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참여지도론을 수정보완했습니다.
아래 원고는 가능한한 다운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첨부파일은 올려 놓았습니다.
초고여서 글이 거칠기도 하지만, 각주가 많습니다.
원서 번역한 참고문헌이 있습니다.
참고문헌 첨부 작업도 다시 해야 합니다.
다음주 11월20일 무주리조트에서 전북청소년수련시설협회 주관으로 열리는
워크숍에서 청소년지도자분들 대상으로 강의할 원고입니다.

참고하시어 좋은 비판과 제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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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시민참여 지도론

 

정건희 (군산시청소년문화의집 관장)

 

 

청소년지도자의 비판적 사고

사람은 시간을 영위합니다. 같은 시간 동안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지식인, 농민, 상공인 등의 역사적 시간마다의 위치에서의 일들이 다양해 보입니다. 과거 고대 그리스에서 는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해 철학을 가르쳤으며, 근대에 들어서 '시민'이 지식인으로 대접받도록 이들에게 전통적 지식의 교육과 사회규범을 익히도록 했습니다. 이때에 공교육자체가 전통적인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식과 규범을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왔다고 강조하는 분이 계십니다. 시민을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이라 보여집니다.

현대에 들어 과거와 같이 단순한 지식적 사고나 사회규범정도를 익히며 살아갈 수 있는 시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정보․지식 사회라고 일컬어지며 매년 수십만 권의 책이 출판되고, 온라인에서는 엄청난 정보가 넘쳐 흐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구나가 정보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청소년들에게는 일명 know-where족이라는 단순히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찾아 내는 아이들 정도로 치부하는 명칭까지 만들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불과 십 수년 안쪽에 실제적인 삶에서 전해 받았던 일들입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는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다양하게 직면한 수많은 문제들을 가치와 철학에 맞추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하게 정보를 많이 소유하고 있거나, 그러한 정보를 많이 가지려는 능력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미 개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넘쳐 흐르는 정보를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에게 정말 중요한 정보인지를 확인해야 하며, 그 정보를 검색하여 논리적이며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이 중요해 보입니다. 특히 자신의 관점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보를 바라보며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비판적 사고란 '표준이나 기준에 의거하여 내리는 분별 있는 판단, 또는 그런 능력'을 의미합니다. 비판을 비난과 혼동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비난은 일방적으로 남의 잘못이나 결점만을 나쁘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판은 반성적․성찰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비판적 사고란 사람들의 주장을 보다 깊이 있고 다각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반성적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사고의 요소를 크게 목적, 과제, 개념, 가정, 정보, 추리와 해석, 함의와 귀결, 견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개념이나 관념들을 사용하여 어떤 관점에서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는 가정들에 기초를 두고 결론에 이르기 위해 정보를 이용하여 어떤 물음이나 문제에 초점을 두는데, 이 모든 것은 함의나 귀결을 갖는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개념과 관점에 따른 목적이라고 여깁니다. 그 이후의 정보와 기술적 부분들은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유추되어집니다.

제가 현재 학위과정 가운데에 있는 모 대학의 재단을 몇 년전 대기업에서 인수했습니다. 이후 재원을 들여오며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돋움 한다며 개혁을 부르짖고 학과 통폐합, 교수진 등급에 따른 연봉제 등 여러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몇 달전까지 도서관 리모델링 등을 행하며 학교가 온통 공사장 같았습니다. 현재에도 신축건물들이 우후죽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예전보다도 입시경쟁률이 많이 올라갔다며 자랑이 대단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학과의 전공필수과목에 영어와 회계학을 넣자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경영대 교수진을 400여명을 증가시키고, 문과대를 통폐합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근래 모 일간지에서 이 내용을 사실적으로 다루며 여러 논란의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대학은 상아탑이라고 하며 본래 교육의 본질을 이루기 위한 최상급의 학교입니다. 그러한 학교가 언제부터인가 철저히 자본의 논리로만 이루어지며 직업훈련소와 별반 다름없는 기관으로 전락해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미국의 대학을 비판하는 학자분과 논의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미국대학에서는 돈을 주고 유럽권의 인문사회학의 대가들을 수입할 수는 있으나 절대 그러한 인문사회계열의 대학자는 미국대학에서 나오기에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유는 미국대학이 기업과 연계되어지면서 엄청난 자금이 기업에서 대학으로 들어오며 비판적 연구보다는 기업에서 요구하는 연구논문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의 근본 성찰, 자기비판적인 일들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근래 우리 사회의 대학의 모습을 보면서 이를 닮아가는 것은 아닌지 가슴 아픈 점이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대학 본연의 본질적인 최상위 목적을 잃어 버린 데에서 기인했다고 확신합니다. 단순히 밥벌이 수단으로서의 직업 교육 이외의 목적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박한 우리 사회의 단편을 그대로 대학에서 답습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경박하기 이를데 없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적 사고로 성찰하여 새로운 인식과 변화를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그대로 기업의 하부 기관정도로 유지되어지고자 노력하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 청소년지도자들에게 비판적 사고를 가지라고 이야기 합니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비판적 사고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개념과 관점에 따른 목적이라고 했으며, 이후의 정보와 기술적 부분들은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유추되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 청소년지도자들은 무엇하는 사람들인지 비판적 관점에서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레크리에이션, 공동체놀이, 청소년상담, 학습지원, 캠프지도,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물적 지원 등을 잘 하는 사람이 청소년지도자일까요? 이러한 다양한 활동을 행하는 지도자들의 본질적 목적은 어디에 있는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러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나름의 전문성이 있다고 하는지요? 지도자로서의 전문성은 또 무엇입니까?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통한 질문을 기반해서 '청소년시민참여 지도론'에 대한 내용을 풀어가고자 합니다.

청소년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청소년지도자로서 우리가 행하는 최상위 일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이 부분이 현장 뿐만 아니라 청소년학계에서도 명확한 정립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청소년상(靑少年像)은 무엇입니까?

