 중병에 걸려 고생하던 중에 영국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인 맥킨 타이어(T. McIntye) 목사와 로스(T. Ross) 목사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케 되었다. 그는 예수교 신자가 되는 것은 물론 로스 목사와 함께 살면서 한국말을 지도해주고 동시에 영어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누가와 요한복음을 출간한 그는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1883년에 고향에 돌아왔으나 신변의 위협으로 당숙이 살고 있는 소래 마을로 거처를 옮겨 비밀리에 교회를 설립하고 성경을 가르치게 됐다. 또한 1887년 가을엔 언더우드 목사를 초청하여 자신이 전도한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소래교회는 교회로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 기독교의 발상지로서 역사 깊은 곳인 소래 마을에서 김 박사는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894년 동학난 때 예수믿는 동네에는 동학군이 쳐들어오지 못한다기에 이곳에 피난을 와 이때부터 정착했다고 한다. 김 박사는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고, 철저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895년에 교회 건물을 새로 지은 후로는 학교 교사(校舍)를 겸하여 평일에는 동네 남녀 청소년들에게 한글부터 깨우치게 한 후 한문공부를 시키는 등 신학문을 보급했다.
김명선 박사를 만난 이들은 대개 그에게서 한국 초대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참다운 그리스도인 상을 찾아볼 수 있다고들 한다. 그는 한평생 학원과 교회를 위해 사신 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브란스와 연세대학교 등 기독교 기관 외에도 김 박사는 미군정청 문교부 의학교육 담당관, 대한민국 학술원 종신회원, 문교부 장관 고문, 보이스카웃 한국연맹 총재, Y연맹과 서울Y의 이사, 대한가족계획협회 회장,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 한국법인 유한재단 이사장, 세계 대학봉사회 한국본부 이사장, 국제 키와니스클럽 한국지부 회장, 사회복지법인 명휘원 창립이사, 평화통일정책 자문회의 상임이사 등 일반 사회와 단체를 위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많은 활동을 했다.
젊어서는 신학공부를 위해 일본 고베(神戶)에 있는 중앙신학교에 입학한 적도 있는 김 박사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육신을 살리는 일을 통해 함께 이루어야겠다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로 귀국하여 세브란스 의전, 즉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입학했고 1925년에 졸업한 이후 돌아가시기까지 연세대학교 안에서 생활하셨다.
김 박사는 장로의 직분도 극구 사양하고 남대문교회의 평신도로서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고 서울YMCA 계묘구락부 회원으로서 Y를 위해 힘쓰셨을 뿐 아니라 성서공회와 기독교서회 등 기독교 연합단체에도 많은 공헌을 하셨다.
참다운 평신도상을 본으로 보이신 김 박사는 1982년 4월 2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나셨으나 그의 모습은 많은 이의 기억 속에 깊이 머무르고 있다.
등걸
-1982.6.1.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