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의 기반을 닦은 본회 3대 회장
터너 주교
한국성공회 제 2대 주교와 황성기독교청년회 (즉 서울YMCA)의 제 3 대 회장을 지낸바 있는 A.B.터너(Arthur Beresford Tur-ner) 주교는 1862년 8월 24일 영국에서 출생, 한국에는 1896년 12월 2일에 입국했다.
한국에 와서는 단 아덕(端雅德)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그는 옥스퍼드 케블(Keble)대학과 커데스돈(Cuddesdon)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887년에 옥스퍼드에서 부제(副祭:Deacon), 1988년에 사제(司祭:Priest), 1905년 1월 25일 제 2대 한국성공회 주교로 서품(叙品)을 받고, 1910년 10월 8일데 한국에서 순직하여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힐 때까지 한국 선교의 기반을 닦아 놓은 위대한 선교사이다.
그는 운동선수이기도 했다. 한국에 축구가 도입되기는 1898년쯤 부터인데, 관립영어학교 학생들이 영국에서 도입된 축구 경기를 시작했다. 당시 관립영어학교의 학생이며, 1904년 초대 YMCA체육간사가 된 김종상(金鍾商)씨에 의하면 터너 주교는 어찌나 기운이 세고 공을 잘 찼던지 한쪽 골문대에서 공을 차면 반대편 골문대까지 공이 가 닿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학생들끼리만 공을 차다가 차츰 실력이 붙으면서 매주 수, 토요일 오후에는 훈련원 대청 앞(지금의 서울 운동장)에서 가끔 영국 공사관 팀과 시합을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축구를 도입, 육성한 공로자이며, 그의 제자인 김종상씨가 서울 YMCA초대 체육 간사가 되었다.
그는 서울 YMCA 즉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창설회원이기도 했다. 즉 1903년 3월 18일, 당시 YMCA 국제위원회의 파송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YMCA 창설 작업을 서두르고 있던 질렛트씨의 주선으로 YMCA 자문위원회가 열렸을 때 그는 그 주동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1903년 10월 28일 창립총회가 열렸을 때에는 12명의 창립이사 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이와 같이 터너주교는 한국 YMCA 창립의 중심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YMCA 운동정신을 불어넣어 준 지도자였다. 축구 등 운동경기를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1903년 3월 18일에 모였던 YMCA 자문위원회는 소위 「서울에서는 처음 보는 대표자 회의」로서, 당시 주한 미국공사 알렌(N.H.Allen)을 비롯하여 구 한국정부의 재정고문이었던 브라운(J.M.Brown), 두차례나 고종황제의 밀사로 활약했던 헐버트(H.B.Hulbert), 게일(J.S.Gale), 존스(C.H.Jones), 언더우드(H.G.Under-wood) 등 각 선교사와 실업가, 은행가 등이 여기에 참석했다. 또한 한국정부 측에서는 민영환(閔泳煥), 한규설, 현홍택(玄興澤)등 고관이 참석했으며, 특별강사로서는 당시 중국․한국․홍콩YMCA 전체위원회의 총무이던 브로크만(F.S.Bro-ckman)씨가 초빙되었다.
더욱이 터너주교는 1907년부터 1910년까지 YMCA 회장이었다. 이때는 처음으로 회관을 짓고 크게 기세를 올릴 때였다. 1907년 11월 7일 정초식 때에는 고종 황제가 세자인 영친왕을 공사현장에 보내 「一千九百七年」이란 머릿돌을 쓰게 하여 1908년 12월 3일 준공식 겸 개관식때에는 3일간에 연인원 862명이 참석했고,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이또오(伊藤博文)도 참석하여 장관을 이루었는데, 이때에 터너주교는 회장으로서 모든 회의를 주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터너주교는 한국 YMCA의 가장 찬란한 시기의 지도자였다. 매천야록(梅泉夜錄)의 저자 황현(黃玹)은 새로 지은 YMCA회관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그 집은 높기가 산과 같고, 종현(鐘峴)의 천주교당과 함께 남과 북에 우뚝 마주서서 장안의 제일 큰 집이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때에 터너주교는 YMCA회장으로서 새로운 지도이념과 사업확장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YMCA세력도 가장 강대했던 시기로서, 때마침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던 상동(尙洞)교회의 청년학원과 신민회의 전덕기(全德基) 등 간부들이 YMCA에 들어와 이상재(李尙在), 윤치호(尹致昊) 등 YMCA간부들과 함께 일종의 연합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터너주교는 한국성공회 사상 가장 번성기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서울성공회의 주관 사제일 뿐만 아니라, 1905년 1월 25일 영경(英京)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한국성공회 주교로 임명된 때무터 수원, 평택, 천안, 강화, 인천 등지의 교회설립에 공헌했으며, 교육사업에도 진력하여 강화 온수리에 진명(進明)학교, 수원 진명학교, 병천(並川)진명학교 진천(鎭川)진명학교 등을 설립했다. 특히 가오하 온수리 진명학교는 여성교육을 위한 학교였다.
터너주교는 1910년 10월 28일 과로로 인해 순직, 강화 온수리(溫水里) 성공회 마당에는 「律生三德 救靈衆生 十載服勞 千秋留名」이란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3덕은 곧 믿음, 소망, 사랑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단아덕(端雅德)이란 그의 한국 이름도 그의 아름다운 덕행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의 유해는 양화진 묘지에 모셔져 있으며, 정동교회 1층 소성당은 그의 기념성당으로 되어있다.
(등걸)
-1982.4.1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