국가부처에서도 교육부도 아니고 노동부도 아닙니다. 거기에 근래 보건복지가족부에서 또 여성부로 이관하게 되었습니다. 정체성 운운하기에는 청소년정책이 구체화된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교육부 하면 정확한 인프라와 지도력, 상위 교육이념과 그에 따른 목적이 정확합니다. 다만 이러한 이념에 부합하지 못하기에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나 모든 이들이 교육부, 학교, 교사들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인식하고 있습니다. 노동부도 마찬가지며, 보건복지가족부도 근래 청소년정책이 통합되어졌지만 일반적으로 보건과 함께 약자들을 중심으로 지원하는 정책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청소년계는 어느 영역입니까?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 폭을 넓히면 학교사회사업, 청소년계에 있는 사회복지사까지 청소년지도자로 포함한다고 할 때 도대체 청소년계에서 추구하는 가장 최상위의 명확한 청소년상은 무엇이며 이를 이루는 지도자상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청소년정책 최상위 이념에 '행복한 청소년'이라는 단어를 조합해 놓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행복이라는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단어를 추동하는 사람들이 청소년지도자입니까? 맞지 않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지난 이년여간 아동정책과 청소년정책을 정부의 밀어붙이기식으로 통합하려 많은 돈과 인력이 낭비되었습니다. 결국 정부의 힘 있는 분들 몇 마디 말로 아무 일 없는 것으로 될 것만 같습니다. 청소년정책은 또 분리되어 여성부로 넘어간다고 합니다. 저는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청소년의 큰 문제가 터졌을 때 마나 축구공마냥 이동하며 움직이는 가장 큰 이유가청소년계의 상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추구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어떠한 청소년을 성장시키기 위해 존재합니까? 청소년지도자가 행하는 일에 리더십, 인성, 자아실현 등 수많은 미사여구를 모두 붙여 놓았습니다. 또한 국가적으로 청소년기본법의 기본이념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활동은 무엇입니까? 자연권 수련시설에서 캠프지도를 잘하면 됩니까? 공동체놀이를 한다며 아이들 지도를 잘하는 사람을 뜻합니까? 상담사라며 아이들의 문제를 직면시켜 해결해 주는 사람입니까? 승마, 천문대 관측 등 다양한 기술을 배워 아이들에게 가르켜 주는 사람입니까? 근래 방과후 사업을 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방과 후에 기관에 오는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약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이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도구는 성적을 올리는 길이라며 방과후사업에 학습지원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기관을 많이 보았습니다. 학습지원 잘하는 사람이 청소년지도자입니까? 이 부분 고민이 많습니다.

현재까지 국가의 청소년정책의 상위법인 청소년기본법의 기본 이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청소년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정당한 대우와 권익을 보장받음과 아울러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며 보다 나은 삶을 누리고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함을 이 법의 기본이념으로 한다.

② 제1항의 기본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장기적·종합적 청소년육성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다음 각호의 사항을 그 추진방향으로 한다.

1. 청소년의 참여보장

2. 청소년의 창의성과 자율성에 기초한 능동적 삶의 실현

3. 청소년의 성장여건과 사회 환경의 개선

4. 민주·복지·통일조국에 대비하는 청소년의 자질향상

청소년기본법의 기본 이념에 수긍하는 바 큽니다. 교육, 노동, 복지 그 어떤 이념에서도 실제적인 청소년의 참여를 강조한 법이 없습니다. 이념 자체가 청소년의 참여를 통한 '민주시민'으로의 성장을 강조한 법입니다. 창의성, 자율성, 환경 등의 다양한 이념은 다른 정책에서도 비슷하게 존재하나 청소년참여에 대한 이념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하는 정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귀한 개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실제적인 활동에는 이러한 이념이 배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기본법의 이념을 현장에서 명확하게 규정하지도 못했습니다. 다양한 곳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하고 있지만 현재 우리 청소년계에서는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것은 매우 더디다고 보여집니다. 학교교육을 무수히 비판하지만, 정작 우리가 추구하는 청소년사업의 내용 또한 비판적 관점으로 살펴보면 비판받을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이러한 정책과 함께 청소년지도자의 기본 정체성을 구현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모든 일들은 비능률적이며 비생산적으로 흐를 공산이 큽니다. 국가 정책적으로도 소외 되고 국민대다수의 지지도 그리 크게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자신이 무엇하는 사람인지 인지되어 있지 않는 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나침반 없는 여행객과도 같은 삶을 계속해서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마냥 아이들 만나며 좋은 일 한다는 소리 들으며, 단순히 월급 받아 연명하는 노동의 최하위 단위로서의 가치밖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좋은 일입니다. 청소년관련 '일'을 하며 월급 조금 덜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행하는 일만 좋은 일은 아니겠지요. 여러 '일' 가운데 지향하는 목적과 이념은 달라도 '일'의 수준을 올리고자 하는 기본적 내용들은 정확합니다. 택시 운전하시는 분들은 택시를 잘 운전하면 됩니다. 환경미화원의 일도 정확합니다. 근래 삼성전자의 냉장고가 폭발해서 이건희 전회장께서 격노하였다는 언론기사를 보았습니다. 삼성전자는 기업차원의 이상적 이념이 존재하나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결국 가전제품을 잘 만들어 보급하는 매우 단순한 지향점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청소년지도자들의 지향해야 하는 가치, 이념, 철학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한 일을 실현하고자 그 어떤 일을 하건 이루고자 하는 근본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청소년의 행복 운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한 행복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작 가치 지향적으로 모두가 수긍하는 핵심적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자기 성찰과 최상위 이념에 따라 실천하는 방식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한 목적에 합당한 사업, 합당한 프로그램 등 합당한 일들을 추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청소년계에서 일어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벤트사와 똑같이 청소년축제하며 무슨 큰 일 행하는 것 인냥 즐겁다 합니다. 입시학원보다도 학습지도 못하면서 방과후 사업에서 학습지도만 주구장창 외치며 성적 올리기에 급급합니다. 무용학원, 미술학원보다도 못 가르치는 예체능 프로그램을 그대로 답습하며 강조합니다. 체험활동 한다며 학교에서의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아이들 이름으로 후원받아 놀이공원 가면서 아이들이 즐거워한다고 만족합니다. 도대체 우리들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시험문제 잘 해결하도록 하는 곳은 아마 입시학원이 제일 잘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왜 청소년기관에 와서 학습지원을 받게 합니까? 승마기술, 기타 치는 방법, 공동체 놀이 지도만을 잘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전문 레크리에이션 지도자가 아마도 청소년들 공동체 놀이는 최고로 잘 하는 것 같습니다. 가끔 레크리에이션 지도자가 청소년지도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자기 정체성 없는 지도자의 나아가야할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이지 심각한 부분이나 우리 현장 지도자들만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나름의 영역과 전문성이 존재하는데 그 전문성이라 이름 붙혀진 일들이 실제 전문가라 칭하는 사람들의 전문성에 비하면 정말이지 보잘 것 없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청소년지도자들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왜, 여러 기술들이 청소년지도자의 전문성이라고 이야기해야 합니까?

우리는 본질적으로 행해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단순히 바쁘다는 핑계대며 내 눈 앞에 있는 단순히 반복 되는 일들만을 계속해서 해결만 하려하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일을 행하는지 모른 채 간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게 됩니다. 결국 내가 만나는 우리 청소년들이 내가 행하는 일의 대상일 뿐, 하나의 생명으로서 소중하게 인식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행위를 재생산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당신은 도대체 "청소년지도자가 무엇하는 사람이냐?"며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청소년지도자는 청소년의 '시민성(Citizenship)'을 키우는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 삶의 환경에 실질적인 참여(engagement)를 시키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시민성을 청소년이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단순한 기술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의 능력을 끌어내고 참여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키타 치고, 춤 추고, 공동체 놀이, 축구, 승마 등의 기술은 이러한 시민성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절대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동체의 한사람으로서 어떻게 공생해야 하는지를 알아 가도록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과제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다양한 기술이 필요할 뿐입니다. 시민성이 청소년지도자의 핵심적 요체입니다. 그 어디에서도 시민성을 체화시켜 현실화 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에서 사회과 교육을 목적으로 다양한 방법이 거론되나 이미 실패했다고 주장하시는 학자분들이 많습니다. 이미 이러한 시민참여의식과는 거리가 먼 환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회적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청소년시민성'은 청소년지도자만이 행할 수 있는 귀한 정체성이며 가치라고 보여집니다.

