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한국인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
-세브란스 교수, 독립과 인권의 수호자
「내가 죽거들랑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그리고 내가 평소에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계속 도와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죽은 고(故)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는 1919년 3.1운동 때 한국민족을 위해 싸우다가 일경에게 강제 추방을 당한 우리 민족의 은인이다.
그는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리크주(Warwickshire) 럭비(Rugby)시에서 출생, 고향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뒤 19세 때(1907) 캐나다로 이민 가서 토론토대학 수의학과에 입학, 고학으로 1910년 동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한 뒤 모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하다가 1916년, 세브란스의 전교장 어비슨(O. R. Avison) 박사의 초청으로 내한하여 세균학, 위생학 등을 강의, 한국이름을 석호필(石虎弼)이라 짓고,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무척 존경하여 스스로 그의 수양아들로 자처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하세가와(長谷川) 총독 등 고위층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규탄, 영자신문 Seoul Press에다 반박논문을 기고, 수원 근처의 화성군 제암리, 수촌리 사건 등을 일일이 답사하여 그 진상을 폭로, 서대문 형무소․대구 형무소 등에 수감되어 있는 유관순․어윤희․김마리아 등 여성 애국지사들을 일일이 심방하면서 그 석방을 호소했다.
그는 일제의 잔악한 행위를 사진으로 찍어 그것을 국내외에 보도하는 동시에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했다. 그러자 일제는 당황한 나머지 1920년 4월 그를 암살하려 기도했다. 그는 다행히 살아남기는 했으나 결국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과 캐나다를 역방 하면서 한국에서 찍은 사진과 원고를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고자 했다. 그는 워싱턴의 이승만 박사를 찾아가 이 문제를 논의했고 캐나다에 돌아와서는 모교인 토론토대학에서 병리학을 강의했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재질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1935년에 토론토대학의 정교수가 되었고, 1952년에는 독일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에서 명예수의학 박사학위를 얻고, 54년에는 미국수의학회에서 국제수의학상을 얻고, 캐나다 수의학협회에서는 훈장을 타기도 했다.
1958년에 한국정부 초청으로 다시 내한하게 되었는데, 처음 서울에 와서는 서울대학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강의했으며, 1962년 모교인 토론토대학 개교 100주년 기념식 때에는 명예법학박사의 학위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세계적인 수의학자이며 세균연구가로서 불철주야 학문에 몰두하면서도 한국인의 독립과 인권수호를 위해서는 시간과 정열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58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다시 내방한 뒤에는 여생을 한국민족을 위하여 바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1960년 4.19 학생의거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경찰이 학생들에게 포격을 가하는 것을 보고서는 「원 그럴 수가 있을까? 어리석은 것들, 어린 학생들에게 함부로 총질을 하다니!」하면서 급기야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이승만 독재정권을 여지없이 비판하는 동시에, 「이번 학생의거는 3.1 독립운동의 영웅적 정신의 재현」이라 극구 찬양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1960년 12월 12일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1년 5.16 군사혁명 때에는 한국의 현정세로서는 군사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지적한 다음 「한국에서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 적이 없다」고 한탄하는 동시에 「이번 군사정부는 마지막 희망이며 마지막 기회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는 그때로부터 1970년 4월 12일 82세로 이승을 떠날 때까지 약 10년 간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 그는 남북 아메리카 및 유럽의 친구들이 만든 “스코필드 기금(The Schofield Fund)"에서 나오는 돈과 자기의 월급을 전부 털어 고아들과 고학생을 돕는데 썼다. 그래서 호랑이 할아버지로 통하는 이 스코필드 박사 옆에는 항상 이런 고아들과 고학생들이 떠나지 않고 모여 살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YMCA를 항상 잊지 않고 도와주었다. 1960년대에는 YMCA가 허물어진 회관을 지을 때인데, 가끔 100불도 보내주고 50불, 20불도 보내주면서 회관건축비로 보태 쓰라고 했으며, YMCA가 경영하는 삼동소년촌에도 가끔 돈을 보내주었다.
그가 이승을 떠나자 정부에서 그를 동작동 국립묘지의 애국지사 묘역에 사회장으로 모시게 했으며, 3.1운동 때 은혜입은 수원 근처의 화성군 수촌리 동민들은 거기에다 3.1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장문의 비문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져 있다.
『이제 우리 후진들은 수촌마을의 독립지사들과 호랑이 석호필(石虎弼, Schofield)의 고귀한 정신을 뒷날에 길이 전하고자, 여기 기념비를 세우니…』했던 것이다.
등걸
-1982.12.1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