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는 2015년 체계적인 성교육을 실시하겠다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적용할 수 있는 국가 수준의 ‘성교육 표준안’을 발표하였다. 표준안 도입 배경과 취지 및 교육과정 등을 담은 총론 성격의 성교육 표준안은 “남녀 간에 조그만 편견이라도 가져서는 안된다”, “성교육 교사는 양성평등을 전제로 지도해야 한다”, “교사의 일방적인 가치의 주입보다는 학생 스스로 다가치(多價値) 안에서 자기 기준을 정해 자율적으로 학습하도록 해야 한다” 등 비교적 상식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교실에서 실제 수업에 활용하도록 만든 교사용 지도서 등 교육 자료에는 성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성차별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남녀의 뇌 구조를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남자는 운동과 게임, TV 생각만 가득하고 여자는 외모와 수다, 화장에만 관심 있는 것처럼 표현(중등)한 것은 기존의 성별 고정관념과 차별적 성역할을 강조하는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미혼 남녀의 배우자 선택 요건에서 여성은 외모를, 남성은 경제력을 높여야 한다는 서술(초등)도 적절하지 않다.
성욕에 대해서도 잘못된 통념을 강화하고 자칫 성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성은 한 특정 남성에게만 성적으로 반응하는 데 비해 남성은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성들과 널리 성교할 수 있다”(고등) “남자의 경우 성에 대한 욕망은 충동적으로 급하게 나타나”(초등) 등의 언급은 남성의 성욕이 여성보다 왕성하며 제어하기 힘든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데이트 비용을 많이 사용하는 남성 입장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게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원치 않는 데이트 성폭력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등)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상식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성폭력에 대한 서술도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성교제가 건전하지 못했을 때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중등) “성관계를 갖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함께 숙박업소에 가지 않는다”(고등) “평소 단호하게 의사결정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등) 등 성폭력의 원인과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뉘앙스의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선 이성 친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시대착오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성소수자 관련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점도 비판을 받았다. “성교육은 교사의 성적 가치를 전수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동성애에 대한 지도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리키는) 용어 사용을 금지”한다거나 “(기존 교육안에서) 성소수자 내용을 삭제” 하라는 문구도 있었다. 이 밖에도 ‘야동’과 ‘자위’ 같은 단어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잘못된 피임법(체외 사정)을 안내하는 등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다양하게 제기됐다.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는 연령이 10대 초반까지 내려온 상황에서 청소년들에게 무조건 ‘성충동’을 억제하라는 식의 금욕주의적 교육은 퇴행적이라는 지적이다.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의 박현이 기획부장은 “오랫동안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해왔지만 20~30년은 후퇴한 내용의 2015년 교육부 성교육 표준안을 보고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며 “성소수자와 다양한 가족형태 인정 등은 인권과 관련해 교육부가 담아야 할 가치인데 혐오세력의 민원 때문에 이를 정치적인 사안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교육부는 학생들이 실질적인 성 지식을 얻고 올바른 성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돕겠다면 표준안을 도입하였다. 성교육 표준안의 내용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성차별과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의 여론이 거세지자 교육부는 지난해 6월 홈페이지에서 표준안과 교육 자료를 삭제하였다. 그리고 외부 용역을 맡긴 후 1년가량 수정 작업을 거쳐서 최근 최종안을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정된 교육 자료에도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수정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청소년 미혼모·미혼부에게 나타나는 문제점은 저소득·빈곤·저학력 등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미혼모가 될 경우 평생 죄책감에 힘들 수 있다’, ‘학생이라는 평범한 행복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등 미혼모·미혼부에 대한 사회적 폄훼를 부추기는 내용이 있다. 초등성평등연구회에서 활동하는 교사들은 “사회교과 등에는 조손가정 등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나와 다르다고 비웃거나 무시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데, 성교육 표준안에서는 엄마·아빠로 구성된 소위 ‘정상’ 가족만 존재한다”면서 “학교 현장에는 한부모 가정이나 시설 아동도 있는데, 그들이 받을 상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교육 자료에 실린 여성의 삽화도 치마나 앞치마를 입거나 임신 상태를 보여주는 삽화가 대부분이라서 성역할에 대한 편견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성폭력에 관해서도 잘못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기존의 관점을 간직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술을 마시고 늦게까지 놀다가 성폭행을 당해” 등의 표현들이 있었다. 또한 ‘남녀에게 맞는 편안하고 안전한 옷차림 찾아보기’에서 여성이 배꼽티와 짧은 치마, 딱 붙는 바지 대신 치마를 입은 모습을 바른 옷차림으로 제시(초등)하고 있었다. 백목련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교육 표준안 전반에 성차별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며 “성차별적 생각은 그저 생각에 머무는 게 아니라 종종 성폭력 가해나 2차 가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한 교육부는 “성교육을 하면서 동성애 등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은 가르치면 안 된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성교육 표준안을 만든 이규은 교수(동서울대)는 “성교육은 태어날 때부터 일생동안 이뤄져야 하는 인격교육이며 전인교육”이라면서 “따라서 10대 임신, 인공유산, 성범죄 증가 등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것만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부 시민단체가 성교육 표준안에 제3의 성을 넣으라고 요구하던데 과학적으로 인간은 남성과 여성만 있으며 제3의 성은 염색체가 없다”면서 “학교현장의 성교육은 남녀 양성평등에 기초해 진행돼야 하며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을 것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기존 교과서에서 동성애 등 다양한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에 대한 내용이 인권적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므로 교육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견해이다. 지난해부터 학생들과 성인지적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서한솔 교사는 “말로는 글로벌 인재가 되도록 가르치라면서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건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편견을 가진 채 자란 학생이 나중에 동성애자가 최고경영자로 있는 애플 같은 세계적 기업에서 일할 수 있겠나. 인권 감수성의 부족은 학생들에게도 손해”라고 강조했다.
심사숙고해서 수정안을 내놓았다는 교육부의 성교육 자료는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많아 지적되고 있으며,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교육부 관계자는 “성교육 표준안은 이미 여러 차례 검증을 거쳤고, 교육자료 역시 비판을 받을 때마다 수정했기 때문에 우리로선 추가 수정 필요성이 낮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수정안에 크게 나아진 게 없다는 교육 현장의 지적이 있다는 질문에는 “성교육 자료는 하나의 참고자료일 뿐이니 시·도 교육청이나 각 급 학교에서 자유롭게 실정에 맞춰 고쳐 사용해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 자료의 기본이 되는 성교육 표준안은 교육 현장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한다. 교육부는 지난해 700여명의 성교육 담당 교사들이 신청한 성소수자 인권 관련 연수를 성교육 표준안에 어긋난다며 중단시킨 사실이 있다.
이신애 교사는 양성평등과 인권 감수성을 강조한 성교육이 공교육의 체계 안에서 빨리 시작될수록 좋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회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기존의 고정관념과 관습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시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참고한 자료>
경향신문. “‘배꼽티·짧은 치마는 안전하지 않아’ 성차별·편견 부추기는 왜곡된 성교육.” 2017. 8. 1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40100&artid=201708112153005
국민일보.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 지켜 동성애가 포함되는 것 막아야.” 2017. 6. 28.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73511
연합뉴스. “교육부 성교육표준안 내용, 性 고정관념 재생산·고착화.” 2016. 7. 15.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7/15/0200000000AKR20160715104500004.HTML
한겨레신문. “‘성교육 때 동성애 언급말라’…교육부 지침 논란.” 2015. 3. 29.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684511.html
한겨레신문. “성소수자 배제한 교육부 성교육 표준안 폐기하라” 2017. 2. 8.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17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