청소년의 시민성을 함향하는 사람이 '청소년지도자'라고 주장합니다. 현재까지 나름데로의 학습과 실천현장에서 운동(movement)하며 결론지은 개념입니다. 저에게 청소년시민성(Youth Citizenship)은 청소년활동가로서 가치이며 이념이고 실천방법입니다.

시민성(Citizenship)의 개념

'시민성(citizenship)'은 '국가와 개인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개인이 국가에 요구하는 권리․자격과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책임․의무를 의미합니다(Steenbergen, 1994:2). 하지만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를 일상생활 전체로 확대시켜 보면, 개인이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를 결정 할 때 직접․간접적으로 혹은 부지불식간에 '시민'으로 행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Engle & Ochoa, 1988: 16-17). 이 같은 사실로 보아, 시민성을 개인과 국가간의 관계로 파악하는 정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일상생활 차원에서 개별 시민과 사회와의 관계로 확대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은지용, 2002).

'시민성은 도덕성의 실천이라고 강조하며 타인의 이익에 대한 고려라고도 설명합니다. 이는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국가의 개입보다는 자기 개발적이고 자발적 협동에 기반하는(Hayek, 1967) 내용입니다. 또한 시민성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주어진 지위이기도 합니다. 이 지위를 가진 모든 사람은 국가가 부여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그 권리와 의무가 무엇이어야만 하는지를 결정하는 보편적 원리는 존재하지 않으나, 시민성이 존재하는 사회란 이상적 시민성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제도로 여겨지며, 시민성은 공동으로 소유하는 ‘문명’으로의 충성(loyalty)에 기반한 공동체 멤버십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수여된 권리를 가진 공동법에 의해 보호받는 자유로운 인간의 충성(loyalty)입니다(Marshall, 1973). Habermas(1994)는 "시민성은 대화체(dialogical)인 공공 영역을 통한 평화로운 투쟁이다.”라고 강조했으며 (Kymlicka and Norman, 1995)은 “시민성은 특정 지위가 아닌, 일련의 권리와 책임감으로 정의되며, 이것은 정체성이기도 하고, 정치적 공동체 내 개인 멤버십의 표현이기도 하다.”라고 했습니다. “시민성은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개념이며, 그것은 법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요소를 포함하고 시민이란 권리와 의무를 가짐을 의미하고, 정체성과 사회적 유대감을 제공합니다”(Ichilov, 1998) 또한 “시민성은 적극적 멤버십이며, 권리와 책임감을 수여받은, 정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회 내 개인의 참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시민성은 정치적, 사법상의 지위 그 이상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사회적 역할입니다.”(Cesar Birzea in June 2002 at the 2nd Pilot Course on European Citizenship)

이러한 정의들을 살펴보면 “시민성(citizenship)“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광의적이고 다양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정의들은 여전히 ”시민성“에 대한 이해를 도울 뿐이며 명확한 하나의 일반적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에서도 공통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공통적 요소의 핵심은 "공동체 소속에 대한 질문(the question of belonging to a community)"입니다. 공동체는 도덕성, 권리와 의무, 문명에 대한 충성, 정체감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정의될 수 있습니다. 지리학적 측면에서도 공동체는 두 가지 주된 수준으로 정의됩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 공동체”와 사람들이 소속하는 “국가”인데 이 두 수준은 배타적인 것이 아닌, 그 정의나 개념에 종속적입니다. 또 다른 공통 측면은 시민성이 항상 공적인(in public), 민주주의적 공간(democratic space)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간에서 시민들은 동등한 권리와 책임감을 갖습니다. 이러한 권리와 의무는, 다른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그들의 책임감을 이행하도록 하는 ‘권리 실행’에 의존하여 실행됩니다. 이러한 집단에서의 시민성의 개념은 계속해서 변화하는데 Lasse Siurala는 이러한 변화하는 시민성의 종류를 디아스포라 시민성(Diasporic Citizenship), 성적 시민성(Sexual citizenship), 세계주의 시민성(Cosmopolitan citizenship), 도시 시민성(Urban citizenship) 등으로 정리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 '시민성'의 정의를 전 세계적으로 통용할 수 있도록 완전하게 내리기에는 이미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다만 공통된 가치체계에서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공통적 가치개념을 정리해 보면, 바로 '공동체 소속에 대한 참여'이며 이것은 과거 국가주의에서의 국민의 정의를 넘어서는 개념이고 지속해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시민성의 공통된 개념을 요약하면 "시민성(citizenship)은 변화하며, 공동체(community)에 소속되어 있고, 공공(public)의 민주주의 공간(democratic space)에 참여하며, 이에 대한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주어진 지위"라고 조작적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시민성의 핵심적 요체는 '참여'입니다. 즉, 이를 다시 요약해 보면 "공공의 민주주의 공간인 공동체에 소속된 모든 구성원에게,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참여하는 공동체는 일상생활차원에서의 공동체로부터 전지구적 공동체까지 개인이 인식하는 소속감에서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이 "마을의 시민인가? 전지구시민인가?"는 자기 자신의 선택에 따라 시민성의 공간도 결정되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청소년시민과 참여

