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건축사의 선봉자

이명원 선생


-이 선생은 젊은 간사로서 일제의 경제적․폭력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열성 회원들과 함께 YMCA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내가 직접 만나본 Y원로회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높으신 회원이었다. 선생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약 10개월 전인 1884년 2월 25일 서울에서 이경윤(李慶允)씨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개화되어 1906년에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부터는 궁내부(宮內府) 주사를 지냈다. 그러나 월남 이상재 선생의 권유로 YMCA학원 영어과에 입학하여 1911년에 제 3회로 졸업, 이어 그 간사가 되었다.

선생이 간사로 있을 때의 일인데, 1913년 당시 부총무로 있던 김 인(金 麟)이 일본 총독부의 사촉을 받아 YMCA를 파괴하려 할 때, Y 이사회는 그를 파면결의한 일이 있었다. 선생은 이 결의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동지들과 함께 밤중에 뛰어 다니면서 긴급 회원총회를 열었던 것이다. 2월 27일에 열린 이 긴급회원총회에서는 만장일치로 김인을 파면시키기로 결의하고 일제의 파괴공작을 사정에 방지했다. 이에 대하여 선생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청년회학관 영어과를 졸업하고 YMCA 간사가 된 새파란 청년이었지요. 그때 총독부 관리들은 YMCA안에까지 정탐꾼의 감시망을 쳐놓고 우리를 꼼짝못하게 했지요.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이 김인이라는 부총무였는데, 어떤 자들은 질레트 총무와 몇몇 외국인을 죽인다는 조건 하에 총독부로부터 공작금을 타먹고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요? 마침 며칠 전에 이사회가 김인을 파면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힘을 얻어 그 자들과 한바탕 싸울 작정이었습니다. 현흥택(玄興澤) 씨의 아들 현동식 같은 청년은 단독으로 그자들을 때려죽인다고까지 했지만 그게 되요?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월남 선생의 사전 허락을 받고 밤중에 회원들에게 기별하여, 비밀리에 그 이튿날 임시 회원총회를 소집했습니다. 이것을 뒤늦게 안 김인 일파는 강당 문을 박차고 회의장에 입장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만장일치로 이사회의 파면 결의를 지지한 때였고, 김홍식 등의 유도부 회원들이 문을 든든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자들을 일단 힘으로 저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회한 뒤 그자들이 골목에 숨어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도자들을 습격할 것을 염려하여 우리는 호위대를 조직했지요. 우리는 몇 일 동안 지도자들의 집 주의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 소란통에 월남 선생은 팔에 부상을 입었고, 질레트 총무는 결국 쫓겨나 해외로 추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1913년 3월 어느날 아침에는 일제의 무장경관들이 삼엄하게 경계망을 편 가운데 돌로 황성(皇城)이라고 새긴 YMCA 간판자를 땅땅 쪼아버렸는데, 이때에도 선생은 저항운동을 벌였으며, 일제의 압력으로 Y가 경영난에 허덕일 때에는 일종의 육탄전을 했다. 다시 말해서 선생은 학생들과 함께 Y의 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구두, 비누 등 Y제품을 메고 다니면서 팔았으며 1917년 9월까지 1년 간의 공업부 매상고를 약 2만원까지 올렸는데, 이것은 6년 전 매상고인 약 4천원의 5배나 되는 놀라운 매상고였다.

이때부터 우리 한국인은 짚신을 버리고 구두를 신게 되었으며 비누를 사용하는 현대인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Y공업부 간사로 있다가 건축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즉 YMCA는 1916년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실내체육관과 소년부 회관을 짓게 되었는데, 공사는 Y학관 목공과의 김백련과 중국인 등의 감독 하에 주로 공업부 학생들이 맡아했다. 선생도 공업부 간사로서 함께 뛰었는데, 이때에 선생은 건축가로서의 기초를 닦게 되었던 것이다.

1922년부터 1945년까지 23년 간은 유명한 건축가로서 선교부, 감리교 등 건물을 도맡아 지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초대교인으로서 그 교회의 건물을 비롯하여 교회학교를 많이 지었다. 말하자면 선생은 우리나라 현대건축사의 선봉을 섰던 분이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순전히 월남 이상재 선생의 비서격으로서 선생을 보좌했으며, 월남선생이 의암 선생과 비밀연락을 할 때에도 선생이 그 연락 책임자였다. 그리고 월남선생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는 「내가 본 월남선생」이란 글을 남김으로써 월남선생이 기독교의 수령임에도 불구하고 33인 민족대표 중에서 빠졌는가 하는 의문을 풀어주는데 무게 있는 고증을 했던 것이다.

8.15해방 후에는 YMCA 이사, 배재학교 사친회 이사, 조선방직 이사, 경신학교 사친회 겸 건축위원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봉사했다.

그 부인 홍에스더 여사는 감리교 초대 여자목사가 되었으며, 선생은 부인과 함께 감리교 전도사업에도 직접, 간접으로 많은 공헌을 했다.

1967년 3월 8일 안암동 자택에서 84세를 일기로 조용히 이승을 떠나셨다.


등걸

-1982.1.1.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