시민이란 본래 그리스 시대의 도시공동체, 혹은 도시국가였던 폴리스를 구성하고 지배했던 사회 계층을 의미했던 말입니다. 그러나 시민이란 개념은 계속해서 변화를 격어 왔습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시민은 특수한 계층에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성, 이방인, 노예 등은 시민 계급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민의 개념은 점자 보편화 되어 단지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개념으로서 중세시대에는 아테네와 로마에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고 특정한 지위와 정치적인 권리를 가진 사회 집단을 의미하였으며, 오늘 날 대한민국에서 '시민'은 어떤 특별한 신분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인권과 기본권을 보장받고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또한 시민은 환경, 교육, 건강권, 교통안전, 소비자 권리, 성 평등 등 공동체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로 서로 관계 맺으며, 공동의 문제를 함께 숙의하고 해결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 사회의 모든 이들은 이미 시민입니다. 장애인, 노약자, 아동, 청소년 모두가 시민입니다. 청소년과 시민을 양분할 수 없습니다. 청소년은 이미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청소년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 환경에서 청소년을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위치권 중의 하나인 학생이라는 신분만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도 학생의 기본 가치와 이념에 맞지 않는 입시만을 위해 존재하는 철저한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을 Checkoway는 ‘자원으로 보는 시각’과 ‘희생자로 보는 시각’ 두 가지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청소년을 자원으로 보는 관점은 청소년이 자질 있는 시민으로서 지역사회에 참여할 권리가 있고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청소년들이 자신의 장점을 개발하도록 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편익을 제공하고 보다 건전한 지역사회개발에 기여하도록 하여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나 청소년을 희생자로 보는 관점은 청소년이 사회의 나약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하여 자주 희생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따라서 청소년을 구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며 청소년을 점점 악화되는 환경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Checkway, 1999). 이러한 청소년의 두가지 관점에서 참여의 다양한 개념을 정리하면, Winter는 “청소년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생활환경에 참여하는 기회”라고 정의(Winter, 1995)하였으며, Hart는 청소년참여를 기본권리라고 규정하면서 “청소년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 영향을 주는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과정”이라고 정의(Hart, 1997)하였습니다. 유엔총회에서는 청소년이 개발과정에 실제로 참여하는 정도가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하며 청소년참여를 일과 관련된 경제적 참여, 의사 결정과정과 권력의 분배와 관련된 정치적 참여, 지역사회 관여와 또래집단 참여와 관련된 사회적 참여, 예술․음악․문화적 가치와 표현 등 네 가지 형태로 구분 하기도 했습니다(ESCAF. Youth Participation Manual, 1999). Baizerman은 청소년시민참여 시민성활동이며, 공공 작업이고, 참여하는 것이며, 관여, 생생한 시민성을 의미하며 이것은 궁극적인 목적이며 민주주의와 청소년들의 발전을 위한 실행전략이라고 강조했습니다(Baizerman, 2009). 즉, 청소년은 이미 자질 있는 시민으로서 참여할 권리가 있고 사회에 봉사할 책임이 있기에 포괄적으로 청소년참여의 개념을 정리해 보면 ”청소년이 접한 다양한 환경 즉, '가족, 학교, 마을, 전 세계의 그 어떤 공간(space)이든지 청소년이 접한 다양한 환경'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모든 의사결정과정을 공유하는 과정”이라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생활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주장한 듀이의 정의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부 형태 이상의 것으로 어우러진 삶, 즉 함께 묶여진 의사소통 경험의 한 형식'이라고 하며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삶의 실체로서 타인의 관심을 고려하고, 다양한 관심을 가진 타인과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사회적 경험 혹은 사회 생활인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 경험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외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며, 자발적인 성향이나 관심으로 외적 권위를 대신합니다. 이러한 자발적인 성향과 관심은 교육을 통해 기를 수 있습니다(Dewey, 1961: 87).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사회의 시민은 자신의 관심사인 자유․권리 의식을 소유하면서 이를 잘 향유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관심사와 경험을 배려하는 의식과 참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현대 민주사회의 시민교육은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공동 관심사에 대한 광범위한 실제적 체험을 갖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성은 저절로 길러지지는 않습니다. 민주적 삶을 살아가며 참여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 길러집니다(은지용, 2002). 즉, 참여의 경험은 청소년의 시민성 함향을 위한 핵심적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사회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청소년의 시민으로의 인식과 그들의 참여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청소년이 시민이라는 인식 자체가 청소년들의 환경을 능동적으로 개발하고, 참여하여 민주적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일이라고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청소년들은 학생이라는 입시의 목적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위치권에 매몰되어 자신이 소유한 시민성을 함양 할 수 있는 참여의 환경이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을 타인이 일방적으로 개입하여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종당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인간이 가져야 할 마땅한 권리를 상실한 삶을 뜻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지속해서 보호해 주고 있으며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제공하고 나는 그 곳에서 그들을 통해서 그것만을 누릴 수 있다는 삶을 가정하면 끔찍합니다. 이러한 삶이 좋다면 아마도 가장 이상적인 환경은 교도소일지도 모릅니다. 먹여주고 재워주며, 제 시간에 깨워주며 건강을 위해 바른 식습관과 더불어 운동까지 지원합니다. 다만 이곳에서 없는 것은 개인의 주체성, 자유, 실제적인 참여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 청소년들의 일반적인 삶의 양태를 생각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지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인지 알게 됩니다. 그들의 삶에 그들이 참여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철저하게 막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래도 그들의 삶에 다양한 제도적 장치가 되어 있다고 강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에도 학생회가 있고 학교운영위원회가 존재하며 국가 정책적으로도 참여위원회와 특별회의가 있으며 청소년수련관 등의 시설과 청소년단체에서도 청소년위원회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접근해 보면 그들의 의견이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반영되어지는지는 의문입니다. 대다수 모든 청소년들의 활동과 복지에 그들의 실제적인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실제적인 참여를 뜻합니다. 형식적으로 이름만 올려놓고 위원회 구축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참여의 수준을 나눈다고 할 때 최저 수준에도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청소년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 전략은 참여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청소년의 보호적 관점에서 청소년참여 자체를 힘겨워 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기에 그들에게 전문가 입장에서 좀 더 좋은 그 무엇을 전달하면 좋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병폐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복지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전문가라 일컫는 분들이 이러한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잦습니다. 매우 경계해야할 부분입니다. 청소년은 참여와 소통의 당사자이지 수동적 객체로서 지시하고 통제하여 대상화할 일방적 보호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적 관점에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청소년기에 실제적인 사회참여와 민주시민으로서의 교육적 내용이 전달되지 않을 때 민주 시민으로서의 의식이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연령 기준을 통해 18에까지 직접적 배움이나 시민 참여의 경험 없이 갑자기 19세가 되면 성인 유권자로서의 자격이 완벽히 갖추어질 수 없습니다. 한 살 차이에 갑자기 완벽한 책임감을 가진 성인으로서 성장할리 만무합니다. 이러한 기대 자체를 갖는 것조차 비현실적입니다.

청소년은 참여의 주체이며 소통의 당사자입니다. 그들은 이미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자치운동의 이유

청소년의 시민성을 함양하는 것은, 청소년자치운동을 뜻합니다. 즉, 청소년자치를 위한 운동이 됩니다. 운동은 변화를 추동합니다. 뜻을 세우고 사람이 함께 하여 변화를 이루어 냅니다. 변화를 추동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이기에 가능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뜻입니다. 목적입니다. 사람을 위한 뜻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한 뜻입니다. 뜻은 목적이며 꿈이며 비전이고 미션이며 가치이고 철학이며 이념일 수 있습니다. 이 뜻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해 갑니다. 뜻을 세운 사람이 어떤 이들이냐에 따라 운동에 의해 실제적인 일들도 일어나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한명, 두 명을 통해 수많은 이들이 함께 하며 사회가 변해 갑니다. 운동의 정의를 명확히 하기 위해 근래 유행하는 사업인 사회사업(사회복지)과 비교해 봅니다.

사회사업(social work)이라는 뜻 또한 운동(movement)의 정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회사업은 사회로서, 사람으로서, 공동체로서 일을 도모하기에 어찌 보면 운동과 차이가 없어 보이나 차이는 존재합니다. 운동은 조직화를 통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주의 사회사업은 조직화에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사회를 도모(for the society)하여, 사회로서(by the society), 사업을 진행합니다. 차이가 존재합니다. 여기에서의 사회사업은 현재 만연해 있는 사회복지의 일반적 개념과는 차이를 두고자 합니다. 현재의 복지사업이 뜻은 이상적이나 대부분 실행 과정에서 사회사업의 근본 담론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연주의 사회사업은 그 근본 가치를 충실히 행합니다. 매우 중요한 핵심적 가치를 실현합니다. 운동담론에서도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운동은 뜻을 이루기 위한 모든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포괄적 관점으로 비추어 보면 사회사업 또한 운동의 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구체성을 어떻게 담보하느냐에 따라 운동의 다양한 관점은 부여됩니다. 용어와 개념은 혼란스럽습니다. 조작적 정의를 내립니다. 운동(movement)은 그 대상적 범위가 매우 큽니다. 운동에서 이루고자 하는 뜻은 가치가 존재합니다. 가치와 철학과 이념이 없는 운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일들을 대상으로 행해 나가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운동차원에서 진행하는 일들은 사람과 자연의 공생을 중요시합니다. 자연환경을 더욱 중요시하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궁극적 목적은 인간과 자연의 공생이나 현실론적 입장에서 자연의 피폐와 어려움으로 인해 더욱 중요시하기도 합니다. 또한 평화를 운동의 뜻으로 설정하여 청소년평화운동을 정의해 봅니다. “청소년이 사람으로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행하는 것”이라 정리합니다. 평화는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너무나 주관적인 개념이나 공동체성을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에게 평화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전해 질 수 있습니다. 객관화시키기 어려운 용어입니다. 저는 사람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자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가치로서 자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자치할 때 평화는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자신이 자치한 삶을 살 때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운동은 자신의 가치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 행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광범위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운동 또한 그런 개념으로 접근하면 매우 광범위한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뜻을 내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접근되어집니다. 수많은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뜻의 정점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소년운동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정리해 봅니다. 청소년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행하는 것이라 정의 내립니다. 사람다움은 무엇입니까? 다양한 관점과 수많은 논리가 작용합니다. 저는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청소년기에는 주체성을 가지고 자치한 사람을 뜻합니다. 청소년자치를 이루기 위해 참여합니다. 자치를 이루기 위한 전략으로서 청소년기 시민참여는 핵심입니다. 이러한 시민참여를 어떻게 이루어 나가느냐가 청소년운동의 관건입니다. 사업, 프로그램 등 모든 활동과 지역 활동에 청소년의 참여는 필수입니다. 청소년자치운동의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청소년자치와 평화

청소년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자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자치운동의 개념은 정합성의 원칙에 비추어 청소년운동(Youth Movement)을 행하는 모든 활동의 근본이며 기본 가치를 정의합니다. 청소년과 그에 대한 운동의 정의는 청소년활동의 전반을 가름합니다. 청소년평화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청소년은 자치해야 합니다. 그들의 환경에 참여하고 능동적이며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 주체적인 존재여야 합니다. 한 생명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나 현시대의 한국사회에서는 참여하지 못하고 항상 주변자로 남아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지역사회에 청소년이 보이기를 꿈꿉니다. 수평적 소통관계가 핵심입니다. 참여자로서의 자기 인식, 생명으로서의 인정을 받는 매우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사람으로서 수평적 관계로 서로가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중요한 명제이기도 합니다. 합력한다는 것은 지시와 통제가 아닌 협의하며 소통하는 수평적 관계를 뜻합니다. 청소년의 관계 형성(소통)의 핵심입니다.

청소년자치운동은 "청소년이 주체성(자기 주동성)을 가지고 그들에 의해(by youth) 사회와 수평적 소통이 가능하도록 그들과 함께(with youth) 하는 활동"이라 정의합니다. 청소년지도자들의 자치운동은 “청소년이 보이는 지역 사회체계를 구축”하고 “가치 지향적 청소년공동체를 형성”하는 활동이 되어야 합니다. 청소년자치운동은 청소년평화운동입니다. 제 안의 원칙(principle)입니다.

평화는 모든 이들이 꿈을 꿉니다. 다양한 종교에서 각자의 신념과 신앙대로 평화를 이야기도 합니다. 신앙과 신념이 실천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의 안을 보며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내적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종교도 있습니다.

예전부터 평화에 대해 고민하면서 제 안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과연 인간이 내적인 완벽한 평안을 이룰 수 있을까?”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절대적 평화가 가능할까?”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깊은 산으로 들어가 수행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만의 깊은 절대적 평화를 얻기 위해 사회를 등지고 떠나기도 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이러한 자기만을 위한 평화를 찾기 위해 수도를 위한 삶이 과연 옳을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되어 있기에 제 안에서는 그러한 삶이 쉽게 다가오지 못 했습니다. 세상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과정을 살아가는지가 평화담론에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무념무상은 가슴 안에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자신과 이루어진 주변의 수많은 관계를 회복시키는 과정 그 자체가 평화를 이루는 과정이며 결과입니다. 일방적인 주변만의 힘으로서 환경이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인 청소년이 그들의 환경에 주체가 되어 그들이 희망하는 환경을 조성해 나갑니다. 청소년들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 자체가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과정 그 자체가 평화로운 때이며 목적지라 여깁니다.

이러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 실천방법을 시민성에서 찾습니다. 시민성의 과정가운데 다음과 같은 사회적 접근의 네 가지 차원을 소개합니다.

청소년 시민성에 대한 사회적 접근의 네 가지 차원

시민성에 대해 개인과 사회 관계 속에서 사회에서 식별할 수 있는 4가지 하위조직과 연관되고 있으며 사회를 위해 필수적인 4차원적 요소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 4차원의 요소란 정치적 측면, 사회적 측면, 문화적 측면, 그리고 경제적 측면을 말합니다. 이를 구분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정치적 차원(The political dimension)입니다. 시민권의 정치적 차원이란, 정치 체제에 대한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책임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의 발전은 정치체계에 대한 지식과 참여기술 및 민주적 태도의 부양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의 개념, 정치 구조 및 국가적, 국제적, 유럽 단위의 의사결정 과정, 투표 시스템, 정치정당, 로비그룹, 정치 참여 및 다른 형태의 참여(시위 또는 언론사에 투고하기 등) 시민사회의 역사와 기초, 민주주의의 가치, 유럽(한국)의 인권, 유럽의 이주와 국제 정책을 포함한 현 정치이슈의 의식, 국제관계, 국제 기관과 법률제정, 미디어의 역할, 재판시스템, 경제 등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증진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수준을 올리기 위해서는 정치 제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태도 향상이나 참여 방식 또한 이론적 지식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시민권을 위해 필요한 정치적 차원은 이에 필요한 제반 상황에 대한 인식과 교육의 향상을 통해 조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회적 차원(The social dimension)입니다. 시민성의 사회적 차원은 사회 속에서의 개인들 간의 행동과 관련이 있으며, 어느 정도의 성실과 단결 역시 필요로 합니다. 사회적 기술과 사회관계의 지식은 이러한 차원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고립과 배제를 기피하고, 인권을 보호하며, 사회 속에서 서로 다른 그룹(국가적 소수자들 또는 민족적 집단)과 동반하며 사회 이슈(사회적 상황, 민족 집단이 처한 상황 등)에 관한 자각을 키우고 양성간의 평등을 위해 노력하며 정보사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인식하며 사회 안전과 복지, 자유와 건강의 불평등을 보완하는 것 등으로 증진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수준은 사회의 개인들 사이의 행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들이 지니는 충성심과 결속의 정도를 가늠하여 판단해 볼 것을 요구합니다.

셋째로 문화적 차원(The cultural dimension)입니다. 시민성의 문화적 차원은 공통적인 문화적 전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문화적 차원은 문화적 전통과 역사, 기초적 기술(언어능력, 읽기 및 쓰기 능력 등)의 지식을 통해 발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화의 소통경험, 환경의 보호, 인종차별, 범죄와 맞서 싸우거나 국가적, 범 유럽적, 전 세계적 문화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지식, 미디어와 정보기술이 역할에 대해 논해봄으로서 촉진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수준은 문화적 전통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드러나는데 문화적 차원에 대한 영역에서는 문화적 전통에 대한 지식과 역사 그리고 구성원이 기본적으로 알아야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능(언어적 능력, 즉 읽기와 쓰기)을 통해서 발전되어 왔습니다.

넷째로 경제적 차원(The economic dimension)입니다. 시민성의 경제적 차원은 개인과 노동, 소비자 시장 간의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최저생활수준과 노동에 대한 권리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제적 기술(직업관련 또는 기타 경제적 활동)과 집무 연수 등이 이러한 경제적 차원의 완수를 위한 핵심열쇠가 될 것입니다. 이 차원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기술 능력 개선, 사회의 소수그룹을 경제활동에 포함시키기, 혁신적 방법과 전략을 통한 세계화의 도모, 유럽(한국)과 세계의 경제 협력, 유럽의 서로 다른 근무 환경 및 고용과 미고용에 대한 연구, 세계 경제의 변화를 사회흐름 속에 자각하기, 소비자권리 보호하기 등을 통해 성취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측면이 도달해야하는 수준은 개인과 노동자 시장, 그리고 소비자 시장 사이의 관계이며, 누구에게나 일 할 권리와 최저 생계 수준에 대한 보장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경제적 기능과 직업상의 훈련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한 적절한 경제적 수준에 맞는 실천으로서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네 가지 차원의 방법들을 통해, 시민성은 의자에 비교될 수도 있습니다. 즉, 시민성이 가진 4개의 다리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요소가 될 것입니다. 시민성(citizenship)의 완전한 발전은 이 4가지 요소들의 균형 잡힌 완성을 통해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네 가지 차원을 가진 시민성의자에 우리 청소년들이 앉을 수 있을까요? 의자 다리가 정상일까요? 상상하건데 도저히 앉을 수 없는 균형이 맞지 않는 의자이거나 앉은뱅이 의자가 아닐까요?

안전한 관계의 공간을 통한 실천방안

청소년시민성을 함양시키는 것은 곧 청소년이 자치할 수 있는 바탕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실제적인 자치의 환경을 지도자 입장에서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지 관계론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은 관계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며, 사람과 동물이 관계합니다. 사람과 기계도 관계합니다. 그 관계는 실로 다양하게 이루어집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는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관계에 의해 사람이 행복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는 그 사이에 공간(space)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 공간을 '관계의 공간(Space of Relationship)'이라 칭합니다. 그 공간에 어떠한 작용이 일어나며, 어떠한 것으로 채워지는지에 따라 관계가 설정됩니다. 이 부분은 많은 논의가 필요하나 관계론을 정립하며 임의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자아와 자아가 만납니다. 자아가 만나기 위해서는 깊은 관계설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때에 또 다른 자아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3의 자아인 셈입니다. 이 자아는 관계의 공간에만 존재하며 무수히 많은 일들을 행합니다. 이 자아는 자신의 또 다른 분신입니다. 자신을 객관화 시키는 매우 중요한 기재일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관계의 공간에 어떠한 자아를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서 관계의 밀도와 내용은 전혀 다르게 전이 될 것입니다. 관계의 공간에서 자기 자신만의 자아만을 성장시켜 버리면 타인의 자아는 왜소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또 다른 자아는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이 부분을 자아비만이라고도 주장하는데,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자아의 비만은 상대방을 힘겹게 하곤 합니다. 따라서 사람들과의 관계의 공간, 즉 '연결점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야스퍼스는 "자기의 성만을 쌓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의 성만을 쌓는다는 것을 관계의 공간에 자기만을 성장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상호관계하며 평등한 공간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마음 안의 관계, 사회에서의 관계, 신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 등 우리 주변의 수많은 존재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 관계가 올바른 관계인지 그렇지 않은 관계인지에 따라 평화롭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청소년들과 세상과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청소년들이 평화롭기 위해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와 관계가 잘 이루어져야겠습니다. 청소년이 평화로운 관계를 앞에서도 잠시 설명 드렸지만 ‘수평적 관계론을 체계화합니다. 사회복지 이론에서는 대상자와 사회복지사와의 관계론 파트너십(partnership)부터 전문적 원고관계, 짝관계 등의 다양한 관계로 설명합니다. 대상자와 사회사업가(social worker)의 관계를 대상자의 문제 해결 중심으로 설정하는 방식입니다. 대상자의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형식적 파트너십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파트너를 존중하고 인정하여 함께 문제해결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 일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상자의 문제만을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사회복지사가 완벽하지 않음에도 목적 자체가 대상자의 문제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청소년의 ‘수평적 관계’의 핵심은 상대 문제의 해결만을 위한 관점이 아닙니다. 공통의 문제로 소통하는 관계이지 무조건적 청소년의 문제 해결을 위해 지도자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청소년지도자 또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며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지도자가 문제해결을 받기도 합니다. 문제라 여기지 않는데 문제로 생각하며 처리하려는 경우 또한 경계합니다. 세상과의 관계가 불균등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관계를 체계적으로 잘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비평화적인 관계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관계 회복을 위해 몇 가지 제언을 드립니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현재까지 경험으로 청소년들과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 즉, 청소년지도자로서 가져야할 매우 기본적 관계론입니다.

첫째로 청소년을 대신하지 않고 참여하게 합니다. 가능한 앞에서 설명드렸던 청소년시민성 함양을 위한 네가지 차원이 지원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청소년이 주체로서 그들이 행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합니다. 또한 지도자들이 청소년들과 행하는 모든 프로그램과 사업들에 이러한 방법이 녹아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인권에서도 참여권을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해야 하지 대신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되도록 함께 합니다. 대신하여 대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청소년운동을 수년간 해 오며 원칙적 목적으로 설정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나 쉽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추동하며 가치를 가지고 최선을 다합니다.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중학교 때 암송했던 사랑을 주제로 한 시 귀절의 한 부분입니다. 자신이 복종하고 싶다고 여길 때 이미 복종의 의미에서 자발성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다만 복종의 과정이 강압과 지시, 통제로서 이루어진 것은 철저한 복종관계이며 주종관계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싶은데'입니다. 대신하지 않고, 지시하지 않고, 강압하지 않으며 할 수 있도록 참여시킵니다. 참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하며 설명합니다. 소통을 행하며 대화하려 하지 지시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수평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내가 문제가 있음을 직시합니다. 청소년을 존중합니다. 그들과 함께 나와 당사자, 주변 환경의 잘못된 관계를 회복하는 작업을 합니다. 청소년지도자가 가르치고 지시하고 통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매우 잘 못된 관계입니다. 서로간 존중하고 상호 소통합니다. 지도력(leadership)을 길러야겠습니다.

셋째로 모든 일은 함께 합니다. 지도자가 자신이 생각해서 옳다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좋은 뜻의 일도 함께 논의하는 과정을 가지고 소통합니다. 과정은 결과입니다. 과정이 결과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청소년평화운동 과정 자체가 목적이며 결과입니다. 과정이 목적이 됩니다. 과정을 결과의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준비하는 단계부터 이미 목적은 성취되어가고 있습니다. 목적은 가치를 이루는 과정입니다. 최상위 가치는 평화입니다. 평화는 가치를 이루기 위해 시작하는 순간 생성됩니다. 상대와 내가 관계하는 순간 평화는 시작됩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미 평화를 위한 과정이 시작되었다면 매 순간이 결과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과정이 목적이자 결과입니다. 따라서 결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넷째로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습니다. 권위적으로 대하는 것은 문제이나 자기위치에서의 권위는 이미 내포하고 있습니다. 교사는 교사다워야 하며, 부모는 부모다워야 합니다. 청소년지도자 또한 지도자다워야 하며, 사회사업가 또한 사회사업가다워야 합니다. 어느 교가 자신은 학생들과 '친구같이 관계하고 싶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교사는 교사다워야 하지 결코 또래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평적 관계론은 상호 소통의 의미를 강조한 이론이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도자는 지도자다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책임과 권한을 지속적으로 부여합니다. 앞에서 설명했던 방법과 맥을 같이 합니다. 어떠한 일이건 책임이 있으면 권한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에게 그에 합당한 책임에 따른 권한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입시를 위한 책임만을 부여한 후 모든 권한은 빼앗아 버린 상태입니다.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있는 권한을 돌려 주어야 합니다. 참여하게 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자신이 속한 환경에 참여하는 중요한 방법 중에 한 부분입니다. 자율적으로 선택하여 참여하고 이에 따른 책임도 함께 가지고 갑니다.

청소년자치가 이루어지면 그들은 평화로워 집니다. 청소년들의 참여가 실제적으로 일어날 때 청소년자치가 이루어지며 그들은 평화로워 집니다. 내적 무상무념의 개념이 아닌 사회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자치의 관점으로 평화를 해석합니다.

청소년지도자로서의 평화적 관계의 핵심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부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시하고 통제하지 않아도 됩니다. 삶 자체에서 청소년들에게 본을 보이는 지도력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지향해야 할 변하지 않는 가치

청소년수련관, 청소년수련원, 청소년문화의집, 청소년(상담)지원센터, 청소년복지시설, 청소년단체, 청소년쉼터 등 다양한 청소년관련 기관 단체가 존재합니다. 각종의 청소년관련 시설의 평가가 있습니다. 매우 예민하게 대응하며 힘겨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근래에도 청소년수련관 평가가 있었습니다. 참여하는 평가위원들의 객관적 자료로 평가하기도 하나 주관성이 많이 가미되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평가에서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관련 시설의 요체가 무엇인지 주목해야 합니다. 청소년시설이라며 건축했고, 이를 위탁 받거나, 지자체에서 직영하거나, 공단을 세워 운영하기도 합니다. 사업 내용을 자세히 보게 됩니다. 학원식 문화교육프로그램 진행하여 수익남깁니다. 평생교육(학습)이라는 용어로 치장하지만 결국 학원식 교육프로그램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행사하고 공간대여 하며 수익 창출합니다. 그나마도 청소년들 대상으로 하면 좋을 진데 아이들이 자주 찾아 오지 않는다며 온통 지역 성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넘치게 만들어 냅니다. 더군다나 유아, 아동까지 대상화하여 수익남기고, 어린이 대상만의 다양한 캠프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수련관이 평생교육시설일 수도 있으나 정체성은 청소년에게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중심이 되는 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기관은 청소년들에게 안전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청소년의 시민성 함양을 위한 도구로서의 프로그램과 사업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닌 프로그램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로그램의 최상위 변하지 않는 원칙은 온데 간데 없이 실적의 성과로서만 비치되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청소년축제를 하더라도 그 안에 청소년들의 실제적인 참여가 있어야 합니다. 참여 없는 대상으로서의 지시는 통제를 의미합니다. 곧 그 사업은 우리의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고 맙니다. 힘겨워도, 청소년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수익사업이 아닌 청소년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청소년사업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결국 청소년의 시민성이 함양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청소년댄스, 그룹사운드, 노래, 만화, 봉사활동, 캠프, 공동체 놀이 등 수많은 도구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며 시민성함양을 통한 그들의 자치를 꿈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활동이 청소년관련 기관의 목적이며 실행 방법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청소년의 참여방법에 대한 실제적인 사업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참여 방법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동아리활동, 위원회 활동 등 다양한 자치활동이 실제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즉, 청소년기관은 청소년시민성을 함양하는 기관이라는 인식이 정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도구적 기술들을 익힐 뿐이지 기술이 주가 된 채 시민성은 온데 간데 없다면 이는 청소년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문제로 보여집니다.

앞으로는 "청소년관련 기관, 단체는 청소년시민성을 함양하는 곳이다."라는 인식이 모든 시민들에게 각인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청소년지도자라 표현합니다. 청소년을 지도한다는 것이겠지요. 지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지도력이 큰 사람들을 지도자라 칭합니다. 영향력을 넓히고, 권한을 가지고 많은 이들에게 명령하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만을 지도력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 자체를 통해 본을 보이며, 자기 자리에서 긍정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지도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환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환경의 긍정적 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긍정적이란 혼자만의 이기성을 발현시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삶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합니다. 여기에서의 공동체 크기는 우리네 지도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의 자기 공간은 어디입니까?"

제가 질문하는 공간은 막연한 공간이 아닙니다. 자신이 생각해서 내가 참여하고 그에 대한 책임과 권리가 존재하는 공간을 뜻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가정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자식, 내아내로 시작해서 내 집이 전체라고 여기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 분들의 삶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가 추구하는 시민성을 통한 공동체의 '자치하는 삶'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나마 가정안의 공간이 자신만의 공간이라 여기는 분들은 양호한지도 모릅니다. 철저히 자기만의 공간에서 나오지 못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이들은 회사, 자신의 부서 등이 모두인 분들도 계십니다. 울타리에 갖히는 경우와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을 가족, 기관, 회사, 마을을 넘어 전 지구적인 공간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지구시민이라 칭합니다.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며 지금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서 삶에 최선을 다해 영위하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의 사막화 때문에 결국 여러 나라들이 황사로 인해 고통받습니다. 만약 중국 정부가 지구시민의식을 가졌다면 사막화를 방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프리카 청소년들의 힘겨운 삶을 책과 메스컴으로부터 전해 듣습니다. 먹을 물이 없어 동물의 대소변이 섞인 물을 먹어 몸속에 기니아충이라는 벌레가 부화해 몸을 뚫고 나오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환경을 인식한 시민의 삶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미국의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라크 시민들의 삶의 피폐함을 전해 받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의 힘겨움, 이스라엘로 인해 고통 받는 팔레스타인의 비참함 등 세계의 수많은 일들이 존재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북한의 삶을 우리가 공동체 의식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매번 삶의 지향을 내 안으로만 국한시키고 그 안에서만 해결하려는 나만의 공간에 쌓여 있지는 않았는지 철저히 반성해 봅니다.

청소년지도자, 청소년활동가, 청소년복지사, 청소년상담사 등 수 많은 명칭은 존재하지만 그러한 나를 호칭하는 그 위치의 본질의 공간은 어느 정도 크기인지 철저히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공간만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자명한 이치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이 곳의 삶은 결국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공간의 책임과 권리에 수반하는 삶일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만납니다. 우리사회에서 10대라 이름 붙여진 청소년입니다. 과거 개인적 열정만으로 그들이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내 자신의 너무나 작은 공간을 바라보며 그것이 모두인냥 강요할 때였습니다.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상대를 위한다며 힘들게 관계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변화과정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삶에 본질적 가치에 대한 고민은 항상 남아있었습니다. 행복이라는 화두 자체의 어려움도 가슴 안에 존재했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와 물질론적 행복에 취해 사는 게 아닌 본질담론 안에서 사람다운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자치하는 삶이고 싶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청소년들 또한 자치한 삶이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강압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강압하고 지시하는 순간 본질은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잘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결국 본을 보이며 소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또한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가끔씩 분노하는 제 가슴을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표출하지 못합니다.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슴에서 새어나오는 어려움, 힘겨움, 고민들은 내 자신이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에 발산하는 기운입니다.

결국 내 자신의 평화를 내가 만들지 못하는 한 힘겨운 외피적 상태의 ‘교사’로서의 역할밖에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 위해 안전한 공간을 전지구적으로 넓히고자 노력합니다. 내 자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입니다.

평화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중요한 가치임을 믿습니다. 자치한 세상이 평화세상임을 믿습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립니다. 사회에서 자유 합니다. 사회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람을 인정해야 합니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내가 함께 하는 공간이 지구촌이어야만 가능합니다. 공생하는 삶입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자신의 환경에 참여하여 자치한 삶을 통해 이 세상에서 모든 만물과 공생하며 평화로운 삶이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 청소년지도자로서 우리는 가치 지향적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앞에서 청소년의 의미와 자치, 시민성, 참여, 평화, 운동 등의 가치와 철학에 따른 이념을 강조했습니다. 이론적 체계를 완벽하게 구축하여 모든 이들이 동의했으면 좋겠으나 저의 부족한 학습과 미천한 현장 활동으로 인해 이정도의 내용을 정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청소년들과 지역사회와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며 진행했던 운동은 제 안의 가장 큰 가치이며 이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치를 논하고, 철학을 논하며, 이념을 강조했습니다. 평화로운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 청소년이 자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청소년자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시민성을 강조했습니다. 시민성은 청소년시민참여가 이루어져야 하며 참여를 위해서 4가지 차원을 설명드렸고, 수평적 관계가 중요하며,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지도자의 역할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의 대상은 특히 약한 이들입니다. 약한 사람들, 그 중 청소년들, 그들 중 더 약한 이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가치중립적이라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치는 지향해야할 가장 소중한 원칙이지 중립에서 고민해야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한 가치를 어찌 이런저런 판단으로 중간에서 자기의 이기적 목적을 논하며 오락가락 할 수 있습니까? 가치는 지향해야할 원칙이지 이런저런 가치를 부여하며 중립을 지켜야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 우리사회에서 이러한 아주 근본적인 가치가 ‘말살’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또한 중립을 지켜야할 대상이 아닙니다. 지향해야할 매우 소중한 가치 중 하나입니다. 청소년지도자들의 자기 가치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느냐에 따라 만나는 청소년들의 사회참여와 삶의 질에 대한 자기철학이 만들어 질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가치’는 지향해야할 변하지 않는 ‘원칙’입니다.

청소년지도자로서 여러분들이 지향해야 할 가치는 무엇입니까?

ps.

완전한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사람이 가진 수많은 사상과 이념을

그대로 존중하며 상호 소통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가진 철학이 지구시민차원의 '시민성(Citizenship)'이 담긴

자기철학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상호 공동체적 입장에서 소통했으면 좋겠다.

비판적 사고를 통해 서로 간 관계하여 긍정하며 논리와 원칙이

이해되고 소통되는 조직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러한 이해가 우리의 아이들 저변에 놓여져 있으면 좋겠다.

공동체적 삶의 가치와 자기철학, 이념은 더욱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완전한 객관은 아니나 이러한 뜻에 의한 당대의 현실적 문제에 더욱 치열하게 부디쳐 보고 싶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삶을 살아가며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가슴의 따뜻한 열정을 불어 넣어 주고 싶다.

청소년지도자분들을 위해 강의 준비하며

이렇게라도 글을 쓰고 나면 가끔씩 현실감 없는 괴리에서 오는

비판적 자괴감을 갖기도 하지만, 청소년활동가로서 살아야하는 당위성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 성찰을 추동하는 도구정도는 된다고 여겨진다.

가야할 길에 대한 더욱 뜨거운 확신이 선다.

준비하는 과정가운데 어려움도 있으나 활동가(activist)로서의 삶의 방향이

선명해지기에 감사한 일이다.

부디 이번 강의도 지나가는 한 순간의 일정이 아닌

참여하는 모든 분들에게 청소년지도자로서

삶에 대한 자기 확신이 조금이라도 만들어지기를 기도한다.

어느 늦은 가을 밤, 코막히고 목 아플 때

정건희 드립니다.

 

http://www.youthauto.net/zboard/view.php?id=example&no=77